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 Bolañ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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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뇨 애호 작품들/작가들


"볼라뇨는 2003년 간 부전으로 세상을 뜨기 전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자신이 애호하는 작품들을 밝힌 바 있다. 볼라뇨의 표현대로 <5천 권에 버금가는> 다섯 권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멜빌의 <모비 딕>, 보르헤스 전집, 코르타사르의 <팔방놀이>, 툴의 <저능아들의 동맹>(* <바보들의 결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리스트는 계속된다.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 자크 바셰의 <전쟁의 편지들>, 알프레드 자리의 <위비 전집>, 조르주 페렉의 <인생 사용법>, 프란츠 카프카의 <성>과 <심판>, G. C. 리히텐베르크의 <잠언집>,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 리비우스의 <로마사>, 그리고 파스칼의 <팡세>. 아르헨티나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로드리고 프레산이 말한 그대로, 볼라뇨의 작품에서 유일한 주인공, 그의 책들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문학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는 볼라뇨다. <읽는 것은 언제나 쓰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작가들 사이에서라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법한 볼라뇨의 이 말은,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말이다. 그러나 볼라뇨가 숨을 거둔 바닷가 소도시 블라네스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나갔는지 또한 알 필요가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북쪽으로 60킬로미터쯤 떨어진 그곳에서 볼라뇨는 하찮은 장신구 장사로 밥벌이를 했다. 그리고 밤이면 두꺼운 공책에 하루 장사를 결산한 후, 바닥에 엎드려서 글을 썼다(그는 책상이 없었다). <좋은 글쓰기란 어둠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 줄 아는 것, 허공 속으로 뛰어들 줄 아는 것, 문학이 기본적으로 위험한 소명임을 아는 것이다.> 다시, 볼라뇨의 말이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에서)


"그때 로헬리오가 우리 쪽 술자리로 다가오더니 미하일 불가코프야말로 의심할 여지없는 20세기 최고의 작가라고 말했다. 카탈루냐 친구들 중에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와 [극장 소설](*[극장]으로 번역)을 읽은 사람도 있었지만, 로헬리오는 저명한 소설가가 쓴 다른 작품의 제목을 러시아어로 인용했다. 내 기억으로는 열 권도 넘었던 것 같다." ([전화], 123-124쪽)


"나는 책을 펼쳤다. 후안 카를로스 비달이 번역한 <브루노 슐츠 전집>이었다. 나는 읽으려고 시도했다. 책을 몇 장 넘겨보고 나서 내가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읽기는 했지만 단어들은 이해할 수 없는 갈겨쓴 글자들처럼 지나갔다." ([아메리카의 나치문학], 200쪽)


"논쟁의 여지가 없는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볼라뇨가 '엉터리 작가'라고 깎아내린 이사벨 아옌데의 경우를 들어 보자. 아옌데는 [엘 파이스]와의 인터뷰(2003년 9월 3일)에서 이렇게 반격했다. "저는 심하게 상처받지는 않았어요. 볼라뇨는 모든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했으니까요. 다른 사람에 대해 좋은 말이라고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저는 그가 죽었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불쾌한 신사 분이었죠." 아옌데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한 작가를 '엉터리 작가'라고 부르는 일은 작가로서의 존재 자체ㅡ 완저히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라뇨가 아옌데를 작가로서 공격한 반면에 아옌데는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볼라뇨를 인격적으로 모독했다.

이사벨 아옌데의 단언은 볼라뇨가 훌륭하다고 평가한 작가의 목록(그는 자신이 존경한 작가 조르주 페렉처럼 목록 작성하기를 좋아했다)를 열거하게끔 부추긴다. 보르헤스, 비오이 카사레스, 부스토스 도메크, 실비나 오캄포, 로돌프 윌콕, 코르타사르, 마누엘 푸익, 코피, 니카노르 파라, 엔리케 린, 곤살로 로하스, 호르헤 에드와르즈, 때때로 호세 도노소, 후안 룰포, 세르히오 피톨, 카를로스 몬시바이스, 후안 마르세, 알바로 폼보, 리카르도 피글리아. 뻔한 이름들이지만 안과 밖의 경계가 분명한 하나의 지도를 그려볼 수 있다. 기준은 첫째로 문학에 대한 열정이고, 둘째로, 마틴 에이미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투적인 것과의 전쟁이다.

하지만 볼라뇨가 동 세대 및 젊은 작가에게 바친 폭넓고 탐닉적인 독서를 아마도 더 의미 있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볼라뇨가 1990년대 세대의 스페인어에 나타나는 단절의 의지라 명명한 현상에 부합하는 작가들이다. 면면을 조금 살펴보자. 페르난도 바예호, 세사르 아이라, 알란 파울스, 로드리고 프레산, 로드리고 레이 로사, 후안 비요로, 다니엘 사다, 카르멘 보우요사, 호르헤 볼피, 엔리케 빌라 마타스, 하비에르 마리아스, 페드로 레메벨, 로베르토 브로드스키. 이제는 그림이 더 분명해졌다."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 20-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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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29. 22:59


POST : Etcétera

볼라뇨 포레버!


어쩌자고 이런 어려운 글을...

이 글을 쓴 작가는 아니나 다를까 하비에르 세르카스. 제목만 봐도 딱 알겠네, 누가 볼라뇨 빠돌이 아니랄까봐. (나는 이 시점에서 어찌하여 세르카스를 잔뜩 질투하고 있는 건가...) 어쨌거나 현재 내 수준엔 너무 어려운 문장들이었다. 같이 스페인어 스터디 하는 아르아르 아르마니임 덕분에 그나마 혼자서는 해결 못했던 여러 문장을 해석할 수 있었다. 첫째 문단 말미는 생략... ( -_-)


원문 출처 : http://www.elpais.com/articulo/portada/Bolano/forever/elpepusoceps/20090405elpepspor_2/Tes


유령이 라틴 아케리카 문학판을 떠돌고 있다.
그 유령은 하나의 질문이다. 그 질문은 미국(과 모든 지역)에서 로베르토 볼라뇨의 사후 대성공의 원인은 무엇인가이다. 사람들은 그의 엄청난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정기적으로 들려오는 성공에 관한 소식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가장 최근의 소식으로는 [2666] - 볼라뇨의 유고 작품 - 이 지난 3월 전미 서평가 연맹에서 수여하는 2008년에 출간된 최고로 좋은 소설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평을 받고 진정한 베스트셀러가 된 후에 말이다. 그런 모든 일들은 외국문학에 방어적인 그런 나라에서는 대단히 예외적인 것이다. 유령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론 매우 여러 가지다. 북아메리카에서 볼라뇨가 성공한 원인을 그의 때이른 죽음 때문이라고 읽었다. 그의 주위에 비운의 전설이 이미 만들어졌다는 것 때문이라고도, 정치적 추구나 문학적인 소외나 헤로인 집착의 허구적인 부분 때문이라고도 읽었다. 북아메리카에서 볼라뇨가 성공한 원인을, 볼라뇨가 북아메리카 작가가 되는 어떤 방식, 그러니까 그의 문학적인 모델이 북아메리카인이며 그의 소설은 스페인어보다는 영어에서 더 잘 기능하기 때문이라고도 읽었다. 북아메리카에서 볼라뇨가 성공한 원인을, 볼라뇨를 발견한 북아메리카의 대형 출판사가 그를 북아메리카에서 성공시키기 위해 이런 모든 일들을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도 읽었다. 더 많은 답변을 읽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볼라뇨의 성공 가치를 깎아내리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건 궁극적으로는 중요한 게 아니지만, 볼라뇨의 다른 작품에 대한 가치도 깎아내리기 위해서 고안되었다는, 이건 중요하다, 당혹스러운 감정을 발생시켰다. 고백하자면 난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때이른 죽음을 맞은 작가도 많고 볼라뇨만큼 성공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아마 현재에도 없을 거라는 비운의 그런 전설에 둘러싸인 작가들도 많다. 자신의 문학적인 모델이 북아메리카인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는 북아메리카 작가인 작가들도 많이 있지만 볼라뇨만큼 성공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아마 현재에도 없을 것이다(볼라뇨의 작품이 스페인어보다 영어에서 더 잘 기능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더 잘 설명해주는데 사실 이렇게 이렇게 말하는 건 조금 우스운 일이다). (*네 문장 같은 한 문장 생략)


사실 유령 같은 질문은, 내가 생각하기에, 잘못된 질문이다. 올바른 질문은 아마도 다른 데 있을 것이다. 여러분 모두는 볼라뇨를 이미 읽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읽지 않았다면, 한 번만, 지금까지 했던 말들은 다 없었던 걸로 하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달라. 지금 당장 이 기사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장 가까운 서점으로 달려간다. 진열창을 발로 걷어차 부셔버리고, 볼라뇨의 아무 책이나 집어든다. 책과 진열창에 대해 경건한 마음으로 보상을 하고 다가올 며칠을 볼라뇨의 책을 읽는 데 투자한다. 그러면 다음의 내 올바른 질문에 아마도 동의할 것이다. 볼라뇨는 왜 죽고 나서야 성공했는가가 아니라 왜 살아 있을 때 성공하지 못했는가. 물론, [2666] - 미국과 다른 모든 지역에서 그를 신화화한 유고 작품 - 은 예외적인 소설이지만,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먼 별]과 [아메리카에서의 나치문학]과 다른 단편집들과 현실에 천착하여 위대한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전지전능한 기계가 된 순간부터
그가 쓴 모든, 아니 거의 모든 작품들 역시 특별하다. 그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명예라는 차원에서 그것은 사실 아무 가치가 없다. 읽힌다는는 것으로 볼라뇨는 충분히 위대하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인생 말미에도 소수자의 강한 특권을 향유하기는 했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책들이 그의 수도자 같은 수수한 삶에서 그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때때로, 나를 슬프게 한다. 거짓말이다. 그것은 너무한 현실처럼 보인다. 그러나 단지 나에게만, 때때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사실 볼라뇨는 살면서 절대적인 성공을 알았다. 그것은 유령 같은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며 올바른 질문처럼 보이는 첫 번째 질문 역시 잘못된 질문이라는 의미이다. 모든 진정한 작가는 성공과 실패(혹은 성공과 실패라고 곧잘 부르곤 하는 것)가 신기루라는 것을 안다. 최고의 작가들, 좋은 작가들, 보통의 작가들, 안 좋은 작가들, 최악의 작가들이 그것을 갖고 있다는 것이 증거다. 아니면 다른 식으로도 말할 수 있다. 모든 진정한 작가는 진정한 성공과 실패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시릴 코놀리는 이렇게 썼다. "작가의 진정한 임무는 걸작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을 창조하는 데 성공하는 작가는 극소수이다. 내가 봤을 때 볼라뇨는 그런 작가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비교할 수 없는 글쓰기의 강렬함을 시도했다. 단지 하나의 걸작에서가 아니라 여러 작품들에서. 볼라뇨와 비교하여 더 찬양 받을 만한 성공을 할 수 있는 작가가 없다는 것을 볼라뇨보다 내가 더 잘 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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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25.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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