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 Bolaño!

POST : Etcétera

『전화』 편집자 노트 (by 김뉘연)


볼라뇨에 대한, 그리고 볼라뇨의 단편집 [전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전화]에 수록된 단편들 중 일부는 단번에 이해되기에는 조금 모호한 경향이 있다. 보르헤스의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단편 속 표현을 빌리자면 "애매모호성은 하나의 풍요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느가." 좌우간 이 편집자 노트를 통해 그런 모호함이 많은 부분 해소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렇다고 그것이 정답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현재는 출판사의 공식 커뮤니티에만 포스팅되어 있는데 증쇄할 때 책에 직접 실렸으면 좋겠다.

총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스크롤 압박에도 불구하고 한 포스팅에 담는다.
 

출처 : 
http://cafe.naver.com/openbooks21/830

          

『전화』 편집자 노트

- 통화 중

 

열린책들에서는 그간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을 4편 펴냈다. 기회주의적인 삶을 산 어느 사제의 씁쓸한 독백이 담긴 『칠레의 밤』, 멕시코를 떠도는 한 우루과이 여인의 잔혹한 기억을 파고드는 『부적』, 하늘을 누비며 시를 쓰는 칠레 조종사의 행방을 좇는 『먼 별』, 그리고 볼라뇨의 첫 단편집 『전화』. 이제 볼라뇨의 방대한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2666』의 출간을 앞둔 지금, 이 단편집을 펼쳐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얽히고설킨 볼라뇨식 미로를 통과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일말의 실마리들이 이 안에 숨은 까닭이다. 로베르토 볼라뇨는 14가지 단서들에 이야기라는 외피를 입힌 후, 작가의 삶(1부), 폭력(2부), 그리고 여자의 일생(3부) 등 세 가지 주제로 나누고 다시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냈다.

이 편집자 노트 또한 세 파트에 걸쳐 작성되었다. 등장인물들부터 독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볼라뇨의 사람들>을 둘러싼 이야기, 그리고 볼라뇨의 작품 세계를 보다 세밀하게 엿보고자 진행한 <옮긴이와의 대화> 2편. 모쪼록 그동안 소개된 로베르토 볼라뇨 세계의 일면에 매료되어 막연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이 노트가 미로 속 유용한 지도가 되었으면 한다.

 열린책들 볼라뇨,심농 편집자 김뉘연     

 



 제1부. 떠돌이들 - 볼라뇨의 사람들, 탐정이 되어 거울 앞에 서다


< 망명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작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천히 또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조금씩 작아져서 자신의 진정한 크기를 획득하는 것이죠. (……) 모든 작가는 문학에 뛰어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망명자입니다. 모든 독자는 책을 펼쳤다는 것만으로 이미 망명자입니다.> - 로베르토 볼라뇨, 「망명」, 에세이집 『괄호 치고』 중에서

 

볼라뇨가 묻는다. 세상 어디에서든 먹고 살 수 있는 직업 두 가지는? 작가, 그리고 창녀. 자기 자신을 팔아 어느 땅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 이보다 더 매력적인 조건을 가진 직업이 또 있을까? 다시, 볼라뇨가 답한다. <작가가 되는 것보다는 살인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가 되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밤중에 혼자 범죄 현장을 다시 찾아가고, 귀신을 보고도 겁먹지 않는 형사 말입니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경찰이기 때문에 자기 입에다 한 방 먹이면 그만입니다.> 볼라뇨식 <탐정 놀이>의 시작. 볼라뇨는 스스로 탐정이 되는 것은 물론, 우리 또한 탐정으로 만들고 만다.

『전화』 속 볼라뇨의 문장들을 뒤따라가던 당신은 불현듯 누군가를 뒤쫓고 있다. 그들은 우리 곁에 머물다 홀연히 사라진다. 혹은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다. 시인, 군인, 독학생, 이방인, 포르노 여배우……. 이 범상치 않은 목록을 관통하는 공통분모는 바로 <망명>이다. 칠레에서 태어나 멕시코와 스페인을 떠돌고, 기존 문학을 헤집으며 그 틀을 파괴해 나가는 가운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로베르토 볼라뇨, 그리고 볼라뇨의 사람들. 이들은 모두 <망명자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망명자들을 뒤쫓는 망명자들, 또는 탐정들, 이라고 해두자.

딱히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로 막을 내리곤 하는 이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가는 가운데 당신은 문득 거울 앞에 서게 된다. (<탐정 놀이>에 이은) 볼라뇨식 <거울 놀이>. 볼라뇨가 말한 바 망명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작아지는 것, 그렇게 자신의 진정한 크기를 획득하는 것이다. 떠돌이들의 삶, 쫓고 쫓기는 게임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렇다. 탐정도, 범인도, 거울 앞에 섰다.

 


출처 : http://cafe.naver.com/openbooks21/844


『전화』 편집자 노트  제2부. 떠도는 이야기들

- 옮긴이와의 첫 번째 대화

 

열린책들이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를 알리고자 펴냈던 버즈북(buzzbook, 신간 예고 매체)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의 비평들을 번역하기도 했던 옮긴이와 『전화』 출간을 일주일 앞두고 있던 지난 9월 3일, 짧은 이야기들을 둘러싼 긴 이야기를 나눴다. 꼬리에 꼬리를 문 대화들의 품새가 이제 보니 볼라뇨의 단편들을 닮아 있다.

★ 옮긴이와의 대화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전합니다. 이 첫 번째 대화에서는 볼라뇨의 첫 단편집 『전화』를 매개 삼아 『칠레의 밤』, 『부적』, 『먼 별』, 그리고 『전화』로 이어지는 볼라뇨의 작품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자 했습니다. 이어질 두 번째 대화에는 『전화』 속 14편의 단편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열린책들 볼라뇨·심농 편집자 김뉘연     

 

볼라뇨와 벨라노

 

편집자 _ 로베르토 볼라뇨의 첫 단편집이 드디어 출간되었습니다. 볼라뇨와의 전화 통화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그런데, 볼라뇨 단편집 3편 『전화』, 『살인 창녀들』, 『참을 수 없는 가우초』 가운데, <전화>라는 제목이 가장 싱겁기는 합니다…….


옮긴이 _ 원래는 우리말 제목을 <전화 통화>라고 정했다가, 다시 <전화>와 <통화> 중 <전화>로 결정했는데요. 그 이유는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결국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전화 통화에 실패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전화>라는 제목은 사실 전화보다는 전화가 만들어 내는 <거리>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화라는 것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사용하는 도구이고,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죠. 이러한 거리감이 만들어 내는 불확실성, 그 불확실성이 주는 공포와 불안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 시작 전의 제사(題詞)에서 인용된 체호프의 문장 <누가 당신만큼 내 공포를 잘 이해할 수 있겠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 _ 흥미로운 해석인데요. 제사의 의미 또한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옮긴이 _ 『전화』에 수록된 열네 편의 단편들은 언뜻 보기에 그 성격이 각기 달라 보입니다. 그런데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이렇듯 특정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각 단편의 등장인물들은 주로 서로 떨어져 있으니까요.

 

편집자 _ 등장인물 중 특히 중요한 한 사람 이야기를 해볼까요. 아르투로 벨라노. 로베르토 볼라뇨와 이름이 닮은 이 등장인물은 볼라뇨의 소설 『먼 별』에서 아르투로 B.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던, 이를테면 볼라뇨의 얼터 에고인데요. 『전화』 속 여러 단편 가운데 이 아르투로 벨라노라는 이름이 종종 눈에 띕니다.

 

옮긴이 _ 단편 중 1인칭 화자가 많이 등장하죠. 거의 다 아르투로 벨라노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아르투로 벨라노가 과연 모두 동일 인물일까요?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면면이 너무나 다양하거든요. 『전화』 속 단편 중 <형사들>에 등장하는 아르투로 벨라노, 장편소설 『부적』의 아르투로 벨라노, 그리고 볼라뇨의 또 다른 단편집 『살인 창녀들』의 아르투로 벨라노 등 이 모든 아르투로 벨라노들이 각자 칠레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각각의 내용이 차이가 납니다. 또 볼라뇨의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유일하게 주인공으로 등장하고요. 기본적으로는 볼라뇨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철저히 소설 속 인물이기도 한 거죠. 이것이 아르투로 벨라노라는 인물이 가지는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볼라뇨 작품 자체가 <자전적 요소와 픽션적 요소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상징하는 인물이 아르투로 벨라노인 셈입니다.

 

편집자 _ 확실히 볼라뇨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특히 이번 단편들의 경우, 분명 볼라뇨가 자기 삶의 파편들을 재구성한 인상인데요.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자전적인 작품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옮긴이 _ 볼라뇨 인터뷰 가운데 다음의 말이 기억납니다. 볼라뇨가 자신의 삶을 모티프로 삼을 때는 <기억을 단순히 되살린다>는 겁니다. 즉 자전적인 이야기가 녹아 있다고 해서 한 개인의 사적인 일기 같은 작품이 아니라, 이러한 자전적 요소가 픽션을 만들어내기 위한 하나의 기능으로 존재하는 듯합니다. 어쩌면 이런 점에 있어 볼라뇨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죠. 사실 볼라뇨가 개인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은 별로 없기도 하고요. 열다섯 살에 학교를 중퇴했으니 다른 작가들처럼 딱히 내세울 경력은 없지요. 다음의 예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자신의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대해서도, 볼라뇨는 이건 문학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쓴 문학에 관한 소설은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 유일하다>고 했어요.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인간>과 <시대>에 관한 이야기이고, 멕시코 이야기를 쓴 까닭은 그냥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주제였기 때문이라고요. 그러니까 친구 마리오 산티아고와 함께 했던 <인프라레알리스모infrarrealismo> 운동을 특별히 부각시킬 의도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라뇨 작품 세계의 본바탕은 자전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과시하려고 쓰는 종류의 작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

 

편집자 _ 눈 밝은 독자라면 현재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부적』이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일부분을, 그리고 『먼 별』이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의 일부분을 확장한 이야기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이렇듯 <볼라뇨 세계>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 작품과 작품이 연결되는 <상호텍스트성>을 대변하는 인물이 바로 볼라뇨의 얼터 에고인 아르투로 벨라노라는 생각이 듭니다.

 

옮긴이 _ 그리고 이러한 볼라뇨 작품 속 <상호텍스트성>을 일종의 <거울 놀이>라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의 단편이 다른 장편과, 또는 다른 단편집에 실린 작품과 유사한 내용으로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번 단편집 『전화』를 예로 들어 본다면, 3부에서 다룬 여자들의 삶 중 단편 「조안나 실베스트리」는 장편 『먼 별』의 에피소드 중 하나를 깊게 파고든 이야기입니다.

 

망명자들

 

편집자 _ <거울 놀이>, 기억해 두겠습니다. 이렇듯 『전화』는 기본적으로 볼라뇨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요. 올해 초 열린책들에서 로베르토 볼라뇨를 알리고자 펴냈던 버즈북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를 이번에 다시 읽다 보니 『전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변방(변두리)의 이야기, 방랑자들(망명자들)의 이야기, 그 어긋난 세계의 이야기…….

 

옮긴이 _ 그럼 <망명>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망명>은 볼라뇨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어느 글에서 볼라뇨는 우리 모두를 망명자라 칭하고 있는데요. 망명자에 대한 볼라뇨의 생각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망명자와는 조금 다릅니다. 볼라뇨 에세이집 『괄호 치고』에 수록된 「망명Exilios」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볼까요.

<망명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작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천히 또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조금씩 작아져서 자신의 진정한 크기를 획득하는 것이죠.>

<(……) 어쩌면 우리 작가들과 독자들은 유년기를 지나면서 망명을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문학에서 망명 작가라는 명칭을 따로 설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작가는 문학에 뛰어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망명자입니다. 모든 독자는 책을 펼쳤다는 것만으로 이미 망명자입니다.>

<(……) 사람들은 제가 칠레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저는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로 칠레에 돌아가지 않았지요. 그래서 흔히들 저를 망명 작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저는 한 번도 그렇게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제가 망명자라고 느끼는 순간은, 칠레 사람들이 제게 스페인 사람처럼 말한다고 하거나, 멕시코 사람들이 제게 칠레 사람처럼 말한다고 하거나, 스페인 사람들이 제게 아르헨티나 사람처럼 말한다고 할 때죠. 그러니까 망명이라는 것은 어떤 억양의 문제일 따름입니다. 엔리케 빌라마타스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더군요. 얼마 전에 그 친구가 망명에 관한 좌담회에 참석했답니다. 마리오 베네데티,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 아우구스토 몬테로소가 참가한 자리였죠. 베네데티와 페리 로시는 망명을 잔인하고 소름끼치는 무엇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몬테로소는 오히려 망명이 즐겁고 행복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지요. 그러니까 멕시코에 오랫동안 망명하면서 겪은 모든 일들에 만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좌담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빌라마타스도 더 자세하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무조건적으로 몬테로소의 말에 공감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망명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보다 망명하는 편이 더 나은 것이죠.>

칠레에서 태어난 볼라뇨는 열다섯에 멕시코로, 스물넷에 유럽으로 떠나 스페인 바닷가의 작은 마을 블라네스에서 여생을 보냈는데요. 그를 두고 사람들이 <엘 칠레노(칠레인)>이라고들 불렀다고 합니다(볼라뇨가 만약 아르헨티나인이었다면 그런 별명이 생길 수 없었을 거예요. 아르헨티나 같은 경우에는 망명 작가가 너무 많아서, 이를테면, 한 사람을 두고 <아르헨티노>라 부를 수가 없거든요). 이렇듯 외국인으로서 살아온 경험이 작품 속에 자연스레 녹아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의 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외국인이라는 개념은 물리적인 것이 아닌 정서적인 것입니다. 볼라뇨의 소설 속 거의 모든 인물들은 (실제 외국인이 아닐 지라도) 특별한 의미에서의 이방인이니까요.

 

편집자 _ <변방>을 떠도는 <망명자들>. 이들이 바로 볼라뇨의 사람들이군요.

 

옮긴이 _ 또는 세대의 문제로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볼라뇨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그 시대적 배경이 1970~80년대가 대부분인데, 스페인, 중남미, 미국, 러시아 등 그 국가적 배경은 다양합니다. 그러니까 볼라뇨는 1970~80년대 각 세계의 청춘의 삶을 그려 낸 것이죠(실제로, 1953년생인 볼라뇨는 칠레의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하려는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발발했던 1973년 당시 스무 살 청춘이었다 - 편집자주). 『전화』에도 좋은 예가 있습니다. 3부에 수록된 단편 중 「앤 무어의 삶」 같은 경우, 중남미에서 혼란의 시기를 보낸 젊은이가 미국에서 혼란의 시기를 보낸 젊은이와 만난다는 내용 자체가 재미있었습니다. 이렇듯 같은 세대를 산 사람들의 청춘은 서로 닮아 있지 않을까요. 1960년대, 1970년대의 세계적 시대상을 돌아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반전 운동과 히피 문화가 미국 대륙을 휩쓸었다면 중남미는 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극도의 혼란을 겪었고, 한국 또한 그랬고요. 이렇게 그 세대만의 경험을 연결시키는 지점들이 볼라뇨 작품 곳곳에 박혀 있습니다. 한 지역에 국한해 특수하게 처리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 두 사람이 각자의 나라인 미국이나 중남미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제3의 나라인 스페인에서 마주하게 된다는 것. 「앤 무어의 삶」에는 앤의 남자 중 한 명으로 한국인도 등장하는데, 만약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을 볼라뇨가 알고 있었다면, 분명 이 단편에 녹여 내지 않았을까요…….

 

편집자 _ 그러니까 볼라뇨는 자신의 작품들로 <볼라뇨 세계>만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 알고 보니 온 세상을 독보적인 기준으로 재편성한 것이군요.

 

옮긴이 _ 여기서 다시, 아르투로 벨라노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나를 구성하는 틀을 벗어 버리면 나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나요. 단편 「앤 무어의 삶」 속 주인공 앤 무어 또한 자기 삶의 안정적인 틀을 벗어나면서 자신을 찾게 되는데요. 그런데, 『전화』 속 단편들 가운데 정작 볼라뇨의 얼터 에고인 아르투로 벨라노가 자신을 찾는 과정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주인공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방황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거리를 두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아르투로 벨라노가 아닐까요. 관찰자로서 아르투로 벨라노는, 물론 등장인물들에게 연민을 느낄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주인공들의 삶을 두고 자기 위안을 삼거나 과도하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태도가 볼라뇨 소설의 장점이고, 바로 볼라뇨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닐까 싶네요.

 

편집자 _ 지켜보는 자가 있어 의미 있는 삶. 그렇다면, 그 삶은 더 이상 변두리 인생이 아니네요.

 

옮긴이 _ 어쩌면 변두리 인생을 사는 사람만이 변두리 인생을 사는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갖는 건지도 모르지요. 다시 <망명>으로 돌아가자면 망명 또한 어쩌면 즐거운 일입니다. 망명을 자기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기회이며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삶을 후회하며 자괴감에,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 태도. 왜 볼라뇨는 칠레 쿠데타에 얽힌 이야기들을 다루면서도 한 번도 폭력적인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을까요? 위와 같은 맥락에서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언급하다 보면 감정이 엄청나게 이입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볼라뇨가 쿠데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즉, 이러한 방식이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차원에서 한국 문학에서도 광주 등 아픈 과거사를 다루는 방식을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권력에 대한 분노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트라우마에 짓눌려 지나친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볼라뇨 특유의 이러한 윤리적인 태도를 참고하면 어떨까 싶네요.

그리고…… 여담이 될 수도 있겠는데요, 볼라뇨는 작가에게 망명이 그다지 나쁜 경험이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변호사나 정치인을 생각해 보세요. 자기 나라 밖으로 나가면 물 밖의 물고기 꼴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어디에서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직업입니까. 군인? 그래도 제한적이죠. 형사? 그보다는, 살인청부업자? 아닙니다. 어디에서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창녀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작가와 창녀는 같습니다.>

 

편집자 _ 자신을 판다는 점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와 창녀는 같다!

 

옮긴이 _ 또한 볼라뇨의 인터뷰건 에세이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로 <용기>, 그러니까 <배짱>입니다. <나는 시인들의 삶을 존경한다, 그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니까, 진정한 시인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볼라뇨는 말했습니다. 『전화』 속 단편 「엔리케 마르틴」 첫머리에서도 이 시인에 관련된 내용이 나오죠.

< 시인은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고로, 인간은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거짓이다. 사실 인간이 진심으로 견뎌 낼 수 있는 일은 손꼽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진심으로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확신을 지닌 채 성장했다. 이 문단의 첫 번째 문장은 참이다. 그러나 파멸과 광기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또, 「최고의 은행 강도」라는 글에서는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 유럽에서 경호가 엄한 은행을 털어야 하고, 내가 마음대로 도둑질할 동료들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한순간의 주저 없이 5명의 시인을 선택하겠다. 왜냐하면 시인이야말로 가장 용기 있고, 배짱 있고, 대담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더라도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저지르는 은행 강도는 보나마나 실패하겠지만, 굉장히 아름다운 일이 될 거다.>


편집자 _ <배짱 있는 자가 누구냐.> 볼라뇨 에세이 제목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옮긴이 _ 아무래도 볼라뇨는 이 <배짱>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덕목이라고 생각했던 듯합니다. 그러니까 평생 시인이 되고자 했던 볼라뇨인 만큼 시인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던 거겠죠. 시인, 모든 걸 견딜 수 있는 자. 또한 볼라뇨는 작가를 두고 <영웅적인 실패자의 대열에 선, 글쓰기라는 험난한 과업과 끈질기게 싸웠으며 실패를 받아들일 줄 아는 용기를 지닌 자>라 하기도 했습니다. 『전화』 가운데 「앙리 시몽 르프랭스」라는 단편이 이러한 내용입니다. 작중 삼류 작가인 르프랭스가 끝까지 살아남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용기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볼라뇨가 편애해 마지않는 사람들, 형사며 살인청부업자들 또한 이러한 용기, <깡>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네요.

 

탐정들

 

편집자 _ 그런데 볼라뇨는 형사들, 즉 탐정들에 왜 그렇게 매료되었을까요?

 

옮긴이 _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작가가 되는 것보다는 살인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가 되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다는……. 볼라뇨는 평소 작가를 형사에 자주 비유했는데요. 작가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살인청부업자와 같다고도 했고요.

이 이야기는 조금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앞서 얘기했던 변방의 사람들과도 다시 연관되는 내용인데요. 볼라뇨 작품 가운데 작가들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볼라뇨는 이 작가라는 이들을 극단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유형이라고 여기는 듯합니다. 하드보일드 류의 인물들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전화』 속 인물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형사, 삼류작가, 시인, 포르노 배우, 군인…….

그 런데 이 극단적인 사람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사라진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대표작 『2666』을 보더라도 이제 사라지고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찾는 여정이고요. 이건 볼라뇨가 정치를 다루는 일종의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볼라뇨가 태어난 땅 칠레의 쿠데타, 『부적』에서 주요 사건으로 등장하는 멕시코 틀라텔롤코 사태, 『전화』 속 단편 「센시니」의 배경이 되는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중남미를 휩쓴 독재 정권의 여파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 버렸는데요. 이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는 것 그 자체가 행방불명된 젊은이들에 대한 어떤 손짓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가운데 볼라뇨는 그에 어울리는 추리 소설적 기법을 쓰게 된 것이고, 이렇게 사라진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여정 가운데 독자는 자연히 형사가 되고 탐정이 됩니다. 『부적』, 『먼 별』, 『전화』 모두 이러한 선상에 놓인 작품들입니다. 어쩌면 중남미야말로 하드보일드의 배경으로 너무도 적절한 공간인 것이죠.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아시아나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편집자 _ 볼라뇨식 <탐정 놀이>군요!

 

옮긴이 _ 볼라뇨의 친구 중 한 명은 볼라뇨를 <야만스러운 탐정>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냉정하고 이성적이어야 할 탐정이 야만스럽고 열정적이라니 아이러니한 표현인데요. 한마디로 막 나가는 탐정이라는 건데…… 탐정은 막 나가면 안 되는 건데 말입니다.

어쨌든 그래서 <탐정 소설 + 실종된 사람들 + 폭력>이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한 하나의 형태, 이를테면 <하드보일드 추리 본격 소설>(?) 정도가 볼라뇨 문학의 기본 형식이 아닐까, 이 정도로 정리해 봅니다…….

 

옮긴이는 아마도 지금쯤 볼라뇨가 탐정 영화를 찍고 있을 거라 했다. <볼라뇨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기가 단테의 『신곡』을 좋아하는데 이를 영화화하면 어떨까 한다고 했었거든요. 지금은 폭력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지옥의 제7환을 배경으로, 자기 작품 속 인물들을 주인공 삼아 열심히 하드보일드 영화를 찍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출처 :  http://cafe.naver.com/openbooks21/895

 

『전화』 편집자 노트 제3부

- 『전화』 속 단편들 : 『전화』를 읽은 독자들에게

 

★ 먼저 밝힙니다.

1. 이 노트에는 단편집 『전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2. 이 노트는 옮긴이와 열린책들 볼라뇨 편집자가 대담을 나눈 후, 옮긴이의 생각들을 편집자가 정리한 것입니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첫 단편집 『전화』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전화>는 5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양한 작가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역시 5편의 단편이 실린 제2부 <형사들>은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폭력의 근원,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의 양상에 대한 볼라뇨식 탐구라 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4편의 단편이 수록된 제3부 <앤 무어의 삶>은 앤 무어를 비롯한 네 여성의 삶을 뒤쫓는다.

  

옮긴이 박세형, 열린책들 볼라뇨·심농 편집자 김뉘연        


 

제1부. 전화

 

■ 센시니

바르셀로나의 야영장에서 야간 경비를 보다 잘린, 쥐 새끼보다 가난한 20대 청년이 한 문학 공모전을 통해 스페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아르헨티나 작가 루이스 안토니오 센시니와 연이 닿는다. (글쓰기가 아닌) 공모전에 정진하라는 다소 이상한 편지로 시작하는 이들의 서신 교환을 둘러싼 두 작가의 인연은 과연 어디까지 지속될까. <공모전 사나이>로 거듭나는 이 문학 청년은 센시니를 쫓고, 우리는 이 청년을 쫓는다. 실제로 쿳사 재단이 후원하는 산세바스티안 단편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

 

볼라뇨가 말하는 볼라뇨

1980년대 초 스페인과 중남미는 어떤 곳이었을까? 1983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해. 중남미 <붐boom> 세대가 인정받고 그들의 작품이 두루 공유되었던 시절. 스페인 프랑코 정권의 독재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가 도래했던 시절.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위시한 <모비다movida> 운동 등 바야흐로 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했던 시절. 그리고 중남미의 몇몇 국가에서는 아직도 독재 정권이 굳건하던 시절. 단편 「센시니」는 이런 상황에서 그 당시 스페인에 머물렀던 어느 두 중남미 작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중남미 문학이 <소설의 죽음>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었지만, 스페인으로 망명한 여러 중남미 작가들은 (요즘 말로) <듣보잡>과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이 단편에 등장하는 수많은 작가들의 이름은 이 같은 역사적 상황을 환기하는 기호들이다).

모든 종류의 문학상에 단편을 응모하며 마드리드에서 간신히 삶을 유지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원로 작가 센시니. 주인공 센시니는 실존 인물이었던 아르헨티나 소설가 안토니오 디 베네데토(1922~1986)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1983년 발렌시아 시가 주관한 알팜브라 단편 경연 대회에서 서로를 알게 된 볼라뇨와 안토니오는 이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았다. 작중 센시니가 썼다는 단편은 볼라뇨가 해당 공모전에 보낸 단편(북한과 접한 국경의 시골 마을에서 요양을 하다 자살하는 중국군 장교의 이야기이다)과 비슷한 측면이 있으며, 센시니가 작품 제목을 바꿔 가며 공모전에 응모한 에피소드 또한 볼라뇨 자신의 경험을 빗댄 것이다.

볼라뇨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이 당시 볼라뇨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혼자 살았고, 친구들도 거의 만나지 않았으며, 돈이 없어 단편 공모전에서 생계를 유지했던 시절.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그때, 무명의 젊은이 볼라뇨는 우연찮은 기회에 칠레 시인 엔리케 린과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가볍게 시작된 서신 교환은 훗날 이 편지들을 묶어 출간하자는 제안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양으로 불어났다(볼라뇨는 엔리케 린이 <생명의 은인>이었다고 되뇌며, 자신의 단편집 『살인 창녀들』에 포함된 단편 「엔리케 린과의 만남」에서 그때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그러므로 이 단편 「센시니」는 지옥과도 같았던 작가 지망생 시절 청년 볼라뇨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어쩌면 단편 가운데 드러나는 센시니 및 그 세대 작가들에 대한 평가는 볼라뇨가 자신의 글에 내리는 은근한 평가일는지도 모른다. <간결하고, 지적이며, 독자를 자기 작품의 공모자로 끌어들이는 작품>. 물론 볼라뇨가 <간결하고>, <지적인> 작가인지에 대한 견해는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독자를 공모자로 끌어들이는> 작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공모>라는 것이 행복한 일인지, 고달픈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센시니」는 실제로 쿳사 재단이 후원하는 산세바스티안 단편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현실은 허구를 완성하고, 허구는 현실을 창조한다.

★ 기억해둘 이름, 그레고르 잠자. 주인공 센시니의 아들 그레고리오 센시니는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변신」 속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이름을 따왔다. 카프카에 대한 이러한 암시는 훗날 볼라뇨의 단편집 『참을 수 없는 가우초』의 어느 단편에도 등장한다.

 

■ 앙리 시몽 르프랭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일어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실패한 작가이다. 파리의 저속한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지방 잡지에 시나 단편 나부랭이를 발표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 가는 작가라는 말씀이다. 원고를 보낼 때마다 퇴짜를 맞는 이 작가는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이후 자신의 영토(조국)가 어디인지 깨닫는다. 그가 발을 디뎌야 할 곳은 엉터리 작가들과 원한에 사무친 작가들, 곧 삼류 작가들의 땅인 것이다.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르프랭스는 단순한 운반이나 소규모 테러 등을 감행하며 글쟁이들을 돕지만, 이상하게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정의할 수도 없는 거부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르프랭스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삼류 작가라는 것을 끝내 인정한다. 동시에 일류 작가들도 삼류 작가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 용기 있는 자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실패한 작가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실패한 작가의 삶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앙리 시몽 르프랭스는 실패에 이골이 난 미혼의 중년 남자다. 삼류 작가인 그가 끝까지 살아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볼라뇨의 또 다른 작품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 용기 있는 작가들의 <나쁜 예>들을 모아 놓았다면, 앙리 시몽 르프랭스는 용기 있는 작가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그렇다. 답은 <용기>다.

용기 있는 시인 르프랭스는 자신을 인정하고 할 일을 해낸 끝에 결국 몇 가지 권리를 쟁취해 낸다. 볼라뇨는 이 소설이 하나의 도덕적 우화라고 이야기한다(혹은 시인의 윤리에 대한 우화로 볼 수도 있겠다. 『칠레의 밤』 주인공, 이바카체 신부를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 르프랭스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삼류 작가라는 것을 끝내 인정한다. 그렇지만 일류 작가들도 삼류 작가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변변찮은 작가들은 그저 독자나 시동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말이다. 르프랭스는 훌륭한 작가들의 목숨을 구해 내면서(아니면 그저 도와주면서) 스스로 몇 가지 권리를 쟁취했음을 알게 된다. 글귀를 끼적거릴 수 있는 권리, 실수할 수 있는 권리, 문예지 두세 곳에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권리.>

용기 있는 자의 삶은 이렇게 흘러간다.

★ 앙리 시몽 르프랭스에게 한 젊은 여성 작가가 말한다. <당신의 얼굴이며 말하는 방식과 눈길에 많은 사람들의 거부감을 자아내는 무언가가 있어요. (……) 당신은 모습을 감추고 수수께끼 같은 작가가 되어야 해요. 작품에 당신의 얼굴이 배어나지 않게 하려면요.> 감추는 것. 어쩌면 이것이, 볼라뇨 작품 전체를 읽는 하나의 알레고리일지 모른다.

 

■ 엔리케 마르틴

엔리케 마르틴은 1953년생으로 카스티야어와 카탈루냐어로 시를 쓴 시인이다. 전력투구로 모든 의지와 노력을 쏟아 부으며 간절하게 시인이 되기를 열망했던 남자다. 고집스러운 집념, 까짓 거 다 덤비라는 기세로 친구에게 암호문을 작성해 보내곤 하던 그는 벽을 가득 채운 숫자들, 해독 불가능한 수식, 이어 다음의 한 마디를 남긴 채 자살한다. <아는 자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소포 하나. 소포 안에는 2절지 크기의 종이 50장이 들어 있었다. 모두 손으로 직접 쓴 시 뭉텅이였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또 다른 용기 있는 자

<시인은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볼 라뇨는 시인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로 단편 「엔리케 마르틴」의 문을 연다. 이는 (앞선 단편 「앙리 시몽 르프랭스」에 이어) 다시 <용기>에 대한 이야기다. 무슨 일이든 참아내는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를 쓰는 이들. 볼라뇨에게 시인이란 그런 사람이다.

이 단편은 볼라뇨가 자신의 친구였던 스페인 작가 엔리케 빌라마타스(1948~ )에게 바치는 작품이다. 등장인물인 시인 엔리케 마르틴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이 내용과 엔리케 빌라마타스와의 연결고리가 흥미롭다. 볼라뇨는 친구 빌라마타스가 쓴 소설 중 자살에 관한 단편을 모은 『모범적인 자살들Suicidios ejemplares』을 단편 작가 지망생의 필독서로 꼽은 바 있기 때문이다(이 단편집 가운데 특히, 평생 동안 숨겨 오던 자신의 작품을 출판사의 손에 맡기고 사라지는 작가를 다룬 단편 「사라짐의 예술」과 함께 읽을 수 있다).

엔리케 마르틴은 그렇다면 무엇을 견뎌 낸 건가? 침실 벽 한가득 크고 작은 숫자들을 적어 놓고, 들보에 대롱대롱 매달린 시인. 이 시인은 화자인 동갑내기 친구, <나>에게 무언가를 남기고 떠났다.

<몇 달 뒤에 나는 집을 떠나게 되었다. 암캐는 함께 데려갈 예정이었고, 고양이들은 이웃집에 입양시킨 터였다. 떠나기 전날 밤에 엔리케가 맡긴 소포를 열어 보았다. 수식이나 약도, 또는 그의 죽음을 설명해 줄 만한 표시가 있으리라 기대했다. 소포 안에는 깔끔하게 제본한 2절지 크기의 종이 50장이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지도나 암호문 따위는 없었다. 모두 손으로 직접 쓴 것으로 미겔 에르난데스나 레온 펠리페, 블라스 데 오테로나 가브리엘 셀라야를 모방한 시들뿐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내가 도망칠 차례였다.>

평생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시인은 끝까지 숨어서 무언가를 썼다. 그런데 어떻게든 숨어서 쓴 시가 자기 것도 아닌 남의 시였다는 사실……. 작가라는 이들의 운명을 생각한다면, 작가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이제는 내가 도망칠 차례였다>는 화자의 말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 볼라뇨가 세상을 뜬 후 그의 컴퓨터에서 한 편의 시가 발견되었다. 엔리케 빌라마타스에게 바치는 시였다. <우리의 말들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역시 빌라마타스에게 헌정된 이 소설과 그 끝이 닮았다. 그나저나 친구에게 자살한 이야기를 바치다니. 볼라뇨와 빌라마타스는 세상 누구보다 절친했거나, 혹은 원수였으리라.

  

■ 문학적 모험

작가 B는 알아볼 수 없게 가면을 덧씌워서 작가들을 조롱하는 책을 쓴다. A와 같은 특정한 유형의 작가들을 조롱하는 단편집이다. 그는 어떤 단편에서 동갑내기 작가 A와 엇비슷한 인물을 그려낸다. 무엇보다 명성을 얻었고, 다음으로 돈까지 쥐었고, 심지어 독자층도 두터운 작가 말이다. 명성이나 돈과는 거리가 멀고 삼류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는 B와 천양지차인, 성인군자인 양 점잔을 빼는 A의 글을 그악스런 독자인 B는 도저히 참아 줄 수 없다. B는 단편 중 하나에서 A를 이름을 바꿔 조롱하는데, A는 신문에 이 작품을 열렬히 칭찬하는 글을 발표하고, B의 책은 소리 없는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다. B는 A를 만나러 간다.

 

거울 앞에 서다

볼라뇨는 『아메리카의 나치문학』 등의 출간과 함께 제도에 진입한다. 그리고 로물로 가예고스 상을 수상한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성공한 작가의 반열에 올라선다. 제도에 저항하며 혁명을 꿈꿨던 젊은 시절 친구들의 눈에는 아마 고깝게 보였을 것이다. 볼라뇨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어떤 식으로 변명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제도 안에 진입한 작가가 계속 제도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단편 「문학적 모험」의 B는 기성 문단에서 성공한 작가 A를 조롱하는 글을 쓴다. 하지만 B는 A의 열렬한 지지를 등에 업고 문단에 안전하게 진입한다. 결국 B가 A를 만나기에 이르는 과정은, B가 제도권에 진입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제도를 둘러 싼 거부감과 이끌림은 A라는 인물을 대하는 B의 심리 변화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A(아르투로)와 B(벨라노)가 만난다면? 작품은 제도의 문턱에 이르는 아르투로 벨라노의 모습을 묘사하며 끝을 맺는다. 이후에 아르투로 벨라노가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글쎄, 로베르토 볼라뇨에게 물어볼 일이다. (* 아르투로 벨라노 : 로베르토 볼라뇨의 얼터 에고. 『전화』 속 여러 단편을 비롯해 볼라뇨의 여러 작품에 등장한다.)

이 단편을 볼라뇨의 자기 풍자로 읽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앞선 단편 「센시니」와 비교해 본다면? 자신이 쓴 단편의 제목을 바꿔 가며 여러 공모전에 두루 응모해 받은 상금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작가 센시니의 방식은 제도에 대한 완벽한 조롱이자, 작가 A로 대표되는 성공한 작가들을 조롱하는 글을 쓰는 작가 B의 방식보다 현명해 보인다. 작가 B는 그 자신 또한 제도 안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면서도 제도에 완전히 포섭되지는 않으려 하는, 일종의 미꾸라지와도 같은 존재다. 그 가운데 자신을 정당화하는 태도에 대한 풍자, 이것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볼라뇨의 시선일 것이다.

A를 만나기까지 한없이 증폭되던 B의 심리적 공포와 더불어 긴장감 가득히 진행되던 이야기는 문득 허무하게 멈춰 버린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던 분위기가, 너무도 빤한 결말로 치닫는다. 사실 이렇게 <정지된 상태>로 결말을 짓는 방식은 볼라뇨 단편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볼라뇨식 얼음땡 놀이라고나 할까.

★ B가 공포를 느끼는 대상은 과연 무엇일까? 이 단편은 작가 B가 제도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제 막 제도권 안에 발을 들인 작가 B가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작가 A를 조롱한 사실이 알려지면 입장 곤란해 질 수 있다. 이제 막 꽃을 피우려는 문학적인 커리어가 졸지에 막을 내릴 수도 있다는 공포감, 혹시 이 공포가 전이되어 A라는 사람에 대한 막연한 공포로 둔갑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문제다.


■ 전화

B는 X를 사랑한다. 물론 불행한 사랑이다. X는 B에게 전화로 이별을 통보하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다. 어느 날 밤 B는 두 통의 전화를 거쳐 X와 통화하는 데 성공한다. 스페인 땅의 끝과 끝. B는 X의 도시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그리고 도착해서 사랑을 나누고, 돌보고, 떠나 달라고 요구받고, 떠나고, 다시 전화한다. 그리고 B가 앞으로 다시는 전화하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즈음, 어느 날 누군가 B의 집 문을 두드린다. 사흘 전에 스페인 땅 한쪽 끝에서 누군가 X를 살해했다고 한다. B는 다시 X의 도시로 향한다. X의 오빠를 만나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오고, 일주일 뒤 범인을 알리는 전화를 받는다. B는 덩그러니 홀로 남는다.

 

얼굴을 보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이 행위의 전제는? 현재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편집 『전화』와 같은 제목의 단편 「전화」 속 주인공들 또한 마찬가지다. 옛 연인이었던 B와 X는 전화를 통해 이별하고, 전화를 통해 다시 만난다. 그리고 다시 헤어진다.

X와 다시 헤어진 B는 X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지만, 끝내 X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흔해 빠진 이야기다. 애처롭기는 하지만 빤한 이야기다.> X의 얼굴을 보지 못한 B가 대신 본 얼굴은 살인자의 얼굴이다. B는 꿈속에서, X를 살해한 이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거울을 바라본다. 혹시, B가 살인자인 건가?

「전 화」는 모종의 살인 사건을 전개해 가는 가운데 읽는 이의 긴장감을 쥐락펴락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심리 소설 성격을 띤다. 볼라뇨가 독자의 심리를 가지고 논다고 할 수 있겠다.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사랑 이야기가 흘러가는 가운데 B의 이상한 꿈 이야기, X의 묘한 태도 등이 불쑥 튀어나와 그 흐름을 어긋나게 한다. 빤한 사랑 이야기를 빤하지 않게 만드는 방식. 단편 「전화」는, 단편집 『전화』와 닮았다.

★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 못해 전화를 거는 이들. 그들이 보게 되는 얼굴은 결국 자기 자신의 얼굴이다. 거울 앞에 선 자들이 여기 있다.

 

제2부. 형사들

 

■ 굼벵이 아저씨

크리스탈 서점과 소타노 서점을 오가며 책을 훔치고, 오전 10시면 시내 영화관에서 조조 영화를 보곤 하던 내 이름은 아르투로 벨라노이다. 나는 아침이면 크리스탈 서점에 처박혀 책을 되작이다가 알라메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는 아저씨를 보았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나무 틈에 앉아 조용히 허공을 응시하는 아저씨의 모습은 하얀 굼벵이 같았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눈을 계속 뜬 채 담배만 뻐금뻐금 빨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서점 근처 공원 안쪽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볼라뇨가 실제로 멕시코시티에 살 때 자주 들렀던 서점들, 그리고 단편의 화자처럼 손버릇이 나빴던 청년 볼라뇨를 둘러싼 추억.

 

어느 <책 도둑>의 기억

볼라뇨가 쓴 동명의 시와 비슷한 내용으로 구성된 이 단편은 볼라뇨가 작품 가운데 내내 집착했던 공간, 멕시코 북부의 자그마한 마을 비야비시오사를 배경에 깔고 있다[볼라뇨는 (<굼벵이 아저씨>와 같은) 살인자들만 있는 마을, 비야비시오사의 연대기를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볼라뇨의 초기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2666>의 배경으로도 등장하는 이 멕시코 북부는 멕시코와 미국과의 경계에 자리한 지역으로, 살인 사건과 마약 밀매 등 온갖 범죄의 온상인, 중남미에서 가장 하드보일드한 공간. 20세기의 폭력과 악에 주목했던 작가 볼라뇨가 당연히 관심을 가졌을 법하다(신자유주의로 인해 몰락한 멕시코를 지켜보며, 이 나라를 현대적인 악의 공간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겠다). 우리 또한, 앞으로 출간될 볼라뇨의 작품 가운데 이 멕시코 북부가 어떻게 묘사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이 단편 역시 「센시니」와 같이 볼라뇨의 자전적 경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여기서의 볼라뇨는 좀 더 젊다. 멕시코시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볼라뇨는, 단편 속 화자처럼 손버릇이 나빴다. 볼라뇨는 그의 에세이집 『괄호 치고』에서 책을 훔치는 건 도둑질이 아니라고, 젊었을 때 누구나 다 해봐야 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자기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책을 둔 서점 직원 때문에 자신의 교양에 문제가 생겼다는 그의 말에 도리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본문에서처럼 실제로 멕시코시티의 동명 서점 2곳을 번갈아 들락거렸던 볼라뇨는 주로 크리스탈 서점에서 책을 훔치곤 했는데, 어느 날 소타노 서점에서 훔치다 걸린 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한편 칠레에서는 책값이 싸서 그냥 샀다고 한다).

이 단편과는 크게 상관없지만 서점과 얽힌 의미심장한 에피소드 하나. 칠레의 쿠데타 직후, 젊은 볼라뇨가 조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서점에 들러 오래된 프랑스 소설들을 되작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서점 주인이 <어떤 작가가 사형수에게 자신의 책을 읽으라고 권할 수 있겠는가> 하고 볼라뇨에게 묻는다. <사형수의 무릎 위에 한 권의 소설을 올려놓을 배짱 있는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괄호 치고』 속 에세이, 「배짱 있는 자가 누구냐」 중에서). 공 포가 만연한 시대적 상황 가운데 과연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폭력 앞에서 작가들은 과연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청년 볼라뇨는 서점 주인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서둘러 책방을 빠져 나온다. 어쩌면 『칠레의 밤』을 비롯한 볼라뇨의 몇몇 작품들은 이 서점 주인의 질문에 대한 뒤늦은 답변일지도 모른다.

★ 당시 청년 볼라뇨를 뒤흔든 소설, 알베르 카뮈의 『전락』 또한 작중 그대로 인용된다. 볼라뇨 애독자를 자청하는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칠레의 밤』과 함께 읽기에 좋은 소설이라고 한다.

 

■ 눈

나는 5년 전에 바르셀로나 타예르스 거리의 술집에서 그 친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친구도 이역만리 땅 칠레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깡마른데다 키는 똥자루만 하고 피부는 가무잡잡한 사내, 로헬리오 에스트라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칠레 공산당의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을 아버지로 둔 그는 1974년 정초에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에 도착. 체육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체육 교사가 됨. 로저 스트라다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사고를 치고 다닌 그는 어떤 운동선수 코치의 조수로 일하며 뒷돈으로 월급을 불렸다. 스포츠 도박, 마약과 매춘 알선에 몸담고 암시장과 유흥업소를 오가던 그는 모스크바 갱들과 어울리다가 보스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 보스를 죽인다. 우여곡절 끝에 바르셀로나로 건너와 사립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근무하게 된 그는 다시 창녀들과 몸을 섞고 술집을 드나든다. 그리고 밤이 되면, 러시아와 모스크바를 그리워한다.

 

시대의 초상

『전화』 3부에 수록된 단편 「앤 무어의 삶」에서 세계 각 지역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군상들을 그렸듯이, 볼라뇨는 이 단편 「눈」에서도 그 당시의 (칠레가 아닌 다른 나라) 러시아를, 스탈린 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주의의 물결이 도래하면서 마피아들이 사회를 장악하기 시작했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 칠레 쿠데타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유랑 생활을 시작한, 외국인이자 이방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볼라뇨의 그림자가 구석마다 어른거린다. 더불어 이제 칠레를 넘어서 동시대의 다른 세상으로 눈을 돌리는, 점차 그 반경이 넓어져 가는 볼라뇨 소설의 궤적 또한 엿볼 수 있다. 칠레인인 주인공이 (같은 언어권인 스페인이 아닌) 러시아에 망명해 살다가, 이어 (스페인어를 쓰는) 바르셀로나로 건너가, 칠레가 아닌 러시아를 그리워하는 생경한 감수성이 의외의 재미를 안긴다. 화자와 주인공이 5년 전 처음 만났다는 바르셀로나 타예르스 거리는 볼라뇨가 실제로 자주 갔던 곳이라고 한다.

★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화자는 뜬금없이 러시아 장군 추이코프의 이름을 언급한다. 볼라뇨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가장 큰 사치는 <책상용 전쟁 게임 대컬렉션과 컴퓨터용 전쟁 게임 소컬렉션>이라고 밝힐 정도로 전쟁,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볼라뇨의 이러한 관심은 이 두 단편뿐 아니라 장편소설 『먼 별』과 『제3제국』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 또 다른 러시아 이야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전선에서 싸웠던 청색 사단 소속의 병사 이야기. 세비야 출신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러시아 땅까지 이르게 된 그는 자신을 일컫는 <코르체(신병)>이라는 단어를 <찬트레(성가대 지휘자)>라는 단어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정말로 성가대 지휘자가 된다. 이어 부상을 당해 군 병원에 입원했다가 엉뚱한 기차표를 지급받고 나치 친위대 파병 대대에 도착한 그는 러시아 병사들의 습격을 받는다. 그런데 고문 중에 그가 내뱉은 <코뇨(씨발)>이라는 단어가 <쿤스트(예술)>로 둔갑해 그들 귀에 들어가고, 병사는 살아남는다.

 

볼라뇨식 블랙 유머

푸른색 윗도리의 제복을 입어 <청색 사단>이라 불렸던 스페인 부대가 독일 군복으로 갈아입고 히틀러를 돕는다면, 이제 이 부대는 무슨 사단이라 불려야 할까? 어쨌든 청색 사단 소속의 한 신병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전선에서 겪었던 우여곡절을 다룬 이 이야기는 14편의 단편 중 그 분량이 가장 짧다. 그리고, 볼라뇨는 이 짤막한 이야기 가운데 그만의 위트를 절묘하게 녹여낸다. <코르체corche(신병)>이라 불리던 사내가 <시간의 흐름과 일상적인 공포가 작용해> 이 단어를 <찬트레chantre(성가대 지휘자)>라 받아들이고, 종내 성가대 지휘자가 되는 이야기. 고문을 받던 중 스페인어로 <코뇨coño(씨발)>라고 외친 그의 절규가 <입에 물린 집게 때문에> 대기 중으로 나오면서 독일어 <쿤스트Kunst(예술)>로 둔갑한 이야기. 그러므로 이 단편은 볼라뇨식 블랙 유머의 정수를 넘어선, 예술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일 수도 있겠다.

결국, 이 신병은 살아남았다.

★ 러시아 병사들은 이 신병을 고문하면서 집게로 혀를 잡아당기고 짓이겨 댄다. 그런데 사실 그 집게는 독일인들이 신체의 다른 부분을 고문할 때 사용하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신체의 다른 부분>은 어디일까? 정답을 맞힌 분들은 발톱을 깎아드립니다.



■ 윌리엄 번즈

캘리포니아 주 벤투라 출신의 윌리엄 번즈가 소노라 주 산타테레사의 경찰 판초 몬헤에게, 몬헤가 다시 화자에게 들려준 이야기. 인생의 암울했던 시기에 윌리엄 번즈는 두 명의 여자를 따라나선다. 또래의 나이 지긋한 여자, 그리고 새파랗게 젊은 여자. 윌리엄 번즈는 산동네 변두리로 휴가를 떠나는 그녀들을 한 살인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길을 따라나선다. 그녀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를 피해 다니고, 이 남자로부터 그녀들을 지키겠다고 나선 윌리엄 번즈는 우여곡절 끝에 살인자가 되고, 결국 여섯 달 뒤 신원 불명의 사람들에게 살해당한다.

 

얼굴 없는 공포

한 명의 화자, 두 명의 여자, 세 마리의 개,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자. 단편 「윌리엄 번즈」는 심리적 공포에 대한 아주 멋진 탐구라 할 만하다. 「윌리엄 번즈」에 드리워진 공포에는 실체가 없다. 여자들 스스로 설정한 살인자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이 화자인 윌리엄 번즈에게 전이되고, 이 실체 없는 공포심에 전염된 윌리엄 번즈는 결국 살인자의 자리에 선다. 하지만 등장인물 모두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진짜 살인자는 누구인가? <얼굴 없는 공포>라는 주제는 볼라뇨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미 『먼 별』을 읽은 독자들은 카를로스 비더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 주인공 윌리엄 번즈와 두 여자가 머무는 집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 <그렇게 수많은 창문이 달려 있는 집은 평생 처음 보았어요. 제각각 크기가 다른 창문들이 제멋대로 자리 잡고 있었죠. 밖에서 보면 창문의 개수로 미루어 삼층집이 아닌가 생각하기 십상이었어요. 실제로는 이층집이었죠. 집 안에 들어서서 창문을 바라보면 어지럽고 흥분이 일면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거실 쪽과 1층의 침실에서 바라볼 때 특히나 그런 느낌이 강했죠. 여자들이 제가 묵을 방으로 정해 준 곳에는 창문이 두 개밖에 없었어요. 위아래로 그다지 크지 않은 창문 둘이 자리 잡고 있었죠. 위쪽 것은 천장에 닿을 만한 높이에, 아래쪽 것은 지상에서 두 뼘도 되지 않는 높이에 나 있었어요.> 이것은 실제 존재하는 공간에 대한 묘사일까? 혹은 화자의 머릿속을 그대로 옮겨 놓은 공간일까?

 

■ 형사들

칠레 형사 두 명이 나누는 대화 형식의 단편. 선호하는 무기 이야기부터 시작해 그들 손을 거쳐 간 여러 범죄자들 이야기, 그리고 1973년 <그날>에 그들이 <이 나라의 진정한 남자들>을 죽인 이야기에 이어 열다섯에 멕시코로 건너갔다가 스무 살 때 칠레로 돌아온, 볼라뇨를 모델로 한 인물인 고등학교 동창 아르투로 벨라노를 만났던 이야기까지 주절주절 늘어놓는 두 형사의 잡담.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도 한 줌의 희망은 있다.> <희망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지.> <희망만이라도 소중히 지켜 내야지.>

 

조용한 칠레인

두 명의 형사가 나누는 대화로만 구성된 단편 「형사들」에는 스무 살 볼라뇨가 조국 칠레에 돌아갔다가 쿠데타 중 콘셉시온 근처에서 (그의 멕시코 억양이 경찰의 관심을 끄는 바람에 어이없이) 체포되어 투옥되었던, 그리고 마침 어릴 적 친구였던 간수의 도움으로 8일 만에 석방되었던 극적인 사건이 녹아 있다. 두 형사의 대화 중반부터 주요 내용으로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 이름은 아르투로 벨라노. 볼라뇨의 얼터 에고이다. 당시 볼라뇨는 실제로 8일 동안 구치소에서 지내다가 학창시절 친구였던 그를 알아본 두 간수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는데, 이 두 간수가 바로 두 형사들이다.

「형사들」의 두 형사는 칠레 사람들을 두고 <조용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볼라뇨의 장편소설 『칠레의 밤』에서, 화자 이바카체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나는 평생 그리 말했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질 도덕적 의무가 있으니까. 심지어 자기 침묵, 그래 그 침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침묵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에게 들리고, 오직 그분만이 침묵을 이해하시고 판단하시니까. 그러니 침묵에도 아주 주의해야 한다.> 이렇게 볼라뇨는 암울한 정치적 상황 앞에 그저 묵묵히 서 있는 칠레인들에게, 그 <침묵>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라고 일갈한다. 또한 볼라뇨가 바라보는 <침묵의 나라> 칠레는, <남자다운 사람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앞의 단편 「굼벵이 아저씨」 관련 내용에서 언급됐던) 볼라뇨의 에세이 제목이자 서점 주인의 질문이 떠오른다. <배짱 있는 자가 누구냐?>

볼라뇨는 당시의 끔찍했던 시대 상황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그 당시를 살아냈던 사람들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편을 즐긴다. 사건 자체보다는 그 사건에서 비롯되는 사람들의 경험을 주목하는 것이다. 이 단편에서 아르투로 벨라노는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끔찍한 공포를 겪고 난 후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기는 벨라노도, 콘트레라스도, 아란시비아도, 칠레인들도, 어쩌면 우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렇게 변명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잖아!>

 

제3부. 앤 무어의 삶

 

■ 감방 동지

우리는 같은 해 같은 달에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서로 다른 감옥에 있었다. 1950년에 빌바오에서 태어난 소피아는 갈색 피부에 키가 작달막하고 매우 아름다운 여자였다. 1973년 11월에 내가 칠레에서 체포되었을 때, 소피아는 아라곤의 감옥에 수감된 상태였다. 당시에 소피아는 사라고사 대학에서 생물학인가 화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몇 명을 제하고 동기생 전부가 감옥에 가게 되었다. 이 두 잠자리 친구, 그리고 그녀의 또 다른 잠자리 친구인 공산당 친구, 전남편 에밀리오와 그의 애인 누리아를 둘러싼 이야기. 어느 날, 소피아는 작별 쪽지를 남긴 채 훌쩍 떠난다. 그리고 그녀가 새 애인과 함께 에밀리오를 죽이려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나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소피아를 만나러 간다.

 

감방은 우리의 방

세계 각 지역에서 삶을 살아가는 동세대에 대한 볼라뇨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단편. <감옥>이 세대적 동질성을 대변하는 단어였던 시절, 나와 소피아는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감옥에 갇혔던) 감방 동지, 그리고 잠자리 친구다. 이 남다른 관계의 흐름을 그린 이야기는 독특한 구성 방식으로 눈길을 끈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붉은색 벽으로 둘러싸인 천장이 드높은 방, 퓌레 포대를 쌓아두고 물에 덩어리를 개어 끼니를 때우고 온갖 약을 섭렵했던 소피아, 소피아의 또 다른 잠자리 친구였던 20대 공산당 당원, 어느 날 불쑥 소피아를 찾아온 옛 남편 에밀리오와 그의 애인 누리아, 소피아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공산당원 후안, 그리고 유령처럼 헤매다 어느 날 작별을 알리는 쪽지를 두고 사라진 소피아. 이렇게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문득 이상한 행동을 일삼는 소피아의 뒤를 쫓던 나는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소피아를 보게 된다. 그리고 내가 소피아의 집을 찾아가는 순간, 이야기는 실로 기이한 방향으로 전환한다. 그리고 잔뜩 긴장된 분위기가 고조되던 이야기의 후반부는, 소피아의 <순간적이었지만 완벽한> 미소와 더불어 급격히 일상으로 돌아온다(1부의 마지막 단편 「문학적 모험」과 유사한 구조이다). 독자를 가지고 노는 볼라뇨의 능수능란함이 무서울 정도인가? <그러고 나서 우리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 피자 가게에서 저녁을 먹었다.> 빤하다면 빤한 마무리가 오히려 두려움을 자아낸다.

★ 애인의 행방을 묻는 내게 소피아는 미소로 답한다. <떠났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런데 방 하나가 자물쇠로 닫혀 있다. 혹시 소피아는 여성판 <푸른 수염>인 것일까?

 

■ 클라라

클라라는 풍만한 가슴에 다리가 가느다란 푸른 눈의 여자였다. 나는 미친 듯이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스페인 남부 도시로 돌아가자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당시 클라라는 열여덟이었고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에 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하며 은퇴한 풍경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는 중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미인 대회에 참가한다는 편지가 왔다. 나는 2등으로 입상한 클라라를 만나러 갔지만 결국 클라라는 시집을 간다. 그리고 1년인가 2년 후에 이혼을 하고, 다른 남자와 동거했다 바람을 피워 헤어지고, 그 사이사이 우울증에 시달린다. 그리고 이혼남 파코를 만나 재혼해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암에 걸린 클라라는, 어느 날 돌연 사라진다.

 

이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이다.

★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볼라뇨의 남성 화자들. 그들의 모습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 조안나 실베스트리

서른일곱 살의 포르노 배우, 조안나 실베스트리가 지금 님므의 레트라페즈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침대 맡을 지키는 어떤 칠레 형사의 이야기를 듣는 참이다. 이 남자는 누구를 찾는 것일까? 조안나 실베스트리는 1990년 즈음 자신이 인생의 정점을 달렸던 기억을 되짚어 본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를 촬영했던 기억. 그 기억 가운데 캘리포니아 최고의 포르노 스타였던, 그러나 지금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잭 홈스가 있다. 이제 조안나는 병든 잭을 만나러 간다. 볼라뇨의 장편소설 『먼 별』의 한 부분을 확장한 작품.

 

우리 모두는 유령이다

볼라뇨의 장편소설 『먼 별』의 8장 속 에피소드와 짝을 이루는 이 단편의 화자 조안나 실베스트리는 서른일곱 먹은 포르노 배우다. 조안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 한 칠레 형사에게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독백조로 읊어 댄다. 남성 화자를 통해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세 편의 단편과 다르게, 이 단편은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 집에는 시계가 없어>라는 잭의 말처럼 조안나 실베스트리의 이야기는 과거의 LA와 현재의 님므를 하나로 엮어 낸다. 하지만 우리의 포르노 배우가 독자들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다른 어느 단편보다도 더 애틋한 사랑 이야기이다. 조안나가 그려 내는 잭 홈스의 모습은 포르노 배우라기보다 은둔자나 성자에 가깝다. 볼라뇨가 주변인의 삶에 바치는 경의의 표시일까?

조안나가 다른 포르노 배우들과 벌이는 행각들을 지켜보는 잭 홈스의 모습은 『먼 별』에서 카메라 뒤에서 영화를 촬영했던 R. P. 잉글리시의 모습과 일견 겹쳐 보이기도 한다. 현장에 실제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이 모두를 바라보고 지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잭 홈스의 모델이었던 실존인물 존 홈스는 배우로 활약하면서 형사 역할을 맡아 유명세를 얻은 바 있다. 병원으로 조안나를 찾아온 형사 로메로의 모습과도 겹치는 부분이다.

어쩌면 수수께끼의 답은 이미 나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안나는,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자신은 유령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말미에 고백한다. <우리는 모두 유령이에요. 너무 빨리 유령 영화 속으로 들어와 버렸죠.> 조안나의 지극히 유용한 충고. 유령을 쫓는 자 또한 유령이 되고야 말 것이다.

★ 볼라뇨는 포르노 영화배우와 포르노 산업의 이면에 관심이 많았다. 독자들은 앞으로 출간될 볼라뇨의 단편집 『살인 창녀들』에서 또 다시 이 주제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형사 로메로 씨는 볼라뇨의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공포(악)는 필연인가 우연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 앤 무어의 삶

앤 무어라는 한 여성의 일기와도 같은 이야기. 1948년 시카고에서 태어나고 3년 뒤 몬타나 주로 이사해 그곳에서 성장한 앤은 언니 수전의 남자 친구가 부모님을 살해한 사건과 얽힌, 평탄하면서도 기묘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열일곱 때 학업을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앤은 화가인 폴을 만나 동거하다 멕시코로 여행을 떠나고, 루벤이라는 한 남자와 친하게 지내게 되고, 결국 앤은 루벤과 함께 머문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찰스라는 흑인과 사귀고, 금세 헤어진다. 그리고 한국인 토니를 만난다. 토니와는 결혼까지 했지만 또다시 헤어지고, 토니는 자살한다. 그 소식을 들은 다음 날 아침 앤은 멕시코시티로 향한다. 너무 많은 남자를 만나고 너무 많은 직업을 전전했던 앤은 불현듯 스페인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앤을 만난다.

 

여자의 일생

『전화』 제3부를 아우르는 타이틀과 동명인 단편 「앤 무어의 삶」. 이 단편의 스케일은 한 편의 장편소설을 방불케 한다. 볼라뇨는 장편에 마땅한 소재를 단편에 담아내는 실험을 택했다. 볼라뇨의 장편소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속 단편 「라미레스 호프만」과 유사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단편은 앞선 단편들에 이어 세계 각 지역의 동세대 사람들을 향한 볼라뇨의 관심이 드러나는 또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다. 1960~70년대 미국과 중남미 지역 젊은이들의 삶이, 앤 무어의 삶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더불어 비트 세대에 대한 향수 또한 간간이 어른거린다. 물론 지나치듯이 언급되는 미국 여성 작가들의 이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볼라뇨가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배운 스승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 앤이 사귀었던 남자로 한국인 토니가 등장한다. 토니는 포르노를 즐겼고, 일벌레였고, 논쟁을 피했다. 볼라뇨가 한국 남자를 만난 적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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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6.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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