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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RCH RESAULT : 글 검색 결과 - Entre paréntesis (총 35개)

POST : Entre paréntesis

카탈란어로 번역된 [페르디두르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페르디두르케 추종자들이. 몇 달 전, 모순으로 가득한 20세기에서 가장 빛나는 책들 중 하나가 슬그머니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페르디두르케](Quaderns Crema 출판사)이다.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대표작으로 1937년에 처음 출간된 작품이다. 스페인어 번역본은 카페 렉스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모임을 통해 나왔다. 그 책이 무례함과 관대함에 대한 이정표 중 하나가 되었다는 건 의심할 바가 없다. 즉, 우리 세기 기쁨의 문학에 대한 이정표 중 하나인 것이다. 그 전설적인 번역은 쿠바 작가인 비르힐리오 피녜라가 주로 맡아서 했는데, 근처 서점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절대적으로 발견하기 어렵다는 얘기는 아니다) 스페인 반도의 독자들은 곰브로비치의 가장 핵심적인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것이다. [페르디두르케]의 프랑스어 번역본이나 이탈리아어 번역본, 독일어 번역본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우리는 이 책을 찾기 위해 그리 멀리 갈 필요가 없게 됐다. 카탈란어를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금세기 핵심적인 소설들 중 하나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호주머니에 이천 페세타만 있으면 된다. 안나 루비오와 저지 슬라우미르스키의 훌륭한 번역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굉장히 모범적인 편집자, Jaume Vallcorba Plana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출판 목록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보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로드 바이런의 [카인], 휠더린의 [엠페도클레의 죽음], 노발리스의 단편들. 뿐만 아니라 Quim Monzó, Ponç Puigdevall, Maurici Pla 같은 당대의 카탈란 작가들(단지 몇 명만 말했을 뿐이다)도 만날 수 있다. [페르디두르케]를 출판하려고 했을 때 Vallcorba의 머릿속에선 어떤 생각들이 오고갔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것이든 생각했으리라. 수익을 올릴 거라는 점만 빼고.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곰브로비치 출간을 착수한 편집자가 계속해서 뭔가를 계획할 것이라는 점이다. 위대한 폴란드 작가의 작품을 번역 출간할 수 있는 살아있는 언어, 카탈란어로 말이다. 이 언어 속에서 필리도르(*[페르디두르케]의 속 이야기의 주인공)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페르디두르케 추종자들이.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17-118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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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24. 16:13


POST : Entre paréntesis

칠레 문학


블라네스에서의 평온한 날들. 나는 새로운 칠레 문학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그 수업을 하는 사람도 나고 받는 사람도 나뿐이다.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비록 이따금씩 학생으로서의 게으름 탓에 머리털이 쭈삣 일어설 때가 있긴 하지만. 강사로서의 서투름 탓에 갑작스러운 졸음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 이런 공격을 기면발작이라고 한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아이다호)에서 리버 피닉스가 겪었던 것이다. 하지만 리버 피닉스에겐 키아누 리브스가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피닉스에겐 자신의 졸린 머리를 기댈 곳이 있었다는 얘기다.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곤 책밖에 없다. 책은 이따금씩 악몽을 유발한다. (무엇보다 책과 베개를 혼동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잠을 자고 책을 읽는다. 꿈 속에서 내가 말한 바에 의하면, 칠레 문학은 많은 작가들과 비평가들과 독자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악몽이다. 현실적인 악몽이 강한 충격으로 나를 깨운다. 나는 거리로 나간다. 저녁 일곱 시. 은행으로 간다. 은행 문을 열자 지팡이를 든 남자가 내 앞으로 끼어든다.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 그는 일전에 맥주병을 던져 바의 유리창을 깬 적이 있다. 들어가도 되죠? 그가 물었다. 물론이죠. 그에게 대답했다. 내가 현금 자동 입출금기에서 돈을 뽑는 동안 지팡이를 든 그 남자는 모퉁이에 서서 자신의 예금 통장을 읽고 있다. 내가 나갈 때 그가 작별인사를 했으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예금 통장을 마치 소설책처럼 읽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팡이를 든 그 남자는 상대적으로 교양 있는 사람이다. 다른 바에 있을 때, 그는 피터 팬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술고래처럼 술에 취해 있었고 옛날엔 자신이 부자였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선 눈물을 흘렸다. 리버 피닉스가 피터 팬처럼 좋은 역할을 맡았으면 어땠을까. 은행에서 멀어지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시 칠레의 새로운 문학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람들이 말하길, 새로움은 마누엘 로하스에서부터 현재까지라고 한다. 나의 발걸음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게임 가게로 향한다. 가게 주인 이름은 산티. 나의 친구다. 나는 그에게 삼천 페세타의 빚이 있다. 실은 그 때문에 은행에서 돈을 인출했던 것이다. 가게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단지 산티만이 가게를 보고 있을 뿐이다. 그를 도와주는 대신, 나는 가게 모퉁이에 조용히 서서 지팡이를 들고 있었던 그 남자처럼 사람들을 관찰한다. 게임을 살펴보고 있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안 좋아진다. 나는 눈을 감는다. 갑자기 의심할 바 없는 칠레 억양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고 세 명으로 된 한 무리를 발견한다. 한 명은 무시무시하게 생긴 남자애로 중성적인 억양으로 말한다. 다른 한 명은 남자애의 엄마로 콜롬비아 억양 비슷하게 말한다. 나머지 한 명은 짙은 흑발의 남자로 아까 처음에 말했던 사람이다. 그는 칠레인이다. 이 삼인조는 쫄바지를 입고 부츠를 신었다. 그들의 체구는 작다. 남자애는 터프해 보이지만 그리 영리할 것 같지는 않다. 순한 담배를 피우고 있지만 자신이 어리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다. 그의 콜롬비아인 엄마는 40대거나 그보다 조금 적은 걸로 보인다. 그녀의 얼굴은 확실히 거칠지만 지금은 평화로워 보인다. 콜롬비아 여자와 커플인 칠레 남자는 남자애의 아버지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는 삼십대가 틀림없고, 자신의 양아들만큼이나, 혹은 양아들보다 더욱 게임 구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들 삼인조는 지옥에서 막 탈출한 것 같다. 콜롬비아 여자는 오늘 좋은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두 아이들은 게임을 하면서 한 주일을 보낼 준비를 한다. 나는 기 드보르상황주의자들에 대해 생각한다. 생생한 현실에 대해 생각하고 새로운 칠레 문학에 대해 생각한다. 산티가 새로 나온 컴퓨터 게임을 보여주길래 슬쩍 본다. 세틀러라는 이름의 게임으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와 비슷할 게 틀림없다. 그에게 갚아야 할 돈을 건네주고 가게에서 나온다. 집에 가는 길에 꿀과 카모밀차를 산다. 나는 다시 집에 있다. 다시 나의 수업에 참여한다. 책을 읽는 것이다. 거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나는 책에 기대 잠을 자고 꿈을 꾼다. 불면증과 기면발작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지도 책이다. 그 후 어둠 속에서 눈을 떠 벽을 바라본다. 절룩거리는 남자의 얼굴과 지옥에서 온 듯한 삼인조의 얼굴이 러시모어 산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생존자들은 어떤 작가들을 읽는가? 나는 큰 목소리로 묻는다. 위선자들을, 나의 형제들을.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15-117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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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 Entre paréntesis

블라네스의 봄


아래 글에 '독신 기계'라는 말이 나온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들뢰즈의 용어인 것 같은데 들뢰즈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므로 검색을 해보았고 그마나 링크된 글이 읽을 만했으나 이해가 안 되는 건 여전했으므로 아는 분 있으면 누가 설명좀 해주세요 뿌잉뿌잉. 어쨌거나 아래 글에서는 '봄'이 '독신 기계'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봄을 찬양하는 내용인 것 같기는 한데 구체적인 맥락이 잘 파악이 안 된다. 전반적으로... 망했다. -_-;



블라네스의 봄

블라네스에 봄이 온다.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심지어 마을 주민 중에서 가장 무뚝뚝한 사람에게까지 똑같이 오는 봄은, 웃음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시선을 연습한다. 마치 독신 기계가 된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주로 이해할 수 없고 논쟁할 수 없는 기계이다. 그것은 마을에 도착한다. 어디서 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바다나 산에서 올 것이다. 백인과 흑인들이 함께 씨 뿌리며 열심히 일하는 야채 밭에서 오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서 오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랴.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고랑 가운데에서, 씨를 뿌리던 중간에 멈춘다. 주민들 중 가장 무뚝뚝한 사람이 파리로 가득한 모퉁이에서 문득 멈추는 것처럼. 봄이 도착한 것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 독신 기계는 어른들보다는 아이들이 -
가장 불행한 아이들도 포함하여 - 더 잘 이해한다. 그게 전부다. 거기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호안 데 사가라는 이렇게 말했다. 봄은 마을과 블라네스에 도착하여 블라네스 비야나 블라네스 수르 메르가 된다고. 우리의 작은 상상의 도시, 우리의 도시가 독신 기계의 변덕에 넘어갔다고. 봄은 어딘가에 도착했다. 비록 왜 출발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바다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봄이 어딘가에 도착한 걸 보면 바다가 놀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약 사람들이 생각하기 시작하면(즉, 만약 사람들이 독신기계처럼 생각하기 시작하면), 봄은 산트 호안 탑에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 탑은 고딕 양식이며, 마을에서 영구적인 냉정함을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마치 건물 구석구석에 사계절이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블라네스에서, 봄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 - 호아킴 루이라의 내세관적인 내용이 담긴 책이나 브라바 해변의 새빨간 새우들이나 살아 있다는 것의 즐거움과 그것에 관해 전혀 논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 - 이 도착하기에 이상적인 입구이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14-115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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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 Entre paréntesis

회고록(Los libros de memorias)


모든 책 중에서 회고록이 가장 거짓된 책이다. 회고록 안에 있는 거짓은 의심 받지 않을 만큼 높은 수준에 다다르고, 회고록의 저자들은 대개 자신을 정당화하기 바쁘다. 거품과 회고록은 함께 어울리기 마련이다. 허위와 회고록은 죽이 잘 맞다. (비록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을 나쁘게 말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말하는 회고록 저자들을 본 적이 없다. 자기 인생에서 수치스러웠던 에피소드를 냉정하게 풀어놓는 저자들도 본 적이 없다. 마치 그들의 삶에서 수치스러웠던 일들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 어떤 회고록 저자들도 자신의 비겁함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들은 용감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 태풍의 눈 속을 통과하는 것처럼 살기 마련이다. 현대 문학사에 있어서 이런 회고록 저자들의 가장 최근의 예로서, 파블로 네루다의 [내 삶을 고백한다Confieso que he vivido]를 들 수 있다. (*한국에는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반면 에르네스토 사바토의 최근 책 [죽기 전에Antes del fin](세이스 바랄 출판사)는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책이다. 이 책은 그가 침묵한 지 20년도 더 지난 후에 출간된 것이다. 사바토의 독자들에게 이 책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단지 세 권의 장편소설만을 썼고 아마 더 이상은 소설을 쓰지 않을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를 포기하지 않는 독자들에게 그렇다는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처음으로 주목하는 부분은 책의 분량이다. 고작 188페이지이기 때문이다. 회고록을 다루기에는 분명 충분하지 않은 분량이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신경쓰지 않고 책 속으로 들어감에 따라 우리 독자들은 188페이지가 충분한 분량이며 심지어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많은 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그는 불행이 존재하고 유토피아 역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유토피아에서 우리는 숨을 쉬거나 숨을 멈춘다. 이것이 사바토가 우리에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었던 전부이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14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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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7. 15:19


POST : Entre paréntesis

토메오(Tomeo)


토메오의 작품을 접해보지 않아서 소설 내용 파악도 잘 안 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다른 글에 비해 잘못 해석된 부분이 많을 것 같다.


토메오

하비에르 토메오의 새 소설이 출간됐다. 그의 팬인 우리는 순수한 즐거움으로 손을 비빈다. 책 제목은 [나폴레옹 7세Napoleón VII]이고 자신을 나폴레옹이라고 믿는 광인에 대해 다룬다. 그는 자기 집 발코니로 나가 거리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건물 입구로 모여드는 자신의 병사들을 지켜본다. 이 인물은 [거북이의 노래El canto de las tortugas]에 나왔던 광인 - 그는 동물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고 믿었다 - 의 어떤 모습을 연상시킨다. 광인 일라리오는 자신의 살찐 왼쪽 발가락과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이따금씩 자신을 무라트소울트, 그리고 나폴레옹의 불행한 비서라고 믿는다. 물론 일라리오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이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 텔레비전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티비를 볼 때 그는 자신에게 오는 특별한 시그널을 감지한다고 믿는다. 나폴레옹의 꿈 속에 잠들어 있는 또 다른 등장인물은 일라리오의 이웃인 크로스드레서이다. 그는 호세피나의 옷을 입고는 나폴레옹 7세와 밤에 데이트를 하기 위해 준비한다. 그는 부주의한 방식으로, 즉 여전히 희망이 있는 곳에서, 심연을 향해 직접적으로 나아간다. 두 등장인물은 전형적인 토메오적 인물이다. 그의 작품들 역시 주로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 그중 하나에는 오직 외로움 때문에 만나게 된 두 명의 다른 존재가 나누는 대화가 있다. (대체로 결국 고뇌로 가득한 독백으로 끝나버리게 된다. 눈을 깜빡거리며, 이성의 한계에 다다라서.) 다른 하나에는 주로 단 한 명의 인물이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그는 정신을 잃고 세계와 불화하게 된다. 토메오의 눈은 - 아마 스페인 문학에서는 거의 할 수 없었던 것일 듯하다 - 일상적인 지옥과 (아는 사람들이나 아는) 예기치 않은 어휘의 천국들을 살핀다. 그리고 우리에게 실제의 이미지와 황폐화된 우리들의 저항을 보여준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13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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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3. 22:03


POST : Entre paréntesis

서점 주인(La Librera)


제목이 "La Librera", 그러니까 영어로 "Bookseller"인데 사전에 나와 있는 '서적상'이나 '책장수'로는 느낌이 잘 안 살고, 딱히 어울리는 단어가 뭐지도 모르겠고... 암튼 그래서 저런 제목을 썼다. 우리나라엔 갈수록 대형서점만 남고 아래와 같은 서점은 멸종되고 있는 현실이니 그에 적합한 단어도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서점 주인

우리는 모두 가치 있게 생각하는 서점이 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내 경우는 블라네스에 있는 산트 호르디 서점이다. 필라르 파헤스페티트 이 마르토리의 서점이고 마을의 오래된 건천에 있다. 사흘에 한 번씩 나는 책 냄새를 맡으러 그곳에 간다. 이따금씩 서점 주인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필라르 파헤스페티트 씨는 자그마한 여성이다. 그녀는 매일 아침, 혹은 손님이 별로 없는 오후에 책 주문서를 넣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이런 시간에 필라르 파헤스페티트 씨는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다. 즉 있기는 있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이런 시간에 이곳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서점은 탐험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가 된다. 아마도 야생의 영토일 것이고, 어쩌면 황무지일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은 조난당한 것 같은 얼굴을 한다. 심지어 [엘 프론트]를 찾으로 온 여성들조차도 말이다. 이런 시간에 산트 호르디 서점에선 (나는 초조해지지만 필라르 씨는 차분해지는)
재즈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다른 경우엔 클래식 음악과 민속 음악, 브라질 음악을 듣는 것도 가능하다. 어쨌거나 그 음악들은 서점 주인을 차분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서점 주인이 초조해질 만한 충분한 원인이 있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안정되게 해주는 음악으로 가득한 서점이라고 해도 존 콜트레인의 음울한 화음을 들을 때면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게 된다. 이런 것들이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고. 그녀에게 이 일을 항상 하고 싶은지 물었을 때 그녀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녀는 28년 전 토르데라에서 사서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블라네스로 건너왔고 자신의 서점을 시작했으며 이제는 행복해 보인다. 나 역시 이 서점이 있어 대단히 행복하다. 나는 그녀를 신뢰한다. 내가 부탁한 책들을 대체로 잘 구해주기 때문이다. 더 바랄 게 없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12-113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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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28. 23:00


POST : Entre paréntesis

제빵사들(Los pasteleros)


빵 먹고 싶다...


제빵사들

블라네스의 제빵사인 내 친구 조안 플라넬스는 자신은 절대 아프지 않고 항상 건강 상태가 좋다고 단언한다. 반쯤은 진지하게 반쯤은 농담으로 그렇게 말하지만, 이렇게 지독한 겨울 동안 내가 아는 사람 중 그가 독감에 걸리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내 직업 때문임이 분명해, 라며 조안은 갑자기 조금 우울해진 채 말한다. 어쩌면 그럴 것이다. 제빵사 조합은 무쇠 같은 건강 상태를 사람들에게 부여해 왔다. 관대하고 헌신적인, 시라노 드 베르쥬락의 조용한 후견인이었던 라게노에 대해 지금 생각해본다. 시인이자 사리아의 제빵사였던 J.V 포쉬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나는 내 편집자를 만날 때면 가끔씩 그의 빵집에 들른다. 게다가 빵집 사리아의 포쉬에는 감탄할 만한 그 시인의 흉상이 있다. 그런 화려한 것을 전시한 빵집은 세계적으로도 얼마 없다. 하지만 이 빵집에서 이상한 점은 여자 종업원들의 행동이다. 그들은 전부 (몇 년 전부터) 포쉬 전집을 읽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모두, 가장 젊은 종업원뿐 아니라 가장 나이 많은 종업원까지 모두, 자신들이 모르는 고객을 기다린다. 말하자면, 자고 있을 때 더 분명하게 보인다고 말하는 그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고객을 빵집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마치 카탈란 어문학 교수나 신비스러운 학술대회의 스탭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된 건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포쉬 빵집에 들를 때면 매번 그들이 나를 성실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데 감명을 받는다는 것이다. 가장 젊은 여자 종업원들은 심정적으로 나를 동정하지만 덜 젊은 종업원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절대 시인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시의 비밀은 말이죠..." 그 순간 텔레파시로 나누는 우리의 대화는 잘리고 만다. 그러고 나서 나는 빵을 먹으면서, 제빵사들의 무쇠 같은 건강 상태에 대해 생각하면서 거리로 간다. 내 친구 조안 플라넬스는 그 비밀이 흥분하지 않고 책을 많이 읽으며 일을 많이 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럼 전혀 슬프지 않아? 나는 그에게 묻는다. 이따금 슬프기도 하지만 항상 행복해. 그가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11-112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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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21. 17:42


POST : Entre paréntesis

여성 독자들의 겨울(El invierno de las lectoras)


당분간 볼라뇨가 쓴 글만 계속 포스팅 할 것 같은 데 제목 옆에 굳이 'by 볼라뇨'를 덧붙일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만 언제 또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올릴지 모르는 일이니까 뭐. 흠흠.

제목은 여성 독자들의 겨울El Invierno De Las Lectoras이다. 영역본에는 겨울의 여성 독자들The Women Readers of Winter이라고 했다. 영역본 제목이 글 내용과 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긴 하지만, 원제 충실의 법칙(응?)에 따라 원제를 쓴다.


여성 독자들의 겨울

겨울엔, 여성들만이 추운 거리에 나타날 만큼의 충분한 용기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블라네스의 바bar나, 기차역이나, 마리티모 빠세오에 길게 늘어앉아 있는 그녀들을 본다. 그녀들은 혼자 있거나 자신의 아이들과 있거나 조용한 친구 몇몇과 함께 있다. 그리고 그들 손엔 항상 책이 들려 있다. 이 여자들은 무슨 책을 보는 걸까? 엔리케 빌라 마타스가 몇 년 전에 물었다. 뭐든 볼 것이다. 항상 좋은 문학은 아니겠지만(근데 좋은 문학이란 게 뭐지?), 가끔 잡지도 볼 것이고, 이따끔씩 최악의 베스트셀러도 볼 것이다. 두껍게 껴입고 차가운 바람에 얼굴이 빨개진 그녀들을 보면서, 나는 혁명을 해낸 러시아 여자들을, 겨울보다 나쁜 스탈린주의와 지옥보다 나쁜 파시즘을 견뎌낸 러시아 여자들을 생각하게 된다. 논리적인 것이 죽임을 당하던 시기에, 그들은 항상 책과 함께 있었다. 사실상 겨울의 이런 여성 독자들 대부분은 자살로서 삶을 마쳤다. 하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며칠 전에
나데쥬다 야코블레브나 만델슈탐을 읽었다. 그녀는 특별한 독자이자, 두 권의 회고록 - 그 중 하나의 제목은 [모든 희망에 저항하며](*한국엔 [회상]이란 제목으로 출간)이다 - 의 저자이면서, 살해당한 시인 오십 만델슈탐의 부인이었다. 가장 최근의 전기에 따르면,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 함께 삼각관계에 빠졌었다. 그 소식은 그녀를 성녀처럼 여기는 그녀의 추종자들에게 놀라움과 실망감을 일으켰다. 하지만 나로선 그 사실을 알게 되어 행복했다. 겨울 동안 나데시다와 오십이 얼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최소한, 그들이 많은 책을 읽으려 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의 성녀 여성 독자들은 뼈와 살이 있는 여자들이었고 대담함이 부족하지 않았다. 물론 몇몇이 자살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몇몇은 공포를 견디고 다시 책을 펼친다. 춥고, 겨울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일 때 여자들이 읽는 미스테리한 책을 펼친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10-111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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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21. 16:11


POST : Entre paréntesis

용감한 사서(El bibliotecario valiente)


보르헤스에 대한 글이다. 이 글을 읽고 나면 보르헤스에 대한 볼라뇨의 빠심이 어느 정도인지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페인어에 대한 이해도 아직 한참 부족한 데다 한글 구사 능력도 많이 딸려서 이상한 문장들이 종종 눈에 띌지도 모르겠다. 맥락 자체가 이해 안 되는 부분도 있었다.

원래 한 문단의 글인데, 가독 편의상 문단을 나눴다. 이번에도 A님과 J님 덕에 그나마 이 정도라도 옮길 수 있었...



용감한 사서


보르헤스는 시인으로 시작했다. 그는 독일 표현주의 문학을 찬미했다. (그는 의무감으로 프랑스어를 배웠고, 우리가 사랑이라 부를 법한 그런 감정으로 독일어를 배웠다. 우리가 중요한 것들을 배울 때 그러하듯, 선생님 없이 혼자서 독일어를 배운 것이다.) 하지만 아마 한스 헨니 얀은 읽지 않았을 것이다. 1920년대 사진들에서 우리는 손발을 떠는 듯한 모습의 슬픈 얼굴을 한 젊은이를 볼 수 있다. 그의 몸은 둥근 것, 보드라운 것을 향하는 듯 각이 없다. 그는 관습적인 우정을 실천했고 거기에 충실했다. 스위스와 마요르카에서 사귄 첫 번째 친구들은, 청년기의 열정, 청년기에 대한 순수한 기억의 열정과 함께 그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그는 운이 좋았다. 칸시노스 아센스를 자주 만났고 영원히 발표되지 않을 스페인의 원고를 발견했다. 하지만 자신의 나라(*아르헨티나)로 돌아가서 운명의 가능성과 마주했다. 그건 자신이 꿈꾸던 나라에서 자신이 꿈꾸던 운명이었다. 아메리카의 무한함 속에서, 그는 용기를 상상했고 자신의 그림자였던 용감한 사람들의 티없이 맑은 고독을 상상했다. 장갑처럼 삶에 꼭 맞는 하루를 상상했다. 그는 운이 좋았다.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리카르도 구이랄데스술 솔라르를 알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가 만났던 대다수의 스페인 지식인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이 틀린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여동생은 스페인 시인과 결혼했다.


아르헨티나 제국 시대였다. 모든 것을 손에 넣은 것 같았을 즈음,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히지 않은 채 스스로를 남반구의 시카고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남반구의 시카고는 자기 자신만의 칼 샌드버그(물론, 그가 찬미하는 시인)를 가졌다. 로베르트 아를트였다. 그 시절 둘은 가까이 지냈고, 영원히 헤어져버렸다. 하지만 그 이후 둘 중 한 명은 현기증 속으로 가라앉았고 다른 한 명은 어휘를 찾아 가라앉았다. 아를트의 현기증으로부터, 자신의 정신착란적인 상태 속에서, 유토피아는 탄생했다. 그것은 슬픈 권총 살인범들 ㅡ 그들은 오랜 시간 그들의 대륙과 공화국 주위를 맴돌았던 공포를 예감했다의 이야기였다. 에르네스토 사바토의 [파괴자 아바똔]과 같은 방식이었다. 그와 반대로, 어휘를 찾아 나섰던 보르헤스는 인내했고, 문학의 행복 속에서 겸손한 확신을 가졌다.


보데오와 플로리다는 양쪽 그룹의 대명사였다. 첫 번째는 서민적인 동네로 인식되었고 두 번째는 중심적인 거리가 되었다. 지금은 양쪽 동네 모두 망각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아를트와 곰브로비치다. 보르헤스는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남아 있지 않는 그들의 대화는 지금 거대한 공허로 남아 있다. 이것 역시 우리 문학의 일부이다. 물론 아를트는 젊어서 죽었다. 상실로 가득하고 동요 많은 인생을 보낸 뒤였다. 아를트는 기본적으로 산문 작가였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아니었다. 보르헤스는 시인이었다. 굉장히 좋은 시인. 에세이도 썼다. 그리고 서른 살에 접어들어서야 소설을 쓸 수 있었다. 스페인어권에서 위대한 시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네루다가 있었지만 보르헤스는 거의 좋아하지 않았다. 세사르 바예호의 그림자도 드리우고 있었지만 보르헤스는 읽지 않았다. 비센트 우이도브로도 있었다. 보르헤스와 친구였지만 이후 보르헤스의 처남이 되면서 적이 되었다. 올리베리오 히론도도 있었지만 보르헤스는 항상 표면적으로만 그를 대했다. 이제는 가르시아 로르카의 차례. 보르헤스는 그를 직업적인 안달루시아인이라고 말했다. 후안 라몬에 대해선 웃기만 했고, 루이스 세르누다에 대해선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사실상 네루다밖에 없었다. 휘트먼이 있었고, 네루다가 있었으며, 서사시가 있었다. 서사시는 그가 사랑이라 믿었던 것이고 많이 사랑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고통의 이면뿐인 서사시가 담긴 이야기였고, 아이러니와 유머가 담긴 이야기였다. 이전에 서사시가 차지하고 있던 장소에서 표류하고 있는, 인류의 노력이 담긴 이야기였다. 그 책은 그의 친구이자 선생님인 알폰소 레예스가 쓴 [현실과 상상의 초상화]에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멕시코의 책을 통해 알게 된, 그리고 보르헤스와 레예스가 모두 좋아하는, 마르셀 슈봅의 [상상의 생명]에도 빚을 지고 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보르헤스가 이미 유명해졌을 때, 그리고 맹인이 됐을 때, 그는 멕시코시티에 있는 레예스의 서재를 방문했다. 그곳은 공식적으로 "알폰소의 예배당"이라 불리고 있었다. 거기서 보르헤스는, 만약 레오폴도 루고네스의 집을 "레오폴도의 예배당"이라고 부른다면 아르헨티나인들이 얼마나 허튼소리를 하고 있는 거겠냐는 코멘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영어본으로 [돈 키호테]를 처음 읽었고, 그 후에 그보다 더 좋은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돈 키호테]에 대한 가장 확실한 내용을 잊고 있다. 그것은 미겔 데 우나무노가 쓴 것도 아니고, 유감스러운 라미로 데 마에추처럼 우나무노를 따르는 비듬 투성이의 군중이 쓴 것도 아니다. 바로 보르헤스가 쓴 것이다. 해적들과 다른 불한당들에 대한 책을 쓴 뒤, 그는 두 권의 단편집을 썼다. 20세기에 스페인어로 쓰인 단편집 중 아마도 최고의 두 권일 것이다. 첫 번째 책은 1941년에 나왔고 두 번째 책은 1949년에 나왔다. 그 순간부터 우리 문학은 영원히 바뀌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꽤 기억할 만한 시집들도 썼다. 비록 환상적인 이야기꾼으로서 영예와 엄청나게 많은 뮤즈들 사이에서 주목 받지 못한 채 지나가버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함은 그의 장점이다. 명확한 글쓰기나, 휘트먼에 대한 아마도 여전히 독창적인 독해, 역사가 있는 독백과 대화, 영어 운율에 대한 정직한 접근과 같은. 그는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문학에 대한 강의를 우리에게 해주었다. 모두들 이해한다고 믿고 있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유머에 대한 강의 또한. 인생의 마지막 날, 그는 용서를 빌었으며 자신은 여행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용기와 지성을 찬미했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289-291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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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7. 16:48


POST : Entre paréntesis

세비야가 날 죽인다(Sevilla me mata)


실로 오랜만의 포스팅. 같이 스터디 하는 아르마니임과 장 님의 도움이 컸다. 그렇다고 한국어로 정확하게 옮겼다는 말은 아니고...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에는 호르헤 볼피가 쓴 "볼라뇨 전염병"이라는 글이 있다. 거기에 "세비야가 날 죽인다"라는 강연문이 잠깐 언급되는데, 그래서 호르헤 볼피가 볼라뇨의 강연을 직접 들었다고 착각했다. 사실 호르헤 볼피는 콜로비아 보고타 도서전을 기념해 2007년에 개최된 39세 이하 젊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 모임에 참가한 것이었다.

이 글이 글에 의하면, 2003년 6월(볼라뇨가 죽기 불과 한 달 전), 세이스 바랄 출판사에서 조직한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모임이 세비야에서 개최되었고, 볼라뇨가 초청되었다. 애초 볼라뇨는 아래 강연문을 읽으려 했으나 함께 발표하는 열두 명의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시니컬한) 이 글을 읽을 수 없었고, 그래서 대신 2002년 11월 어느 강연에서 발표한 "크툴루 신화"라는 글을 읽었다고 한다. (그럼 아래 글은 사람들 앞에서 읽힌 적이 없다는 말인가?) 어쨌거나, 읽혔다는 걸 가정하여 구어체로 옮겼다. 



SEVILLA ME MATA


1. 제목. 기본적으로, 주제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게 없다면 내 강연 주제는 "새로운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어디에서 오는가"로 불려야 할 것입니다. 이 주제에 충실히 따르면 내 답변은 3분을 넘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중산층 가족이나 어느 정도 안정된 프롤레타리아 가족 출신입니다. 총격전이 벌어지기보다는 존경 받기를 바라는, 이선에 있는 마약거래상의 가족 출신이기도 하지요. 중요한 것은 존경심입니다. 페레 힘페레르는 이미 이렇게 썼어요. 옛날에 작가들은 고위 계층이나 귀족 출신이었고, 문학을 선택함으로써 - 최소한 4,5년이나 인생 전부를 보낼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견디면서 - 사회적인 추문에 휩싸이고, 학습된 가치에 대한 파괴를 일삼으며, 끊임없은 비판과 야유를 받게 된다고 말이죠. 반대로 오늘날,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작가들은 하층 계급이나 프롤레타리아 계열 출신이고 그들이 바라는 것은 결국 살면서 존경심을 받는 겁니다. 즉, 오늘날 작가들은 알려지기를 원해요. 동료 작가들에게 알려지는 게 아니라, "정치적인 권위"라 불리곤 하는 권력의 횡령자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죠. 어떤 시대에든 (젊은 작가들에게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것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졌고, 그것은 결국 출판사를 행복하게 하고 작가들은 더욱 더 행복하게 하는 책 판매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작가들은 어린 시절부터 살아가는 것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자신의 부모님들이 하루에 여덟 시간, 아홉 시간, 열 시간 동안 얼마나 어렵게 일하는지도 알고 있었죠. 이건 직업이이 있을 때예요. 하루에 열 시간 일하는 것보다 더 안 좋은 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예요. 그리고 미궁 속에서 직업을 구하느라 (물론 돈이 들죠) 시간을 질질 끄는 겁니다. 그보다 더 안 좋은 건, 라틴아메리카의 지독한 십자 퍼즐을 푸느라 시간을 보내는 거죠. 그래서 말해지곤 하는 것처럼, 젊은 작가들은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고 판매를 위해 육체와 영혼을 바칩니다. 어떤 작가들은 몸을 더 사용하고 어떤 작가들은 영혼을 더 사용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판매를 위해서 다루는 거예요. 그럼 무엇을 팔지 않을까요? 그걸 고려해보는 건 중요하죠. 분열/혼란은 팔지 않아요. 눈을 뜬 채 바닥까지 가라앉아 글 쓰는 것도 팔지 않아요. 예를 들어,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는 팔지 않죠. 마세도니오는 보르헤스의 훌륭한 선생님 세 분 중 한 명일지도 모르는데(그리고 보르헤스는 우리들 정전의 중심이거나 중심임에 틀림없죠) 아무도 신경 안 써요. 모두들 마세도니오를 읽어야 한다고는 하지만 그를 팔지는 않죠. 그러면 우린 그를 잊게 됩니다. 만약 오스발도 람보르기니를 팔지 않는다면, 그도 결국엔 잊혀질 거예요. 후안 로돌포 윌콕은 아르헨티나에서만 알려졌죠. 오직 소수의 행복한 독자들에게만. 그러니 결국 윌콕 또한 잊혀질 겁니다. 새로운 라틴아메라카 문학이 어디에서 오냐고요? 대답은 정말 간단합니다. 그건 공포로부터 옵니다. 파세오 아우마다(*칠레, 산티아고에 위치한 거리)에서 싸구려 잡동사니를 파는 일에 대한 공포,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형태의) 끔찍한 공포로부터 오는 겁니다. 존경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도 오지만, 그건 단지 공포를 감추고 있는 것뿐이에요. 이해가 잘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마치 뉴욕 마피아 영화에 출연해 존경심에 대해 몇 마디 내뱉는 엑스트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는 삼십 대, 사십 대, 아니면 오십 대 중 하나의 안쓰러운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고도란, 노벨상이나 룰포상, 세르반테스상, 아스투리아스상, 로물로 가예고스상을 뜻합니다.


2. 강연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내가 방금 했던 말들을 나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농담이었거든요. 어쩔 수없이 쓰거나 말한 거예요. 내 인생 지금과 같은 위치에서, 더이상 터무니없는 적들을 바라지는 않아요. 당신들에게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해 가르쳐주고 싶어서 여기에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농담이었어요. 사실은 당신들 보면 부러워 죽겠어요. 당신들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젊은 작가들 말입니다. 당신들에겐 미래가 있죠. 그건 내가 보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사실이 아니에요. 농담이었습니다. 그런 미래는 완전히 잿빛이에요. 카스트로 독재나 스트로스네르 독재, 피노체트 독재처럼 말입니다. 우리 대륙에서 계속적으로 이어졌던 수많은 부패한 정부들처럼 말입니다. 아무도 나와 싸우려고 덤벼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의료 처방전에 따라 싸울 수가 없거든요. 사실, 난 이 강연이 끝나면 내 방구석에 처박혀서 포르노 영화나 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카르투하 섬(*세비야, 과달키비르 강에 있는 섬)에 방문하기를 바랍니까? 장난하지 말라 그래요. 플라멩코 무대를 보러 가길 바라는 거예요? 나에 대해 또다시 오해를 했군요. 난 그저 멕시코나 칠레나 아르헨티나의 로데오를 보고 싶을 뿐이에요. 일단 거기 가서, 신선한 똥이랑 칠레 국화의 냄새 속에서 잠들고 싶고 꿈꾸고 싶습니다. 


3. 강연은 땅바닥 위에 단단히 고정돼 있어야 합니다. 이건 사실이에요. 우리는 땅바닥에 발을 딛고 서야 합니다. 여기 초청된 작가들 중 일부는 내 친구들이겠죠. 그들에겐, 내게 정중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나머지는 잘 몰라요. 하지만 몇몇은 읽어본 적이 있어요. 그리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참고할 만한 좋은 자료가 있고요. 물론 편의상 새로운 라틴아메리카 문학이라 불리는 것의 실체를 이해하려면 여기에 모인 작가들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을 언급하는 게 맞는 일일 겁니다. 굉장히 어렵고, 더할 나위 없이 급진적인 작가부터 시작해볼까요. 다니엘 사다입니다. 그 다음엔 이런 작가들의 이름을 호명해야 합니다. 세사르 아이라, 후안 비요로, 알란 파울스, 로드리고 레이 로사, 입센 마르티네스, 카르멘 보우요사. 굉장히 젊은 작가인 안토니오 운가르, 칠레 작가 곤살로 콘트레라스, 페드로 레메벨, 하이메 코예르, 알베르토 푸겟, 마리아 모레노(*못 찾겠다;;), 마리오 베야틴. 이들은 운이 좋든, 운이 없든, 멕시코인들에겐 멕시코인으로, 페루인들에겐 페루인으로 간주되죠. 이런 식으로 몇 분 더 계속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다리 위에서 강을 보면 작가들의 파노라마가 가능할 수도 있어요. 그 강은 굉장히 넓고 수량이 많은 강입니다. 거기에서 오십 살 이하, 사십 살 이하, 삼십 살 이하의, 최소한 스물다섯 명의 작가 얼굴들이 물 위에서 나타날 겁니다.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익사하지 않고 살아남을까요? 난 전부 익사할 거라고 믿습니다.


4. 유산. 우리 부모들, 또는 우리 부모라고 추정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보물은 형편없습니다. 사실상 우리들은 소아성애자의 맨션에 납치된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예요. 당신들 중 몇몇은, 그래도 소아성애자가 살인자보다는 더 자비롭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소아성애자가 좀 더 낫죠. 하지만 우리들의 소아성애자는 또한 살인자이기도 합니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311-314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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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9. 2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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