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 Bolaño!

POST : Etcétera

댄스 카드 (CARNET DE BAILE)


<서울생활>이라는 곳에도 싣게 됐다.


http://seoulbal.com/2013/11/07/%EB%8C%84%EC%8A%A4-%EC%B9%B4%EB%93%9Ccarnet-de-baile-%EB%A1%9C%EB%B2%A0%EB%A5%B4%ED%86%A0-%EB%B3%BC%EB%9D%BC%EB%87%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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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네루다을 읽어주었다. 킬페에서, 카우케네스에서, 로스앤젤레스에서. 2. 단 한 권의 책이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곡의 절망적인 노래』, 에디토리날 로사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1961. 속표지에 네루다의 데생과 100만부 판매 기념판이라는 일러두기가 있었는데, 1961년에 『스무 편의 시』가 100만부 팔렸다는 걸까 아니면 네루다의 모든 출판물이 100만부 팔렸다는 걸까? 전자일까봐 걱정이다. 비록 두 가지 가능성 모두 심란하긴 마찬가지이지만, 이제 더 이상 실현 가능한 일도 아니다. 3. 책 두 번째 페이지에는 어머니의 이름 – 마리아 빅토리아 알바로스 플로레스 – 이 쓰여 있다. 얼핏 그 이름을 보면, 다른 모든 단서들과는 다르게, 거기에 그 이름을 쓴 사람은 어머니 본인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아버지의 글씨도 아니고, 내가 알 만한 그 누구의 글씨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몇 년에 걸쳐 점차 희미해지는 그 서명을 관찰한 후, 설령 유보적일지언정, 그것을 내 어머니가 썼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4. 1961년, 1962년에 어머니는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고, 서른다섯 살이 안 되었으며,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젊고 활기찼다. 5. 『스무 편의 시』, 나의 『스무 편의 시』는 오랫동안 거리를 떠돌아다녔다. 처음엔 칠레 남부의 여러 마을들, 그러고 나서 멕시코시티의 여러 집들, 그 후 스페인의 세 도시. 6. 그 책은 물론 내 것이 아니었다. 7. 처음엔 어머니 것이었다. 그것을 누나에게 선물로 주었고, 누나가 히로나에서 멕시코로 떠날 때 다시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누나가 남기고 간 책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과학소설들과 그때까지 나온 마니엘 푸이그 전집이었다. 내가 직접 누나에게 선물했던 책이었고, 반복해서 읽었던 책이었다. 7. 네루다는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았다. 더욱이 『스무 편의 사랑의 시』는 아니었다! 8. 1968년에 우리 가족은 멕시코시티로 이주했다. 2년 후인 1970년에 나는 알레한드로 조도르프스키와 만났다. 그는 나에게 명성 있는 예술가의 화신이었다. 나는 어느 극장의 출구에서 그를 찾아냈다. (이셀라 베가와 함께 연출한 버전의 차라투스투라를 보고 나서였다.) 그에게 영화 연출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고, 그때부터 그의 집을 끈질기게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좋은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도로프스키는 나에게 담배를 매주 얼마나 피우는지 물었다. 충분히 피운다고, 오래 전부터 골초였다고 말했다. 조도로프스키는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에조 타카타가 하는 선 명상 수업에 등록하라고 말했다. 알았어요, 내가 말했다. 며칠 동안 에조 타카타와 함께 지냈다. 하지만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9. 선 명상 수업이 한창일 때 에조 타카타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일본인들의 대열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자 그는 나무 몽둥이를 휘두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수업에서 도망가려고 하는 학생들을 두들겨 팰 때 사용하는 바로 그 나무 몽둥이였다. 말하자면, 에조는 그 몽둥이를, 계속 다닐지 말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예스라고 대답하는 학생들을 두들겨 팰 때 사용했던 것이다. 그때 발생하는 소리는 향 연기로 자욱해 희미해진 공간을 가득 채우곤 했다. 10. 하지만 나에게는 그 구타를 피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고성을 지르며 돌발적으로 공격해왔다. 나는 입구 쪽 어떤 여자 옆에 있었고 에조는 그 방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다. 그가 눈을 감고 있으리라 짐작했고 내가 빠져나가는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일본인은 내가 나가는 소리를 들었고 결사적인 태세로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11. 아버지는 아마추어 복싱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그가 불패 신화를 자랑하던 곳은 칠레 남부 지역으로 한정되었다. 나는 권투하는 것을 좋아했던 적이 없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권투를 배웠다. 집에는 항상 권투 글러브가 있었다. 칠레에 있을 때도 그랬고 멕시코에 있을 때도 그랬다. 12. 에조 타카타 선생님이 고함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들 때, 그는 아마 나를 다치게 할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본능적으로 방어할 것이라고 예측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몽둥이 찜질은 대개 제자들의 경직된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나는 근육이 경직된 상태가 아니었다. 단지 그곳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13. 누군가 당신을 공격한다면 당신은 방어하게 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17살 된 사내에겐. 특히 멕시코시티에선. 14. 조도로프스키에 따르면, 그가 에조 타카타에게 멕시코를 소개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타카타가 오악사카 밀림에서, 환각 상태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대부분 북아메리카 사람인 마약중독자들을 찾아다니던 시절이. 15. 그러거나 말거나, 타카타와 함께 한들 나는 담배를 끊을 수 없었다. 16. 조도로프스키가 좋았던 점 중 하나는 그가 칠레 지식인들에 대해 말하면서(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거기에 나를 포함시켰던 점이다. 그 때문에 나는 큰 자부심을 느꼈다. 비록 나에게 그런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눈곱만치도 없었다고 할지언정. 17. 어느 날 오후,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우리는 칠레 시인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니카노르 파라가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말했다. 그러고는 곧장 니카노르의 시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또 다른 니카노르의 시, 그 후 마지막으로 또 다른 니카노르의 시를 암송했다. 조도로프스키는 암송 실력이 좋았지만 그 시들은 나에게 별다른 감명을 주지 않았다. 당시 나는 신경과민의 젊은이였고, 더불어 어리석으면서 거만하기까지 했다. 나는 칠레의 위대한 시인은, 의심의 여지없이, 파블로 네루다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머지는 찌끄레기예요. 토론은 30분 동안 지속되었다. 조도로프스키는 구르디예프나, 크리슈나무르티, 헬레나 블라츠키의 이론에 대해 뽐낸 후, 키르케고르와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그러고 나서 토포르와 아라발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했다. 니카노르가 어딘가로 가던 중에 자신의 집에서 머물렀다고 그가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 말 속에서 치기어린 자부심이 전해졌고 그 다음부턴 작가들 대부분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18. 그가 썼던 글 중 어딘가에서 바타이유는 눈물이 의사소통의 궁극적인 방식이라고 말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범하거나 일반적으로 흘린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눈물이 부드럽게 볼을 타고 흘렀던 게 아니라, 통제되지 않은 것처럼, 분출하는 듯,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와 어느 정도 비슷하게, 모든 것을 물에 잠기게 할 듯 눈물을 흘렸다. 19. 조도로프스키의 집에서 나올 때 내가 더 이상 그의 집에 갈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은 그가 했던 말처럼 나를 슬프게 했으며, 나는 길거리에서도 계속 눈물을 흘렸다. 또한 알게 된 것은, 이것은 아주 애매모호한 방식이었는데, 다시는 그와 같은 다정한 선생을, 하얀 장갑을 낀 도둑을, 완벽한 사기꾼을 만날 수 없으리라는 점이었다. 20. 하지만 내 행동에서 가장 이상했던 점은, 파블로 네루다 대해 내가 했던, 논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참한 옹호 – 어쨌거나 옹호는 옹호였다 – 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내가 읽은 네루다의 작품이라고는 『스무 편의 사랑의 노래』(당시에 이 시집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머러스하게 느껴졌다)와 『황혼Crepusculario』에 수록된 “작별인사Farewell”밖에 없었음에도 말이다. 촌스러움으로 최고 절정에 이른 시였음에도 그 시에 대한 나의 신실함은 무너지지 않았다. 21. 1971년에 바예호와 우이도브로, 마르틴 아단, 보르헤스, 오켄도 데 아마르, 파블로 데 로카, 길베르토 오웬, 로페스 벨라르데, 올리베리오 히론도를 읽었다. 물론 니카노르 파라도 읽었다. 심지어 파블로 네루다도 읽었다! 22. 당시에 친구로 지내던 멕시코 시인들이나, 보헤미안과 함께 지내는 사람들, 독자들은 기본적으로 바예호 빠와 네루다 빠로 나뉘었다. 물론 나는 파라 빠였다. 무덤덤하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23. 하지만 우리는 부모들을 살해해야만 했다. 시인은 천성적으로 고아이기에. 24. 1973년에 칠레로 다시 돌아왔다. 반복적인 입원으로 지연된, 대륙과 해양을 통과하는 긴 여행을 한 후였다. 나는 다양한 모습의 혁명을 목도했다. 머잖아 중앙아메리카를 집어삼킬 격렬한 폭풍은 이제 내 친구들의 시야에도 들어왔다. 그들은 마치 영화에 대해 대화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해 말했다. 25. 나는 1973년 8월에 칠레에 도착했다.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는 일에 참여하고 싶었다. 내가 구입했던 첫 번째 시집은 니카노르 파라의 『두꺼운 작품Obra gruesa』이었다. 두 번째 시집은 『인공장치Artefactos』였는데 이 역시 파라의 작품이었다. 26.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는 즐거움은 한 달도 채 맛보지 못했다. 물론 당시에 나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우직한 파라 빠일 뿐이었다. 27. 어느 학회에 참석해 다양한 칠레 시인들을 보았다. 끔찍했다. 28. 9월 11일에는 내가 살던 동네의 유일한 활동 조직에 자원했다. 조직장은 공산주의 노동자로 약간 통통한 편에 우유부단한 성격이었지만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부인이 더 용감해 보이기도 했다. 우리 모두는 목재 바닥의 자그마한 부엌에 모이곤 했다. 조직장이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부엌 찬장에 놓인 책에 꽂혀 있었다. 많지는 않았는데 대부분 아버지가 읽던 것과 같은 가우초 소설이었다. 29. 9월 11일은 나에게 피가 흘러내리는 광경이면서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30. 나는 텅빈 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암구호를 잊어버렸다. 내 동료들은 열다섯 살이거나 퇴직자거나 실직자였다. 31. 네루다가 죽었을 때 나는 삼촌들, 이모들, 사촌들과 함께 물첸에 있었다. 11월, 로스앤젤리스에서 콘셉시온으로 여행하던 중에 고속도로 단속반이 차를 세우더니 나를 죄수로 체포했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거기서 바로 나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 유치장에서 나는, 경찰서 수감소장이 젊은 경찰관과 창녀의 자식 같은 얼굴을 한 남자와(밀가루 푸대에서 반죽이 된 듯 허여멀건한 얼굴이었다) 콘셉시온 지부장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자신이 멕시코 테러리스트를 잡았다고 말했다. 잠시 후에 말을 고쳤다. 외국인 테러리스트죠. 그는 나의 말투, 미국 달러, 티셔츠와 바지의 브랜드에 대해 언급했다. 32. 내 외증조부모들은 플로레스와 그라냐 가문이었는데, 그들은 부질없이 아라우카니아 지역을 통제해보려 했다(비록 자기 자신을 통제할 능력조차 없었음에도). 그러므로 그들은 절제가 없다는 점에서 네루다주의자였다. 내 할아버지 로버트 알바로스 마르티는 대령이었고 남부의 여러 지역에서 군생활을 했다. 할아버지는 모호한 이유로 때이르게 퇴역하게 되었는데 이 점이 나에게 그가 네루다주의자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부계 혈통은 갈리시아와 카탈루냐 출신인데 비오-비오 지역에 자신들의 삶을 내려놓게 되었고, 그곳의 풍경이나 그들의 근면함을 봤을 때 그들은 네루다주의자였다. 33. 며칠 동안 콘셉시온에 수감되어 있다가 얼마 후 출감하게 되었다. 잔뜩 겁에 질렸던 게 무색하게도 그들은 날 고문하지 않았고, 내 물건을 훔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먹을거리를 거의 주지 않았고, 밤에 덮을 이불도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이 베풀어준 선의에 의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동틀 무렵에 그들이 다른 사람을 고문하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기에 잘 수가 없었다. 읽을 거리도 없었다. 누군가 거기에 놔두고 간 영국 잡지만이 예외였다. 그 잡지에서 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느꼈던 것은, 시인 딜런 토마스의 소유였던 집에 대한 기사였다. 34. 두 명의 형사가 나를 수렁에서 꺼내주었다. 한 명은 로스 앤젤레스의 리세오 데 옴브레스에 있을 때의 전 동료였고, 나머지 한 명은 친구 페르난도 페르난데스였다. 그는 고작 나보다 한 살 많은 스물한 살이었음에도, 그의 냉정한 피가 칠레인들이 절박하고도 공허하게 닮고자 했던 이상적인 영국 신사의 이미지와 비교할 만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5. 1974년 1월에 칠레를 떠났고 절대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36. 나와 같은 세대의 칠레인들은 용감했을까? 그렇다, 그들은 용감했다. 37. 나는 멕시코에서 MIR 당원인 한 여자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녀는 살아 있는 쥐를 질 속에 삽입하는 방식으로 고문을 당했다. 이 여자는 망명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멕시코시티로 떠나왔다. 칠레를 떠났음에도 그녀는 하루하루를 슬픔에 잠겨 보냈고 슬픔의 크기를 견디다 못해 죽고 말았다. 이것이 내가 들은 이야기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녀를 알지 못했다. 38. 이것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이름 없이 박해 받고 탄압 당한 과테말라 동료들에 대해 알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믿기지 않았던 이유는, 이야기가 흔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리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느 날 같은 방식으로 고문을 당한 칠레 여자가 파리에 당도했다. 이 칠레 여자 역시 MIR 당원이었고, 멕시코시티에서 죽은 여자와 같은 나이였으며, 같은 이유로, 그러니까 슬픔을 견디다 못해 죽고 말았다. 39. 시간이 흘러 스톡홀롬의 칠레 여자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젊었고, MIR의 전직 혹은 현직 당원이었으며 1973년 11월에 쥐를 이용한 같은 방식의 고문을 당했다. 그녀 또한 죽음에 이르렀는데, 그녀를 치료하던 의사들이 아연하게도, 그녀는 슬픔 때문에, 우울증 때문에 죽고 만 것이었다. 41. 이 익명의 칠레 여자는, 상습적으로 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여자는, 같은 인물일까 아니면 비록 같은 당원에 아름다움마저 유사하지만 세 명의 다른 여자일까?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같은 여자이고, 바예호의 시 “무더기Masa”에서처럼, 죽으면서 증식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죽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실제로 바예호의 시에서는 죽은 사람은 증식하지 않고, 애원하는 사람들, 죽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증식한다). 42. 소피 포돌스키라는 이름의 벨기에 시인이 있었다. 그녀는 1953년에 태어났고 1974년에 자살했으며 단 한 권의 책을 출판했다. 제목은 『모든 것이 허락되는 나라Le Pays où tout est permis』(몽포콩 리서치 센터, 1972년, 280페이지 필사본). 43. 랭보의 친구였던 제르망 누보(1852-1920)는 인생의 말년을 방랑자처럼 걸인처럼 지냈다. 그는 자신을 위밀리라고 부르고(1910년에 『위밀리 시집』을 출판) 여러 교회의 입구에서 살았다. 44. 모든 것이 가능하다. 모든 시인이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45. 한번은 내가 좋아하는 젊은 칠레 시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어쩌면 “젊은”이 아니라 “현존하는”이라는 어휘를 사용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로드리고 리라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더 이상 현존하는 시인은 아니었는데(하지만 젊은 건 맞다, 우리 모두보다 훨씬 젊다) 왜냐하면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46. 칠레 젊은 시인들의 댄스 커플은 다음과 같다. 기하학적인 네루다 파와 잔인한 우이도브로 파, 유머러스한 미스트랄 파와 겸손한 데 로카 파, 뼈 있는 니카노르 파라 파와 볼 줄 아는 엔리케 린 파. 47. 고백할 게 있다. 나는 배알이 꼴려서 네루다의 자서전을 읽을 수 없다. 어찌나 모순이 넘쳐나던지. 자신의 추한 모습을 감추고 아름답게 보이려고 어찌나 용을 썼던지. 어찌나 아량이라곤 눈곱만치도 없고 유머감각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던지. 48. 이미 지나가버리긴 했지만 내 인생에서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는데 그건 바로 우리 집 복도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보이던 때였다. 히틀러는 복도를 왔다갔다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열린 내 방 문 앞을 지나갈 때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가 악마라고 생각했고(그것 말고 무엇일 수 있겠는가?), 나의 광기가 갈 데까지 갔다고 생각했다. 49. 15일이 지난 후 히틀러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나는 이 다음에 나타날 인물이 스탈린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나타나지 않았다. 50. 내 복도에 등장한 인물은 네루다였다. 그는 히틀러처럼 15일 동안 있지 않았다. 3일만 있었다. 상당히 짧은 시간이었고, 내 우울함이 줄어들고 있다는 징후였다. 51. 그 대신, 네루다는 시끄러웠다. (히틀러가 대양 위를 표류하는 유빙처럼 조용했던 반면) 그는 끊임없이 투덜댔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으며 양손을 쭉 펼치고는 (그 차가운 유럽의) 복도의 공기를 만족스레 들이마셨다. 첫째 밤에 보였던 그의 병든 손짓과 거지 같은 모습은 조금씩 변해가다가 결국, 그 유령은 한껏 멋부리는 듯이, 다르게 말하자면, 예의바르고 위엄 있고 엄숙한 시인의 모습처럼 보였다. 52. 세 번째이자 마지막 밤, 네루다는 내 문 앞을 지나가다 멈춰 서서 나를 보았고(히틀러는 절대 나를 보지 않았다), 이건 엄청나게 이상한 일인데, 나에게 말을 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없어서 손을 움직여 자신의 무력함을 드러낼 뿐이었고 끝내는, 아침 해가 떠오르면서 사라지기 직전, 나에게 미소를 지었다(마치 모든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에게 말하기라도 하듯이?). 53. 오래 전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에서 혁명을 시도하려다가 죽은 아르헨티나의 삼형제를 알고 있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를 배신 했고 곧바로 막내를 배신 했다. 막내는 그 어떤 배신도 저지르지 않은 채, 사람들이 말하기를, 형들의 이름을 외치며 죽었다고 했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죽는 것이 가장 그럴 법한 일이기는 하지만. 54. 스페인 사자의 아들들이지, 선천적 낙관주의자 루벤 다리오가 말했다. 월트 휘트먼, 호세 마르티, 비올레타 파라의 아들들은, 가죽이 벗겨지고 잊혀진 채, 공동 묘지에, 바다 속 깊은 곳에, 그들의 뼈는 트로이인의 운명을 띤 채 뒤섞여 살아남은 자들을 두렵게 한다. 55. 요즘은 그들에 대해 생각한다. 스페인을 방문한 국제 여단의 퇴역 군인들, 주먹을 치켜든 채 버스에서 내리는 귀여운 노인네들을 보면서. 원래는 40,000명에 이르렀으나 현재 스페인으로 돌아온 사람은 350명 남짓에 불과하다. 56. 벨트란 모랄레스에 대해 생각하고, 로드리고 리라에 대해 생각하고, 마리오 산티아고에 대해 생각하고, 레이날도 아레나스에 대해 생각한다. 고문을 받다가 죽은 시인들에 대해 생각하고, 에이즈에 걸리거나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라틴아메리카라는 천국을 꿈꾸다가 라틴아메리카라는 지옥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수치심과 무력함의 구렁텅이에서 좌파들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준 작품들에 대해 생각한다. 57. 공허하고 날카로운 우리들의 얼굴에 대해 생각하고, 이사크 바벨의 잔인한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58. 내가 어른이 되면 시너지 효과를 받는 네루다주의자가 되고 싶다. 59. 잠들기 전에 해보는 질문들. 어째서 네루다는 카프카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네루다는 릴케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네루다는 데 로카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60. 앙리 바르뷔스는 좋아했을까? 모든 것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숄로호프도. 그리고 알베르티도. 그리고 옥타비오 파스도. 연옥으로 함께 여행 가면 좋을 만한 기이한 동료들. 61. 하지만 그는 사랑에 대한 시를 쓰곤 했던 엘뤼아르 역시 좋아했다. 62. 만약 네루다가 코카인 중독자이거나 헤로인 중독자였다면, 만약 그가 1936년에 마드리드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면, 만약 그가 로르카의 연인이고 로르카가 죽은 후 자살해버렸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만약 네루다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물론 실제로 진면목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63. 우리가 <네루다의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자신의 자식들을 집어삼키려는 우골리노가 잠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64.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이! 천진난만하게! 단지 배가 고팠기 때문이고 죽는 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65. 그는 자식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다. 66. 우리는 무릎에 피를 흘리고 허파는 뻥 뚫렸으며 눈물 가득한 눈망울을 한 채, 십자가를 향해, 네루다를 향해 돌아가기라도 하는 걸가? 67. 우리의 이름이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을지라도 그의 이름은 계속해서 빛날 것이고 칠레 문학이라 불리는 망상의 문학 위에서 계속해서 활공을 펼칠 것이다. 68. 그 후 모든 시인들은 교도소나 정신병원이라 불리는 예술 공동체에서 살아가게 되겠지. 69. 우리의 망상의 집, 우리가 함께 살 집.


* 원본 <Putas asesinas>, EDITORIAL ANAGRAMA,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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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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