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 Bolaño!

SEARCH RESAULT : 글 검색 결과 - Entre paréntesis (총 35개)

POST : Entre paréntesis

서문: 자기소개

 

  내가 태어난 해는 1953년이다. 스탈린과 딜런 토마스가 죽은 해이기도 하다. 1973년엔 정치범들을 잡아둔 체육관에서 8일 동안 억류되었다. 내 조국에서 쿠테타를 일으킨 군부 세력에 의해서였다. 그곳에서 웨일즈에 있는 딜런 토마스의 집 사진이 수록된 영국 잡지를 발견했다. 나는 딜런 토마스가 가난하게 죽었으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집은 화려해 보였다. 숲 속에 있는 마법의 집처럼 보였다. 스탈린에 대한 기사는 찾을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스탈린과 딜런 토마스가 나오는 꿈을 꿨는데 둘 다 시우닷 데 메히코에 있는 바에 있었다. 그들은 팔씨름 용으로 만들어둔 작고 둥근 테이블에 앉아 있었지만 팔씨름은 하지 않은 채 누가 술을 더 많이 마시는지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웨일즈의 시인은 위스키를, 소비에트의 독재자는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다. 그렇지만 꿈이 전개되는 중에, 점점 더 불쾌히지고 점점 더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이것이 내 출생에 관한 이야기다. 내 책들에 관해서라면, 다섯 권의 시집과 한 권의 단편집, 일곱 권의 소설을 펴냈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나의 시를 읽어본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 그 편이 나을 것이다. 나의 산문 책들은 충실한 독자가 일부 있다. 어쩌면 분에 넘치는 일인지도 모른다. <모리슨의 제자가 조이스의 광신자에게 하는 충고>(1984, 안토니오 가르시아 포르타와 공동 작업)에선 폭력에 대해 말한다. <아이스 링크>(1993)에선 아름다움 - 지속되는 일도 거의 없고, 결국엔 재앙으로 끝난다 - 에 대해서 말한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에선 문학 행위의 숭고함과 비참함에 대해 말한다. <먼 별>(1996)에선 절대 악을 향해 신중하게 접근하려고 한다. <야만스러운 탐정들>(1998)에선 모험 - 항상 예상이 빗나간다 - 에 대해 말한다. <부적>(1999)에선 그리스인의 기질을 지닌 우루과이 여성의 정열적인 목소리를 독자에게 전하려고 한다. 세 번째 소설인 <므시외 팽>은 건너뛰겠다.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비록 20년 이상 유럽에서 살고 있지만 내 유일한 국적은 칠레이고, 이런 점은 내가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를 가슴 깊이 느끼는 데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세 개의 국가에서 살았다. 칠레, 멕시코, 그리고 스페인. 나는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을 해보았다. 조금이라도 명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거부할 세네 가지 일만 빼고 말이다. 나의 아내는 카롤리나 로페즈이고 아들은 라우타로 볼라뇨이다. (* 이 텍스트가 편집부에 넘어온 뒤, 2001년 3월에, 그들의 둘째 딸 알렉산드라 볼라뇨가 태어났다.) 둘 다 카탈루냐 출신이다. 카탈루냐에서 나는 어려운 예술의 관대함에 대해 배웠다. 나는 쓰는 것보다 읽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9-20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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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31.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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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사다리가 쓰인 페이지 (Hojas Escritas en la Escalera de Jacob)


나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을 사들이는 걸 좋아한다. 이미 읽었지만 현재 서가에 없는 책들 중에서 말이다. 알퐁스 도데나 빅토르 위고도 마찬가지다. 가끔씩 나는 자문한다. 이 책들로 무얼 했는지, 책들을 어떻게 잃어버렸고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다른 질문을 할 때도 있다. 이미 읽은 책인데 왜 소장하고 싶어 할까. 읽는 것이야말로 책들을 영원히 소유하는 방법인데 말이다. 그럴싸한 유일한 대답은 내 아이들을 위해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기만적인 답이라는 것을 안다. 사람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책을 찾아서 집을 나서야 한다.


 여전히 <죄와 벌> 옛날 판본이 생각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토르 출판사에서 나온 두 권짜리 책이었다. 펄프 픽션의 본보기와도 같은 책이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저렴한 책이었는데 버스정류소에서인지 아니면 새벽 네 시까지 영업하는 카페에서인지 잃어버렸다. 난 그 책으로 뭘 했을까? 모르겠다. 아마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어내자마자 책의 중요성에 대해 망각했고, 이후 어딘가에서 책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당시엔 지금 책을 그러모으는 것처럼 책을 모아두지 않았다. 어쨌거나 난 그 책을 아주 어렸을 때 보았고 어느 곳에서든 라스콜리니코프를 잊을 수가 없다.


 페트뤼스 보렐이나 토머스 드 퀸시에 대해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보들레르(나는 열 종 이상의 <악의 꽃> 판본을 소장하고 있다)나 말라르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멕시코나 아르헨티나의 이히투르Igitur 옛날 판본을 다시 구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는 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랭보에 관해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면 최소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로트레아몽에 대해서도 그랬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책 또한 잃어버렸다.


 그런 판본들이나 비슷한 판본을 찾는 건, 같은 폰트에 같은 레이아웃, 같은 표지, 어둡거나 밝은 신택스를 찾는 건,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젊은 시절, 가난하고 부주의하던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비록 엄밀하게 같은 판본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마치 엘 도라도El Dorado의 금광을 찾으러 플로리다에 들어가는 것 같은 부담을 진다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그리하여, 이것은 내가 책을 구하려고 하는 한 방식인데, 헌책방에 가서 다른 사람들이 잃어버렸거나 안 좋은 순간에 판매된 책 더미를 책장 귀퉁이에서 뒤적이기도 한다. 30년도 더 전에, 다른 대륙에서 잃어버렸던 책들을 말이다. 희망과 의욕에 차서, 자신이 처음으로 잃어버린 책을 찾는 사람의 불운한 기색을 띤 채로. 앞으로 안 읽을 책을 만나는 경우, 이미 그 책을 지칠 때까지 읽었기 때문이다, 땅에 묻어둔 돈을 탐욕스럽게 쓰다듬는 것처럼 그 책들을 손에 쥔 채 만지작거린다.


 하지만 책은 탐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비록 돈과 관련이 있는 건 맞지만. 책은 유령이나 마찬가지다. 엠빠나다 하나 더 주세요! 행복한 2003년 되시길! 음악을 틀어주시오 주인장!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221-222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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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4. 12:19


POST : Entre paréntesis

보르헤스와 파라셀수스


세상의 모든 사람들처럼,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처럼, 보르헤스는 무한하다. 그의 가장 덜 알려진 책 중 하나인 [셰익스피어의 기억](1983)은 네 편의 짧은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세 편은 이미 다른 출판물을 통해 선보였고 추가된 한 편이 책의 제목을 차지한다. 이 책에서 독자는 "파라셀수스의 장미"라는 아주 간결하게 진행되는 짧은 텍스트를 만날 수 있고 (다시) 읽을 수 있다. 파라셀수스의 제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파라셀수스를 방문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이 단편소설은, 두말할 나위 없이, 시간과 조응하는 어떤 무력함이 서술된다. 그리고 낯선 남자의 방문. 해가 질 무렵이며 파라셀수스는 피곤한 상태이고 굴뚝에서는 미약한 불이 연소되고 있다. 결국 해가 지고 꾸벅꾸벅 졸던 파라셀수스는 문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의 제자가 되길 원하는 낯선 남자가 들어온다.

소설의 첫 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다. "두 개의 방이 딸려 있는 자신의 지하 작업실에서, 파라셀수스는 자신의 신에게, 불특정한 자신의 신에게, 그러니까 그 어떤 신에게든 기도하고 있다. 부디 제자를 보내달라고." 그리고 아주 느즈막한 시간에, 그 제자가 마침내 도착한다. 그는 파라셀수스에게 금화가 가득한 자루와 장미 한 송이를 건넨다. 첫 인상만 봤을 때 파라셀수스는 그 제자가 연금술사가 되길 바란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금세 그것이 오해였다는 걸 깨닫게 된다. "금은 관심이 없습니다", 제자가 말한다. 그럼, 자네는 무엇에 관심이 있나? 원석(Piedra)으로 향하는 길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에 파라셀수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길 자체가 원석이라네. 출발하는 지점 역시 원석이고. 만약 자네가 이 말이 와 닿지 않는다면, 그걸 받아들일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는 거라네. 모든 걸음 걸음이 각각 목표로 향하는 걸세" 

낯선 남자는 파라셀수스의 제자로서 감내해야 할 그 어떤 수고스러움도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마지막 선택을 하기 전에 테스트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고 한다. 파라셀수스는 불쾌한 기색을 띠며 테스트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가 아니라 언제 그 테스트를 하고 싶은지 묻는다. 낯선 남자는 지금 당장 하고 싶다고 대답한다. "둘은 라틴어로 대화하기 시작했으나, 이제 독일어로 말한다", 보르헤스는 쓴다. "소문에 따르면", 낯선 남자가 입을 뗀다, "선생님은 장미를 불태웠다가 재가 된 장미를 다시 원래의 장미로 재생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예술적인 행위로 말이지요. 제가 그 경이적인 일의 증인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제가 선생님께 바라는 것이고 그 이후엔 제 모든 삶을 선생님께 바치겠습니다."

그 순간부터 둘의 대화는 철학적인 담론의 색을 띠게 된다. 파라셀수스는 낯선 남자에게 장미를 파괴시킬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고 믿는지 묻는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자가 되길 열망하는 그 남자가 답한다. 파라셀수스는 존재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파괴될 수 없다고 결론 짓는다. 하지만 모든 존재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낯선 남자가 말한다. "만약 자네가 이 장미를 벽난로 속으로 던진다면," 파라셀수스가 말한다, "장미는 소멸하고 남는 건 장미의 재뿐이라고 생각하겠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장미는 영원하다는 점일세. 단지 겉모습만이 바뀌었을 뿐이지. 내가 한마디만 하면 자네는 다시 원래의 장미를 볼 수 있다네." 낯선 남자는 그의 말에 의아해한다. 그는 파라셀수스에게 끈덕지게 요구한다. 장미를 태웠다가, 증류기나 아니면 어떤 말씀(Verbo)을 통해, 그것을 재에서 원래 모습으로 만들어 달라고. 그러나 파라셀수스는 이렇게 대꾸한다. 언젠가는 속임수로 빠져들게 하는 사물의 겉모습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에 대해, 혹은 쉽게 믿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탐구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낯선 남자는 장미를 집어들었다가 불 속으로 던진다. 이 장미는 금세 재가 되어버린다. 낯선 남자는, 보르헤스는 말한다, "무한한 순간 동안 그는 어떤 말들과 기적을 기다렸다." 그러나 파라셀수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슬픈 표정을 띤 채 말없이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사기꾼이라고 하던 스위스 바젤(Basilea)의 의사, 약사 들의 의견을 떠올린다. 낯선 남자는 자신이 뭔가를 이해했다고 깨닫는다. 그리고 더이상 파라셀수스를 괴롭혀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파라셀수스에게 더이상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은 채, 낯선 남자는 금화 자루를 집어들고는 예의를 갖춰 그 집을 떠난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파라셀수스를 업신여기지만 그만은 그에게 사랑과 존경심이 있었다. 그러나 파라셀수스의 가면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게 된다. 그러고 나서 파라셀수스를 검증하려 하고 재단하려 하는 자신은 과연 누구인지 자문해본다. 잠시 후 그들은 헤어진다. 파라셀수스는 문까지 그를 배웅하며 언제든 자신의 집에 오는 걸 환영한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낯선 남자는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둘은 더이상 서로 볼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제 혼자 남은 파라셀수스는, 램프의 불을 끄기 전, 낯은 목소리로 한마디 말을 한다. 그러자 그의 손에 있던 재가 원래 장미의 모습을 되찾는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74-175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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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7.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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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으로의 산책(UN PASEO POR EL ABISMO)



멕시코에 대해 쓴 많은 소설 중 최고의 작품은 아마도 영국 작품이거나 미국 작품일 것이다. D.H. 로렌스가 시도한 주인공 소설(*[날개 돋힌 뱀]), 그리고 그레이엄 그린의 도덕 소설(*[권력과 영광]), 말콤 라우리의 총체 소설(*[화산 아래서]). 이들은 말하자면 혼돈에 집중하는 소설(이것은 이상적인 소설의 주제 바로 그것이다)이고, 그 혼돈을 정돈하려 하는 소설이며, 읽을 수 있게 하는 소설이다. 소수의 현대 멕시코 작가들은, 카를로스 푸엔테스와 페르난도 델 파소라는 가능한 예외와 더불어, 최근에서야 이러한 기획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러한 노력이 이전에는 금지되어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우리가 멕시코라고 부르는 그것이, 또한 숲이나 사막, 얼굴 없이 뒤섞여 있는 군중인 그것이, 마치 외국인들을 위해서만 예약된 영토라도 되는 것처럼.

로드리고 프레산은 멕시코에 대해 쓰기 위해 이런 저런 필요조건들을 충분히 완수한다. [만트라]는 만화경 같은 소설이고, 성난 유머로 뒤덮여 있는 소설이다. (이따금씩 과잉돼 있기도 하지만.) 이 소설은 멕시코 시티 새벽의 정신 착란 상태와 인류학적인 기록 사이를 오고가며, 굉장히 드물게 정확한 산문으로 씌어졌다. 멕시코 시티는 자신의 지하 밑바닥에 다른 도시들을 쌓아두고 있다. 마치 자기 자신을 삼켜버리려고 하는 뱀의 시도처럼.

이 소설은 외면적으로(내가 '외면적으로'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소설에서 모든 것이 외면적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소설의 각 부분들은 수학적인 정밀함으로 조립되어 있을지언정) 세 개의 큰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아르헨티나 소년이 화자로 나온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시간을 보내고, 이후 그가 있는 학교에 새로운 학생이 도착한다. 멕시코 아이인 새 학생은 1분도 지나지 않아 그 반의 리더로 희생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선생이 그를 혼자 내버려뒀을 때 실탄이 장전된 총으로 러시아 룰렛이라는 천재적인 (그리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게임을 하게 되면서. 그 아이 마르틴 만트라는, 바꿔 말하자면 앙팡 테리블의 화신이다. TV 연속극의 두 배우의 아이인 그는 마스크를 쓴 전(前)레슬러를 경호원으로 동행한 채 학교에 간다. 그리고 영화와 텔레비전 세계를 전복하려는 생각을 한다. 멕시코 - 이곳에서 그 놀라운 아이가 태어난다 - 의 앞날은 그 아이에 의해 그리고 화자로 나오는 아르헨티나 소년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 더불어 결코 정확하게 말해지지는 않았지만 이따금씩 질병이나 사회 붕괴처럼 보이는 무언가에 의해, 그리고 아마도 유년기의 결정적인 부재가 될 뿐인 무언가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된다.

이 1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은 과거의 영웅, 헤르바시오 비카리오 카브레라 (사후의) 장군이다. 그는 아르헨티나 독립 전쟁에서 싸웠던 덜렁대는 멕시코인이다. 그는 너무 조급한 판단으로 인해 총살당한 희생자이고, 이것은 3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인 어느 로봇과 같은 방식이다. 그 로봇의 망령은 [페드로 파라모]의 혼란스러운 일인칭 나레이션과 유사하게 보인다.

내 판단에 가장 훌륭한 2부는 소설에서 분량이 제일 많고 알파벳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멕시코 시티나 심연에 대한 백과사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2부는 또한 가장 많은 분량으로 144쪽에서 509쪽까지를 차지한다. 독서 방법은 열려 있다. 순서대로 읽을 수도 있고 좋아하는 글자를 찾아가며 볼 수도 있다. 이번에 화자는 프랑스인이다. 오직 마르틴 만트라가 하는 말만 들을 수 있는 프랑스인. 그는 죽기 위해서 그리고 죽이기 위해서
심지어는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누군가를 죽이고자 멕시코로 여행을 떠난다.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복잡한 구성 사이에, 조앤 볼머의 삶이 있다. 그녀는 남편인 버로스가 빌헬름 텔 연극에서 빌리엄 역할을 하던 중 (*오발 사고로) 멕시코 시티에서 죽었다. 그리고 마스크를 쓴 레슬러의 역사와, 마스크를 쓴 이런 레슬러들 중 한 명이 프랑스에서 만들고 싶어 했던 누벨 바그 영화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LIM(*el Lenguaje Internacional de los Muertos)의 역사, 즉 죽은 자들의 국제 언어 의 역사가 있고 멕시코 괴물들의 역사, 멕시코 포르노의 역사, 여성 락그룹 아노렉시아와 수스 플라키타스(*거식녀와 말라깽이들?)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미디어를 이용하며 세계 종말적인 게릴라처럼 활동한 마르틴 만트라의 역사가 있다. 물론 파리에서의, 프랑스인 화자와 멕시코 여인이 나눴던 사랑의 역사 또한 부족하지 않게 있다.

[만트라]의 말들을 무작위로 발췌해보자. "TV 연속극"이라는 항목에서 독자는 이런 내용을 읽을 수 있다. "TV 연속극은 마치 돌연변이 통신원과 같다." "TV 수상기" 항목에선, "네가 나에게, 죽은 자들이 보이는 이런 죽은 텔레비전의 상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너에게 답할 것이다(...) 자신의 눈을 다른 좀비들에게 먹으라고 주는 이런 화면에 나오는 좀비들의 상표는 좀비이다." "구토"라는 항목에선, "이렇게 조안 볼머가 나에게 말한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여러 담배를 피우면서 그녀가 나에게 말한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그것들은 다른 상표의 담배라고 말한다. 어떨 때는 일인칭 시점으로 말하고, 또 어떨 때는 삼인칭 시점으로 말하며, 간헐적으로는 지진이 난 것처럼 경련하면서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국제 언어(*LIM)이다."

그러니까 죽은 자들이 말하는 언어의 리듬은 진동과 닮아 있다. 그리고 [만트라]는, 겹겹이 쌓여 있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죽은자들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멕시코의 죽은자들, 저명한 사람부터 익명의 사람까지 전부다. 독자가 인지하게 되는 그 진동은 LIM의 진동이고, 이것들이 알파벳 순서로 쓰여 있는 한 언제든 소설이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인 3부는 미래적인 우화이다. 멕시코 시티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이런 폐허 속에서 누에바 테노치티틀란 델 템블로르라고 불리는 새로운 도시가 세워진다. 한 로봇이 이 이상한 도시의 줌심부로 돌아온다. 만트락스라고 하는 자신의 창조자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할 것이라고 그는 자신의 모체 컴퓨터와 약속했다. 명백하게, 우리는 [페드로 파라모]의 새로운 버전, 즉 룰포의 [페드로 파라모]와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위험천만한 만남 앞에 있는 것이다. 희생자의 비석 근처에서, 놀라운 결말을 지니고 있는.

최근 몇 년 동안 읽었던 소설 중 이렇게 감격스러운 소설은 드물었다. [만트라]를 통해 나는 더 많이 웃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은 나에게 대단히 고결하게 보이는 동시에 퇴폐적으로 보였다. 작가의 우울한 에너지는 바닥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항상 미학적인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절대 촌스럽거나 감상주의적인 것에 빠지지 않으며, 항상 스페인어권 문학에서 호평을 얻는다. 이 소설은 멕시코에 대한 소설이고, 사실상 모든 위대한 소설이 그런 것처럼 시간의 흐름에 대해, 그리고 꿈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해 진정으로 다루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이건 대단히 비밀스러운 분야인데, 문학을 만드는 기술에 대하여 다룬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깨닫지 못하지만.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307-310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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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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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스러운 탐정들]에 관하여(Acerca de [Los detectives salvajes])


제목에 딸린 각주에 따르면 다음 글은 "로물로 가예고스 상 시상식 입장객들에게 나눠줬던 프로그램 책자에 수록됐던" 것이다. (그나저나 하면 할수록 왜 점점 더 어려워지는 걸까...)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관하여

소설 한 편을 끝내는 일은, 크지는 않지만 어떤 즐거움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그중 하나는 그 소설에 대해 잊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점점 희미해져가는 꿈이나 악몽처럼 그것을 흐릿하게 기억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소설, 새로운 나날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더 잘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채로. 카프카 - 그는 금세기 최고의 작가다 - 는 옳았다. 그는 그의 친구에게 자신의 모든 작품을 불태워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브로트에게 했던 요청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연인이었던 도라에게도 했던 것이다. 브로트는 작가였고 카프카와의 약속을 완수하지 못했다. 도라는 덜 교육받았고, 아마도 브로트보다는 카프카를 더 좋아했을 것이며,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의 연인의 요청을 문자 그대로 실행했다고 간주한다. 그날 이후, 혹은 우리가 헛되이 그날 이후라고 믿고 있는 그날 이후, 특히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모든 작가들은 자신의 내부에 브로트와 도라라고 부르는 두 개의 악마와 천사를 가지게 된다. 항상 둘 중 하나는 다른 것보다 크다. 일반적으로 브로트가 도라보다 더 크고 잠재력이 있다. 내 경우는 다르다. 도라도 브로트만큼 충분히 크다. 도라는 내가 썼던 것을 계속해서 잊어버린다. 아무런
수치나 후회의 뒤틀림 없이 새로운 뭔가를 쓰는 데 전념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이제 어느 정도 잊혀졌다는 얘기다. 이 소설에 대한 약간의 코멘트 정도만 겨우 할 수 있을 뿐이다. 한편으로, 나는 이 소설에서 많은 독법 중 하나로 마크 트웨인이 쓴 허클베리 핀에 대한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야만스러운 탐정들] 2부에 나오는 수많은 목소리의 흐름을 미시시피 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이 소설은, 멕시코 시인 마리오 산티아고의 삶의 파편들을 어느 정도 충실하게 옮겨 쓴 것이다.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나에겐 행운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어떤 세대적인 패배와 한 세대의 행복을 반영하려고 했다. 여기서 행복이란 어떤 경우엔 용기를 뜻하지만, 용기의 한계를 뜻하기도 한다. 내가 보르헤스와 코르타사르의 작품에 영원한 빚이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내 소설은, 소설에 나오는 많은 목소리만큼이나 다양한 독법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고통스럽게 읽을 수도 있고, 또한 신나게 읽을 수도 있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326-327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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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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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히오 피톨


앞의 것도 그렇고... 어렵다...


세르히오 피톨


멕시코 작가 세르히오 피톨이 쓴 [카니발 삼부작]이 서점에 깔린 지도 몇 달이 지났다. 이 책은, 은밀하고 대체로 분류가 잘 안 되는 이 작가의 예외적인 세 편의 소설을 한 세트로 묶은 것이다. 그가 왜 은밀한 작가냐고? 왜냐하면 피톨은 카를로스 푸엔테스나 '붐'의 단물을 쪽쪽 빨아먹은 당대의 작가들과는 달리 항상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 멕시코에서는 그의 짝패가 없고 스페인어권 지역에서도 단지 극소수만이 그와 비교할 법하다. 그의 독서 습관에서도 볼 수 있는 점이다. 우리가 피톨에게 빚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르지 안드레예프스키의 기억할 만한 소설 [천국의 입구]의 번역으로, 그리고 항상 명민한 비톨트 곰브로비치에 대한 그의 독서에 있어서.

그는 다양한 여행을 하고 넓고 세계를 떠돌아 다님으로써 먼 곳에까지 푯말을 세울 수 있었다. 더불어 우리가 갑작스레 그의 존재를 확인하게 됐을 때 그는 이미 그곳에 없다. 이런 이유로 그는 그의 작품을 운 좋게 만난 소수의 독자들에 의해서만 찬사를 받는다. 다시 말해 다수의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장점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거대한 그림자이지만, 또한 거리 한가운데에서 고슴도치를 맞닥뜨렸을 때처럼 피하게 되는 거대한 그림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피톨은 살바도르 엘리손도가르시아 폰세보다 더 좋은 작가이다. 어차피 이 두 소설가 역시 많은 사람들의 독서 리스트에서 그다지 큰 의미를 차지하지 않는다.

[카니발 삼부작]에는 우선
1984년 에랄데 상 수상작인 [사랑의 행진El desfile del amor]이 포함되어 있다. 범죄소설이나 되돌릴 수 없는 역사처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멕시코의 거대한 미로 같은 소설이다. 다음으로 [신성한 백로를 길들이다Domar a la divina garza]. 지옥에 다가가는 소설이고, 피톨 식 유머 감각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마지막으로 [부부의 삶La vida conyugal]. 피톨의 다른 모든 작품에서처럼 유머가 부족하지 않고, 현실과 글쓰기에 대한 반영이 담긴 소설이다. 

피톨은 현재 예순여섯 살이고,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만 꼭 말해야만 하는 것이 있는데, 그는 계속해서 반항적이고 용기 있는 사람이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35-136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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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18.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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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의 리히텐베르크


리히텐베르크는 우리의 철학자이다. 이따금 그가 우리의 유일한 철학자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파스칼이 있다는 점이고(그는 췌장염으로 죽었다), 또한 디오게네스도 있다는 점이다(그는 최초의 농담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내가 "우리"라고 말할 땐 솔직히 말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위안을 찾는다, 리히텐베르크에게서, 그의 눈에서, 그의 감정적인 동요에서, 그의 의심에서 그리고 그위 취향에서. 때때로 이들은 전부 같은 것이다.

존경할 만한 괴팅건 시의 현자가 다음의 글을 쓴 지도 200년 남짓 되었다. "1799년 2월 9일에서 10일로 넘어가는 밤에, 나는 꿈을 꾸었다. 여행하는 중이었고, 여인숙에서,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길가에 있는 선술집에서 식사를 했다. 가게 안에서는 사람들이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옷을 잘 차려 입은 젊은이는 다소 의심스러운 표정을 한 채 스프를 먹고 있었다. 서 있든 앉아 있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은 채. 그는 두세 번 스프를 떠먹을 때마다 숟가락 하나를 허공에 내던졌다가 곧바로 그 숟가락을 되잡고는 차분히 스프를 삼켰다. 이 꿈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내가 습관적으로 관찰을 했다는 점이다. 많은 것들이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했다. (어떤 소설가에게도 그냥 떠오르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데 이르렀다. 주사위를 가지고 노는 사람들 옆에서 키가 크고 비썩 마른 여자가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게임에서 이기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녀가 답했다. 그리고 뭔가를 잃어버릴 수 있는지도 물어보았다. 없어요. 나에겐 중요한 놀이로 여겨졌다."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구절은 카프카를 떠오르게 하고 20세기 문학의 좋은 점을 떠오르게 한다. 이 구절은 또한 계몽주의의 요약본이고 그 위에서 문화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이 구절은 2월 24일에,
그러니까 꿈을 꾼 지 14일 뒤에 있었던 작가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마치 죽음이, 리히텐베르크와의 최후의 만남 2주 전에 그를 초대하고자 마음먹기라도 했었던 것처럼. 그럼 우리 괴팅건의 철학자는 비썩 마른 체구의 노부인 앞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분명히 그는 유머와 호기심을 가지고 행동한다. 지성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라고 할 수 있는.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34-135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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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18.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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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도브로와 파라와 함께 한 오후


내 친구 마르샬 코르테스-몬로이가 나를 라스 크루시스로 데려간 지도 2년이 다 되어 간다. 거기서 우리는 식사를 하고 니카노르 파라와 함께 오후를 보낸다. [시와 반시](초판 1954년)의 저자인 그는 언덕 중턱에 집 한 채를 가지고 있다. 거기선 광막한 대양이 보이고, 만의 반대편에선 비센테 우이도브로의 무덤도 보인다. 우이도브로의 무덤을 더 잘 보기 위해, 파라의 목재 테라스에 프리즘 쌍안경이 있으면 더 좋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것 없이도 [높은 매Altazor]의 저자의 무덤은 충분히 잘 보인다. 아니면 최소한 그를 좋아하는 만큼 잘 보인다.

저 숲이 보이나? 파라가 묻는다. 네, 보입니다. 어떤 숲이 보이지? 파라가 묻는다. 그가 교수였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위쪽 숲 아니면 아래쪽 숲? 오른쪽 숲 아니면 왼쪽 숲? 전부 다 보입니다. 나는 답한다. 동시에 달 세계 같은 황량한 경치를 응시한다. 좋아, 왼쪽 숲을 봐. 파라가 말한다. 아래쪽에는 고속도로 같은 게 있어. 선처럼 보이지만 선이 아니라 고속도로지. 보이나? 이제 고개를 들면 숲이 보일 거야. 그러니까, 고속도로이거나 지방 도로임이 분명한 스크래치가 보이고, 또한 숲이 보인다. 숲의 위쪽 부분에는 하얀 반점이 있어. 파라가 말한다. 사실이다. 테라스에서 보이는 숲은 검은 색에 가까운 어두운 녹색이다. 그리고 그 숲의 통일성을 가장 윗 경계에 있는 하얀 반점이 망가뜨린다. 하얀 반점이 보이네요. 나는 말한다. 그게 우이도브로의 무덤이야. 파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등을 돌려 방으로 들어간다. 마르샬이 그와 동행하자 순식간에 나는 혼자 남겨진다. 동시에 흔들바람이 솟아오른다. 해변에서 언덕으로 불어온 바람이다. 나는 하얗고 작은 반점을 응시한다. 그 밑엔 비센테 우이도브로의 뼈가 묻혀 있다.

잠시 후 뭔가가 내 바지를 끌어당기는 걸 느낀다. 우이도브로의 유령인가? 아니다. 파라의 고양이들이다.
집 없이 떠도는 예닐곱 마리의 고양이들이 매일 오후 스페인어권 생존 시인 중 가장 위대한 시인의 정원에 끼니를 챙겨먹기 위해 들른다. 마치 나처럼. 더 멀리 갈 것도 없이.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33-134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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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14.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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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헬 플라네이의 유령


카탈란 화가 앙헬 플라네이의 이름 철자는 Ángel Planells. 카탈란어를 읽을 줄 몰라 구글 번역기 듣기 기능을 참고해 앙헬 플라네이라고 썼는데... (아무래도 틀렸겠지 -_-;) 혹시 읽을 줄 아시는 분 있으면 알려주시길...


앙헬 플라네이의 유령

겨울 오후에 가끔씩 블라네스의 중심가에서 앙헬 플라네이의 유령이 보일 때가 있다. 사람들이 말하길 그의 여자형제들의 집에서 올 때나 그의 조카인 제빵사 조안 플라네이의 집으로 갈 때. 아마도 조안 플라네이는 오늘날 가장 많은 앙헬 플라네이의 작품을 갖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따금씩 나는 조안 플라네이의 빵집에 들러 그의 삼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나에게 뉴 벌링턴 갤러리에서 있었던 1936년 런던 초현실주의자의 첫 번째 전시회 사진을 보여준 지도 꽤 됐다. 사진 안에서 앙헬 플라네이가 서명한 작은 크기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스페인 화가들 중 피카소와 도밍게스, 달리, 미로의 작품을 전시했던 런던 초현실주의자 전시회는, 세계 규모의 전복을 시도하려 했던 그룹의 혁명적인 활동에서 분수령이 되었다. 이후 플라네이에게 스페인 내전이 찾아온다. 그는 오랜 어둠의 시간 동안, 살아남기 위해 끔찍한 정물화를 그려야만 했고 바르셀로나에서 화가 수업을 해야만 했다. 그곳에서 열정이란 지옥의 패거리였던 사제와 수녀의 입에 담긴 공허한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시기 동안 플라네이는 뭘 배웠을까? 우리는 답을 알 수 없다. 어쩌면 굴복하는 일에 대해 완벽하게 연습했을지도. 어쩌면 모든 노력이 얼마나 공허한지 알게 됐을지도. 그래서 매년 여름 그는 블라네스에 올라와 여자형제들 집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의 그림에서 점차  초현실주의의 오랜 테마 - 그땐 이미 초현실주의가 지하 묘지에 잠들어 있을 때다 - 가 되살아났다. 그런 우울한 복귀에 대한 증거가 바로 그림 "알 수 없는 뭔가를 기다리는 선원Mariner esperant l'arribada de no sap què"(1974)이다. 블라네스의 중심 거리에서 그와 몇 차례 만났을 법도 하지만 그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본다. 나는 그가 가끔씩 우리 동네 파세오 마리티모를 걸어다니는 것을 본다. 사색에 빠진 가벼운 유령의 모습으로. 화가 앙헬 플라네이는 1901년에 태어나서 1989년에 죽었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30-131p), ANAGRAMA



Mariner esperant l'arribada de no sap què(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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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14.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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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마타스의 최근 책


한 달쯤 전에 봤던 글인데 이제서야 포스팅을 한다. [괄호 치고]에 언급되는 빈도수만 놓고 봤을 때 엔리케 빌라-마타스는 스페인어권 생존 작가 중에서 볼라뇨가 가장 선호하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아래 언급하고 있는 책은 작년 11월에 [바틀비와 바틀비들]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출간됐다. 출간될 거란 기대를 거의 하지 않았기에 더욱 반가웠다. 아래 글 서두에 나오는 내용과 관련하여 도움이 될 거 같아 원서 표지 이미지 파일 첨부한다.



빌라-마타스의 최근 책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것은 불안하다. 책 겉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에서부터 말이다. 사진 속에는 주말 복장을 차려 입은 세 명의 시골 청년이 등장한다.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채, 그들은 자부심 있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본다. 우아함이 부족하지 않은 자부심이고 무심하면서도 초연함이 느껴지는 자부심이다. 마치 우리들이 모르는 문학의 어떤 부분에 대해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젊을 뿐만 아니라 미남인 이 시골 청년들은 시골 길을 지나간다. 그리 넓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길을. 파종 중이거나 휴경 중인 밭 가운데서, 그들은 얼굴을 돌린 채 자신들을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의 렌즈를 똑바로 바라본다. 길에 멈춰서서, 그들은 긍지에 찬 표정을 띤다. 심연과 현기증을 위해 주조된 듯한 얼굴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바틀비와 바틀비들](아나그라마 출판사)의 내부에서 우리 독자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가벼운 산보와도 같은 빌라-마타스의 최근 책은 각주의 형태로 씌어졌고, 문학에 대한 심연과 현기증뿐만 아니라(비록 어떤 순간에는 이것이 유일한 논쟁거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류가 처하게 되는 인생의 한 단면에 대한 심연과 현기증에 의해 씌어졌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도전적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인생의 특정 순간에 글을 쓰지 않기로 결심한 작가들에 대해 글을 쓰는 작가의 태도가 도전적이고, 글쓰기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명확해지는 구역에, 늘 확실하다고 할 수 없는 우아함과 유머만을 무기로 장착한 채 돌파하는 것이 도전적이다. 이쯤 되면 예의상 좀 더 수사적인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소설인가, 아니면 문학(혹은 반문학) 수상작 선집인가, 아니면 기존의 분류에서 벗어난 잡다한 책인가, 아니면 작가의 일대기인가, 아니면 신문기사를 짜깁기한 것인가? 그 순간 내게 떠오른 유일한 대답은, 이 책은 다른 종류의 책이라는 것이다. 이전의 모든 것들을 혼합하여 만들어진 책. 어쩌면 21세기형 소설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단편소설과 신문기사와 연대기와 자서전을 끌어모아 만든, 말하자면 하이브리드 소설인 것이다. 이 책의 어떤 방식은 빌라-마타스의 다른 작품 [어림수로 끝내기 위하여Para acabar con los números redondo]를 떠오르게 한다. 1997년에 출간된 아주 근사한 책으로 내가 읽었던 정말 멋진 책들 중 하나이다. 거의 주목 받지 못한 채 지나갔으나 그 해 스페인에서 출간된 소설 중 최고의 작품이라는 데 의심을 품는 사람은 없다. 두 책의 기본 정신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시적인 에너지도 같다. 심지어 어떤 가벼움마저 유사하다. 하지만 [어림수로 끝내기 위하여]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던 점이나 그래서 충분히 만족하고 확신할 수 있었던 점이, [바틀비와 바틀비들]에서는 뒤늦은 미궁이 된다. 마치 상징주의 화가들의 그런 미궁처럼. 또한 그것은 열정이고 출구를 향한 탐구이며 이따금씩 백조의 노래(혹은 울부짖음)이다. 그것은 포켓 사이즈의 지옥(혹은 보이지 않는 지옥)을 분류하고 주워 모은 작가의 모든 가치에 대한 것이다. 그런 지옥은 지구적인 차원에서 거대한 지옥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 책은 말한다. 인생의 특정 순간에(광휘의 순간이거나 절망의 순간이거나 광기의 순간이다) 글쓰기를 그만둔 작가들뿐만 아니라 빌라-마타스 작가 본인처럼 절대 글쓰기를 그만두지 않을 작가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 죽음에 대해서, 죽음 앞에서 무용한 행위들 -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를 구하거나 구할 수 있다 - 에 대해서, 작가들뿐만 아니라,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독자가 이해하는 점인데, 사실상 독자들에 대해서, 모든 층위의 인류에 대해서, 살아 있는 사람과 삶을 포기한 사람에 대해서, 모험에 대해서, 죽음과의 싸움에 대해서, 책을 읽는 사람과 책 읽기를 그만둔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를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한 생각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이 모든 것이 고작 179페이지 분량의 책 속에서 드러난다. 빌라-마타스(
그는 당대 스페인 소설판에서 독보적인 존재다)의 유머 감각과 우아함에 의해 부드러워진 책이다. 그의 도전적인 태도는 옷매무새가 단정한, 사진 속의 주말 복장을 한 시골 청년의 그것과 유사하다. 비록 빌라-마타스는 내가 알고 있는 시골 청년의 모습과는 차이가 많이 나지만. 비록 빌라-마타스는 일요일마다 일을 하기는 하지만.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286-288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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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1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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