¡Viva Bolaño!

POST : Entre paréntesis

용감한 사서(El bibliotecario valiente)


보르헤스에 대한 글이다. 이 글을 읽고 나면 보르헤스에 대한 볼라뇨의 빠심이 어느 정도인지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페인어에 대한 이해도 아직 한참 부족한 데다 한글 구사 능력도 많이 딸려서 이상한 문장들이 종종 눈에 띌지도 모르겠다. 맥락 자체가 이해 안 되는 부분도 있었다.

원래 한 문단의 글인데, 가독 편의상 문단을 나눴다. 이번에도 A님과 J님 덕에 그나마 이 정도라도 옮길 수 있었...



용감한 사서


보르헤스는 시인으로 시작했다. 그는 독일 표현주의 문학을 찬미했다. (그는 의무감으로 프랑스어를 배웠고, 우리가 사랑이라 부를 법한 그런 감정으로 독일어를 배웠다. 우리가 중요한 것들을 배울 때 그러하듯, 선생님 없이 혼자서 독일어를 배운 것이다.) 하지만 아마 한스 헨니 얀은 읽지 않았을 것이다. 1920년대 사진들에서 우리는 손발을 떠는 듯한 모습의 슬픈 얼굴을 한 젊은이를 볼 수 있다. 그의 몸은 둥근 것, 보드라운 것을 향하는 듯 각이 없다. 그는 관습적인 우정을 실천했고 거기에 충실했다. 스위스와 마요르카에서 사귄 첫 번째 친구들은, 청년기의 열정, 청년기에 대한 순수한 기억의 열정과 함께 그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그는 운이 좋았다. 칸시노스 아센스를 자주 만났고 영원히 발표되지 않을 스페인의 원고를 발견했다. 하지만 자신의 나라(*아르헨티나)로 돌아가서 운명의 가능성과 마주했다. 그건 자신이 꿈꾸던 나라에서 자신이 꿈꾸던 운명이었다. 아메리카의 무한함 속에서, 그는 용기를 상상했고 자신의 그림자였던 용감한 사람들의 티없이 맑은 고독을 상상했다. 장갑처럼 삶에 꼭 맞는 하루를 상상했다. 그는 운이 좋았다.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리카르도 구이랄데스술 솔라르를 알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가 만났던 대다수의 스페인 지식인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이 틀린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여동생은 스페인 시인과 결혼했다.


아르헨티나 제국 시대였다. 모든 것을 손에 넣은 것 같았을 즈음,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히지 않은 채 스스로를 남반구의 시카고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남반구의 시카고는 자기 자신만의 칼 샌드버그(물론, 그가 찬미하는 시인)를 가졌다. 로베르트 아를트였다. 그 시절 둘은 가까이 지냈고, 영원히 헤어져버렸다. 하지만 그 이후 둘 중 한 명은 현기증 속으로 가라앉았고 다른 한 명은 어휘를 찾아 가라앉았다. 아를트의 현기증으로부터, 자신의 정신착란적인 상태 속에서, 유토피아는 탄생했다. 그것은 슬픈 권총 살인범들 ㅡ 그들은 오랜 시간 그들의 대륙과 공화국 주위를 맴돌았던 공포를 예감했다의 이야기였다. 에르네스토 사바토의 [파괴자 아바똔]과 같은 방식이었다. 그와 반대로, 어휘를 찾아 나섰던 보르헤스는 인내했고, 문학의 행복 속에서 겸손한 확신을 가졌다.


보데오와 플로리다는 양쪽 그룹의 대명사였다. 첫 번째는 서민적인 동네로 인식되었고 두 번째는 중심적인 거리가 되었다. 지금은 양쪽 동네 모두 망각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아를트와 곰브로비치다. 보르헤스는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남아 있지 않는 그들의 대화는 지금 거대한 공허로 남아 있다. 이것 역시 우리 문학의 일부이다. 물론 아를트는 젊어서 죽었다. 상실로 가득하고 동요 많은 인생을 보낸 뒤였다. 아를트는 기본적으로 산문 작가였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아니었다. 보르헤스는 시인이었다. 굉장히 좋은 시인. 에세이도 썼다. 그리고 서른 살에 접어들어서야 소설을 쓸 수 있었다. 스페인어권에서 위대한 시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네루다가 있었지만 보르헤스는 거의 좋아하지 않았다. 세사르 바예호의 그림자도 드리우고 있었지만 보르헤스는 읽지 않았다. 비센트 우이도브로도 있었다. 보르헤스와 친구였지만 이후 보르헤스의 처남이 되면서 적이 되었다. 올리베리오 히론도도 있었지만 보르헤스는 항상 표면적으로만 그를 대했다. 이제는 가르시아 로르카의 차례. 보르헤스는 그를 직업적인 안달루시아인이라고 말했다. 후안 라몬에 대해선 웃기만 했고, 루이스 세르누다에 대해선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사실상 네루다밖에 없었다. 휘트먼이 있었고, 네루다가 있었으며, 서사시가 있었다. 서사시는 그가 사랑이라 믿었던 것이고 많이 사랑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고통의 이면뿐인 서사시가 담긴 이야기였고, 아이러니와 유머가 담긴 이야기였다. 이전에 서사시가 차지하고 있던 장소에서 표류하고 있는, 인류의 노력이 담긴 이야기였다. 그 책은 그의 친구이자 선생님인 알폰소 레예스가 쓴 [현실과 상상의 초상화]에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멕시코의 책을 통해 알게 된, 그리고 보르헤스와 레예스가 모두 좋아하는, 마르셀 슈봅의 [상상의 생명]에도 빚을 지고 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보르헤스가 이미 유명해졌을 때, 그리고 맹인이 됐을 때, 그는 멕시코시티에 있는 레예스의 서재를 방문했다. 그곳은 공식적으로 "알폰소의 예배당"이라 불리고 있었다. 거기서 보르헤스는, 만약 레오폴도 루고네스의 집을 "레오폴도의 예배당"이라고 부른다면 아르헨티나인들이 얼마나 허튼소리를 하고 있는 거겠냐는 코멘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영어본으로 [돈 키호테]를 처음 읽었고, 그 후에 그보다 더 좋은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돈 키호테]에 대한 가장 확실한 내용을 잊고 있다. 그것은 미겔 데 우나무노가 쓴 것도 아니고, 유감스러운 라미로 데 마에추처럼 우나무노를 따르는 비듬 투성이의 군중이 쓴 것도 아니다. 바로 보르헤스가 쓴 것이다. 해적들과 다른 불한당들에 대한 책을 쓴 뒤, 그는 두 권의 단편집을 썼다. 20세기에 스페인어로 쓰인 단편집 중 아마도 최고의 두 권일 것이다. 첫 번째 책은 1941년에 나왔고 두 번째 책은 1949년에 나왔다. 그 순간부터 우리 문학은 영원히 바뀌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꽤 기억할 만한 시집들도 썼다. 비록 환상적인 이야기꾼으로서 영예와 엄청나게 많은 뮤즈들 사이에서 주목 받지 못한 채 지나가버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함은 그의 장점이다. 명확한 글쓰기나, 휘트먼에 대한 아마도 여전히 독창적인 독해, 역사가 있는 독백과 대화, 영어 운율에 대한 정직한 접근과 같은. 그는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문학에 대한 강의를 우리에게 해주었다. 모두들 이해한다고 믿고 있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유머에 대한 강의 또한. 인생의 마지막 날, 그는 용서를 빌었으며 자신은 여행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용기와 지성을 찬미했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289-291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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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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