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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벨기에를 떠도는 방랑자 (Vagabundo en Francia y Bélgica)


이 단편 역시 <서울생활>에 싣게 됐는데, 세 편으로 나눈 것을 하나로 묶고 가독 편의상 한 줄씩 띄움. (그나저나 원제의 "vagabundo"를 링크된 곳 이미지 상에는 "vegabundo"라고 했군.)


1편 / 2편 /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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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가 프랑스에 입성했다. 그는 이곳을 돌아다니고 가진 돈을 탕진하며 5개월을 보낸다. 희생적인 의식, 의미 없는 행동, 피로. 가끔씩 메모는 하지만 글은 거의 쓰지 않는다. 읽기만 한다. 무엇을 읽는가? 프랑스어로 된 경찰 소설. 프랑스어를 잘 모르지만, 그 때문에 소설이 더욱 흥미로워질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지 않아도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챈다. 한편 프랑스는 스페인보다 덜 위험하다. B는 위험 수치가 낮은 지역에 있다고 느낄 필요가 있다. B가 프랑스에 왔을 때 돈이 있었던 이유는, 출판사에서 아직 출간하지 않은 책의 인세를 미리 받았기 때문이다. 받은 돈의 60%를 아들 통장 계좌에 입금하고 나서 그는 프랑스로 떠났다. 프랑스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이유의 전부다. B는 바르셀로나에서 페르피냥 행 열차를 탔다. 30분 동안 페르피냥 역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파악했다. 그러고 나서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고 영국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갔다. 오후가 되어 그는 파리 행 직행 열차를 탔다.


  파리에서 B는 생-자크Saint-Jacques 거리에 있는 작은 호텔에서 숙박한다. 첫째 날엔 룩셈부르크 공원을 방문해서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다. 이후 생-자크 거리를 돌아다니고 저렴한 식당을 찾아내 거기서 식사를 한다.


  둘째 날, 소설 읽기를 끝내고 나서(소설에서 범인은 노인 병원에서 지내는데 그건 루이스 캐롤을 반영한 것 같다) 그는 헌책방을 돌아다닌다. 비외 콜롱비에Vieux Colombier 거리에 있는 헌책방에서 잡지 <루나 파크Luna Park> 2호를 발견한다. 그래픽 디자인(혹은 서기법) 특집 버전이었고, 로베르토 알트만, 프레데릭 발, 롤랑 바르트, 자크 칼론, 칼프리드리히 클라우스, 미르샤 데르미사체, 크리스티안 도트레몽, 피에르 기요타, 브라이옹 기쟁, 앙리 르페브르, 소피 포돌스키의 텍스트와 디자인(텍스트는 디자인이고 디자인 또한 텍스트이다)이 수록되어 있다.


  잡지는 1년에 세 번 나오거나 나왔는데, 마크 다치의 주도로 시작되었고, 브뤼셀에 있는 트랑세디씨옹TRANSédITION 출판사에서 – 앙리 반 주일렌Henry van Zuylen 거리에 사무실이 있거나 있었다 – 59호까지 출간했다. 로베르토 알트만이 유명한 아티스트였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누가 로베르토 알트만을 기억할까? B는 생각한다. 칼프리드리히 클라우스도 마찬가지다. 피에르 기요타는 주목할 만한 소설가였다. 하지만 주목할 만하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B는 기요타처럼 되고 싶었다. 한때, B가 젊은 시절에, 기요타의 작품을 읽던 시절에. 대머리에 힘이 센 기요타. 다락방의 어두운 곳에서 무엇이든 먹을 준비를 하는 기요타. 미르샤 데르미사체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게 없지만, 그녀의 이름은 뭔가를 떠오르게 한다. 아마도 아름다운 여자, 거의 확실하게 우아한 여자라는 점을. 소피 포돌스키는 그와 그의 친구 L이 이미 멕시코 시절부터 소중히 생각하는(심지어 사랑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시인이었다. B와 L이 멕시코에 살 때 그들은 고작 스무 살을 조금 넘긴 나이였다. 롤랑 바르트는, 그렇지, 전 세계 사람들이 롤랑 바르트가 누구인지 안다. 도트레몽에 대해서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게 있다. 아마 예전에 잃어버린 시 선집에서 그의 시를 몇 개 읽었던 것 같다. 브라이옹 기쟁은 버로스의 친구였다. 버로스는 기생에게 컷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앙리 르페브르. B는 르페브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유일하지만 르페브르의 이름은 그 헌책방에서, 마치 어두운 방에서 빛나는 성냥처럼, 밝게 빛난다. 최소한 B는 그런 식으로 느낀다. B로서는 횃불처럼 빛났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두운 방이 아니라 동굴. 하지만 분명한 건 르페브르가, 르페브르라는 이름이, 다른 식으로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짧게 빛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B는 그 잡지를 구입한다. 그리고 파리 거리에서 길을 헤맨다. 길을 헤매면서 몇 날 며칠을 지내려고 갔던 곳이다. 비록 그렇게 헤매는 동안 B에게는 태양빛의 이미지가 떠올랐지만, 잡지 루나 파크가 든 검은 비닐 봉지를 손에 덜렁덜렁 들고 거리를 걸을 때면 그런 이미지는 폐색된다. 마치 그 오래된 잡지(물론 잘 편집되었고, 헌책방에서 쌓인 먼지와 오랜 시간에도 불구하고 거의 새것처럼 보존되었다)가 그런 일식 상태를 야기하고 만들어낸 것처럼. B는 그 일식이 앙리 르페브르라는 것을 안다. 일식은 앙리 르페브르와 문학 사이의 관계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낫겠다. 일식은 르페브르와 글쓰기 사이의 관계다.


  오랜 시간 정처 없이 돌아다닌 후 B는 자신의 호텔로 돌아온다. 기분이 좋다. 휴식을 취한 것 같고 책을 읽고 싶어 한다. 바로 전, 루이 16세 광장의 벤치에서 공연히 르페브르의 그래픽을 해독해보려 했다. 그 문양은 난해해 보인다. 르페브르는 자신의 글자를 마치 풀잎이 흔들리는 것처럼 그린다. 글자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풀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은 목초지, 흩날리는 솔방울. 그것들을 관찰하면서(왜냐하면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것이 그 글자들을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B는 마치 영화에서 본 장면처럼, 청소년기, 남반구에서, 그가 즐거운 마음으로 네잎클로버를 찾아다녔던, 사라진 시골 마을을 떠올린다. 그러고 나서, 이 기억은 어쩌면 진짜 삶이 아니라, 실제로 어느 영화에서 봤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앙리 르페브르의 삶은 단순하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그는 1925년 마스뉘 생-장Masnuy Saint-Jean에서 태어나 1973년 브뤼셀에서 죽었다. 즉, 칠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던 해에 죽은 것이다. B는 1973년을 기억해보려 하지만 무용한 일이다. 그는 너무 많이 걸었고, 비록 쉬었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피곤한 상태이기에,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B는 잠을 잘 수 없어서 뭔가 먹으러 나간다. 옷을 입고(그는 옷을 벗고 있었다. 비록 언제 옷을 벗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머리를 빗고 거리로 나간다. 에콜 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그가 앉은 테이블 옆에는 역시 홀로 식사를 하고 있는 여자가 있다. 그들은 마주보며 웃었고, 함께 밖으로 나온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그녀를 초대한다. 여자는 자연스럽게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말을 하고 B는 마치 커튼을 통해 그녀를 보는 것처럼 그녀를 관찰한다.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만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여자는 중구난방으로 말을 한다. 공원에서 그네를 타는 아이들, 뜨개질을 하는 노인, 구름의 움직임, 그리고 소음 – 물리학자에 의하면, 외부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소음이다. 소음이 없는 세계에서는, 그녀가 말한다, 죽음마저 소리가 없대요. 어느 순간, B는 대화를 계속하고자, 그녀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묻는다. 그녀는 자신이 창녀라고 답한다. 아, 좋네요, B는 말한다. 하지만 그저 말하기 위해 말한 것이다. 실제로는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여자는 결국 잠이 들었고, B는 <루나 파크>를 찾는다. 잡지는 침대 아래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다. 그는 앙리 르페브르를 읽는다. 그는 1925년에 태어나 1973년에 죽었고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시골 마을에서 보냈다. 녹음이 짙은 벨기에의 시골 마을이었다. 이후 그의 아버지가 죽는다. 그의 어머니 줄리아 니스는 그가 18살에 재혼한다. 유쾌한 사람이었던 그의 의붓아버지는 그를 반 고흐라고 부른다. 반 고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당연하게도, 자신의 의붓아들을 놀리기 위해서였다. 르페브르는 독립하기 위해 떠난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함께 지낼 것이다. 그녀가 죽는 1973년 6월까지.


  어머니가 죽고 이삼 일 후 앙리의 시체가 그의 책상 옆에서 발견된다. 죽음의 원인은 약물 과다 복용. B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거리를 주시한다. 르페브르의 죽음 이후 15킬로그램의 원고와 그림이 남았다. 그의 자기작품목록에는 짧은 메모가 남아 있다. “출간할 만한” 텍스트는 별로 없다Trés peu de textes “publiables”. 사실상 르페브르는 생전에 “앙드레 뒤 부셰 시의 위상Phases de la Poésie d’Anderé du Bouchet”이라는 제목의 작업물만을 출간했을 뿐이다. 앙리 드마스뉘Henri Demasnuy라는 필명으로, 1962년 3월, 신테세스Synthèses 190호에. B는 르페브르가 드 마스뉘de Masnuy 생-장 마을에 있는 것을 상상한다. 16살이었던 그를 상상한다. 두 명뿐인 독일 군인들이 독일 군용 트럭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편지를 읽고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한다. 앙리 드마스뉘, 마스니의 앙리. B가 고개를 돌리자 여자가 잡지를 뒤적이고 있다. 나 가야 해요, 그녀가 말한다, 그를 보지 않은 채,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며. 여기 있어도 돼, B가 별 기대 없이 말한다. 여자는 알겠다고도 안 된다고도 말하지 않지만 얼마 후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이틀 동안 B는 파리 거리를 배회하기로 작심한다. 이따금 박물관 입구까지 가기는 하지만 절대 입장하지는 않는다. 어쩔 때는 영화관 입구까지 가서 오랫동안 영화 포스터를 살펴보고는 그대로 가버린다. 뒤적거리던 책을 구입해서는 절대 끝까지 읽지 않는다. 잘 모르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오랜 시간 식후 타임을 즐긴다. 파리가 아니라 시골 마을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담배를 피우고 카모마일 차를 마시는 것 외에는 딱히 할 만한 것도 없으면서.


  어느 날 아침, 두어 시간 자고 나서 B는 브뤼셀 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곳엔 친구가 있다. 그녀는 칠레 망명자 남자와 우간다 출신 여자의 흑인 딸이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는 않기로 한다. 몇 시간 동안 브뤼셀 중심가를 돌아다닌 후 북부 지역을 향해 걸어간다. 호텔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거리에 자그마한 호텔이 나타날 때까지. 호텔 옆에는 메마른 땅을 둘러싼 울타리가 있는데, 그 안에는 쓰레기와 함께 잡초가 자라고 있다. 맞은편에는 폭탄에 맞은 듯한 집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대부분 빈 집이다. 일부는 유리창이 깨져 있고 창닫개는 떨어질 듯 매달려 있다. 마치 바람이 그렇게 해놓은 것처럼. 하지만 이 거리엔 바람이 거의 없잖아, 자신의 방 창으로 밖을 내다보던 B는 생각한다. 또한 생각한다. 차를 한 대 빌려야겠어. 또 다시 생각한다. 운전을 할 줄 모르잖아. 이튿날 그는 친구를 보러 간다. 그녀의 이름은 M이고 현재 혼자 살고 있다. 그녀의 집에서 그녀를 만난다.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있다. 신발은 벗고 있다. 그를 보고는 처음 몇 초 동안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내려 애쓴다.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프랑스어로 말한다. 그녀는 B가 자신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를 쳐다보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는다.


  잠시 망설이다가 B는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스페인어로 말한다. B라고 해. 그제야 M은 그를 기억해내고 미소 짓는다. 비록 그를 보게 되어 즐거워서 짓는 미소가 아니라 복잡함이 담긴 미소이기는 하지만. B의 갑작스러운 출현이 그녀의 계획에는 없었지만, 그가 뜻밖의 즐거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그런 복잡함이 담긴 미소였다. 어쨌거나 그를 집으로 들이고 마실거리를 대접한다. 얼마 동안 그들은 마주 보고 앉아 대화를 나눈다. B가 그녀에게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그녀의 학업에 대해, 벨기에에서의 삶에 대해 묻는다. M은 비껴가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B의 건강이 어떤지, 책은 잘 나가는지, 스페인에서 잘 살고 있는지 묻는 방식으로 질문에 대답한다.


  마침내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있다. M은 그 침묵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스물다섯 즈음으로 키가 크고 날씬하다. 그녀의 눈은 녹색으로 그녀의 아버지의 눈 색깔을 쏙 빼닮았다. 심지어 M의 기미 또한, 아주 눈에 띄는데, 칠레 망명자인 아버지의 기미와 비슷하다. B는 오래 전에 그녀의 아버지와 만났다. 얼마나 오래 전인지는 기억도 나지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 M이 두세 살이거나 그 무렵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간다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학위를 이수하지는 못했다), 친구들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돈 없이 프랑스와 스페인을 여행했다.


  잠시 동안 그는 이 세 명, M의 아버지와 M의 어머니와 두세 살 무렵의 M을 상상한다. 녹색 눈을 하고, 흔들리는 현수교에 에워싸인 그들을. 사실 그녀의 아버지와 아주 친하게 지낸 적은 없어, B는 생각한다. 실제로는 현수교도 없고 흔들리지도 않는다.


  그녀의 집에서 나오기 전에 그는 자신이 머무는 호텔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그날 밤 그는 어떤 여자를 찾으며 브뤼셀 중심가를 걸어다닌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이라고는 유령 같은 사람들, 마치 퇴근 시간이 미뤄진 듯한 관료와 은행 직원들뿐이다. 호텔에 돌아와서는 문을 열어줄 사람을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문지기는 젊고 마른 남자다. B는 그에게 팁을 주고 나서 어두운 계단을 따라 방으로 올라간다.


  이튿날 아침 M의 전화 소리에 잠을 깬다. 아침식사를 함께 하자고 한다. 어디에서? B가 묻는다. 어디서든요, M이 말한다, 제가 그쪽으로 갈 테니 어디든 가요. 옷을 입으면서 B는 르페브르의 어머니인 줄리아 니스를 생각한다. 그녀는 아들의 마지막 텍스트 일부에 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여기에서 살았어, B는 생각한다, 브뤼셀에서, 이 지역의 어떤 집에서 살았어. 갑자기 일진광풍이 그의 머릿속을 가로지르고 그가 기억하고 있는 마을의 집들을 흐릿하게 만든다. 면도를 하고 나서 B는 창문 밖으로 이웃한 건물을 관찰한다. 전부 어제와 같다. 거리를 걷는 중년 여자는, 아마도 B보다 고작 몇 살 정도가 많아 보이는데, 텅 빈 쇼핑 카트를 끌고 있다. 몇 미터 앞에는 개 한 마리가 주둥이를 치켜든 채 멈춰서서 저금통 투입구 같은 째진 눈을 호텔 창문에 고정하고 있는데, 그 창문에서 아마 B가 그 개를 관찰하고 있을 것이다. 전부 어제와 같아, 하얀 셔츠에 검은 재킷과 검은 바지를 입으며 B는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M을 기다리러 호텔 로비로 내려간다.


  이게 뭐라고 생각해? 차에 올라, <루나 파크>에 있는 르페브르의 페이지를 가리키며 B가 M에게 묻는다. 포도송이 같은데요, M이 말한다. 뭐가 쓰여 있는지 알겠어? 아니오, M이 말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르페브르의 글자를 보더니 말한다. 어쩌면,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날 아침, 존재에 대해 말한 사람은, 사실 M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잘못의 연속이었다고, 굉장히 아팠다고 이야기한다(어디가 아팠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뉴욕으로의 여행은 지옥으로의 여행과 유사하다고 털어놓는다. M은 프랑스어가 섞인 스페인어로 이야기를 하고, 그녀의 얼굴은 긴 대화 시간 내내 무표정함을 지속한다. 이따금씩 웃음을 짓기도 한다. 어떤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나, 자신에게 우스꽝스러워 보였던 어떤 것에 대해 강조하기 위해서로군, B는 생각한다.


  둘은 로리앙 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함께 아침식사를 한다. 카페는 노틀담 이마쿨레의 교회 근처에 있고, 교회는 M이 잘 아는 듯한데, 마치 최근에 카톨릭으로 개종한 듯하다. 그 후 그녀는 자연 과학 박물관에 가자고 말한다. 박물관은 레오폴도 공원과 유럽 의회 옆에 있는데, B에게는 그것이 왠지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근데 왜 모순적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전에, M이 한마디 한다. 집에 가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해요. B는 어떤 박물관도 구경하고 싶지 않다. 더군다나 M은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는 것 같다. M에게 그 말을 하자 M은 폭소를 터뜨린다. 약에 취한 사람 같아, M이 말한다.


  M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B는 의자에 앉아 <루나 파크>들 되작거리지만 곧 지루해한다. <루나 파크>와 M의 작은 집이 어울리지 않다고 느낀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려 있는 사진과 그림을 열중해서 보고, 이후 거실에 있는 유일한 책장을 본다. 책장엔 책이 많지 않고, 그나마도 스페인어 책은 별로 없다. 그중에서 M의 아버지의 책을 알아본다. 단언컨대 M은 결코 읽지 않을 책들. 정치 평론 몇 권, 쿠데타의 역사 한 권, 마푸체 부족에 대한 책 한 권. 이 책들을 보며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가벼운 떨림이 동반된다. 부드럽다고도, 또는 메스껍다고도, 혹은 어떤 좋지 않은 것에 대한 징후라고도 할 수 있는 떨림이다. 곧 M이 거실에 나타난다, 아니, 차라리 거실을 통과한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 그녀의 방에서 화장실이 틀림없는 문까지, 어쩌면 옷이 널려 있는 세탁실까지. B는 그녀가 반쯤 입은 상태거나 반쯤 벗은 상태로 거실을 가로지르는 걸 지켜본다. 이 장면에 더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오래된 책들이, B로서는 어떤 신호처럼 느껴진다. 근데 어떤 신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소름 끼치는 신호다.


  아파트에서 나왔을 때 M은 어두운 색 치마와 윗 단추가 몇 개 끌러진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무릎까지 오는 몸에 꽉 들어맞는 치마에, 가슴골이 보이는 블라우스다. 그리고 하이힐을 신어 B보다 최소한 2센티미터는 크다.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M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말하고, 차를 세우지 않은 채 어떤 건물의 정면을 가리킨다. 다섯 블럭 이상을 지나서야 B는 M의 어머니에 대해 이해한다. 그녀는 칠레인 망명자이자 과부이며, M이 가리켰던 건물에 살고 있다. M의 어머니에 대해 묻는 대신, 그가 원했던 대로, 자연 과학 같은 테마의 박물관에 가는 일엔 흥미가 없다고 그녀에게 말한다. 그가 좀 얄미워 보인다. 하지만 그의 저항은 미미하고, 박물관까지 M에게 계속 끌려간다. 갑자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무심한 기운 같은 것이 사라지지는 않다.


  거기서 더욱 놀라운 것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박물관에 도착하자 M은 B에게 입장료를 건넨 후 카페에서 그를 기다린다. 카푸치노 앞에 둔 신문을 읽으며, 우아하면서 동시에 고독해 보이는 자세로 다리를 꼬고 있다. (그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B는 그 모습을 보며 진실하다기보다는 비현실적인 어떤 나이듦을 느낀다. 이후 B는 로비로 들어가 어떤 전시관까지 가는데, 거기엔 물결 모양의 기계가 있다. M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B는 자리에 앉으며 생각한다. 무릎 위에 손을 올린다. 가슴에 미세한 통증이 인다. 담배를 피우고 싶지만 여기서는 피울 수 없다. 통증은 조금씩 더 커진다. B는 눈을 감는다. 기계의 실루엣은 가슴의 통증처럼 계속 움직인다. 이 기계는 기계라기보다는 차라리 이해할 수 없는 조각상 같다. 무를 향해 나아가는, 웃으면서 괴로워하는 인류의 행진 같다.


  박물관의 카페에 돌아왔을 때 M은 계속 다리를 꼬고 앉아 은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으며 신문을 보고 있다. 아마 구직 섹션일 것이다. B가 나타나자 M은 감추듯 신문을 덮는다. 베기네스Bégines 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둘은 함께 식사한다. M은 음식에 입을 거의 대지 않는다. 말도 별로 없다. 그녀가 한 말이라고는 함께 묘지에 가자는 것이다. 나 이 동네 자주 와요, 그녀가 말한다. B는 그녀를 보며 묘지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식당에서 나왔을 때, 묘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M은 대답하지 않는다. 차에 오르고 3분도 안 되어 그녀는 손으로(B가 보기엔 가늘고 우아한 손이다) 뒤 카레벨트Du Karreveld 성, 데몰렌베크Demolenbeek 묘지, 테니스 코트가 있는 스포츠 센터를 가리킨다. B는 웃는다. 그와 반대로 M의 얼굴은 여전히 냉담하게 굳어 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웃고 있을 거야, B는 생각한다.


  오늘 밤엔 뭐할 거예요? 다시 호텔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묻는다. 글쎄, B가 말한다, 책을 읽겠지, 아마도. 잠깐 동안 B는, M이 말하고 싶은 게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날 밤 실제로 B는, 파리에 내팽개치고 오지 않은 소설들 중 하나를 읽으려고 한다. 하지만 몇 페이지 읽고 나서 덮어버리고는 침대 다리 쪽으로 책을 던져버린다. 그는 호텔에서 나온다. 한참 동안 목적지 없이 걷고 나서 유색 인종이 많은 지역에 들어서게 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 깨닫는 순간이고, 그 거리를 걸으면서 스스로에 대해 생각한다. 유색 인종이라는 말은 그가 결코 좋아하는 표현이 아니다. 그럼 어째서 그런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걸까? 흑인, 아시아인, 마그렙인, 이런 말은 괜찮아, 하지만 유색 인종은 아니잖아, 그는 생각한다. 잠시 후 그는 탑리스 바에 들어간다. 카밀레 차를 주문한다. 여자 종업원이 그를 보고 웃는다. 서른 살쯤 된 예쁜 여자로 금발에 키가 크다. B도 그녀를 보고 웃는다. 몸이 좀 안 좋아서요, 그는 웃으며 말한다. 여자가 카모마일 차를 그에게 내민다. 그날 밤 B는 흑인 여자와 잠을 잔다. 그 여자는 잠꼬대를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B가 기억하기로 원래 부드럽고 운율감이 있었지만, 잠꼬대를 하는 동안 걸걸하고 다급한 느낌이다. 마치 (B로서는 알 수 없는) 밤의 어느 순간에 여자의 성대가 변해버린 것 같다. 사실상 그를 깨운 것은 그 목소리다. 그에게는 마치 망치질하는 소리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 여자가 단지 잠꼬대를 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팔꿈치에 머리를 베고 잠시 그녀의 목소리를 듣다가 그녀를 깨워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무슨 꿈 꿨어? 그녀에게 묻는다. 여자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꿈을 꿨다고 대답한다. 죽은 사람들은 평온하지, B는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며 생각한다. 여자는 마치 그의 생각을 곱씹어보는 듯하다가, 세상에 평온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반론한다. 지금 시대에도 없고, 아무튼 아무도 없어요, 여자는 확신에 가득차서 말한다. B는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 대신 잠을 잔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는 혼자다. 아침 식사를 거른다. 방에서 나가지 않고 책을 읽기로 마음먹는다. 청소 담당자가 침대 시트를 갈아줄지 물어보러 올 때까지 책을 읽는다. 로비에 앉아 청소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M에게 전화가 온다. 오늘은 뭐할 거냐고 묻는다. B가 뭐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M이 호텔로 그를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한다.


  그날, B가 짐작한 것처럼, 그들은 다른 박물관에 들렀다가 어느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다. 식당 옆에는 공원이 있는데 거기서 아이들과 청소년들 여럿이 모여 신나게 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여기에 얼마나 있을 거예요? M이 묻는다. 내일 떠날 생각이라고 B는 대답한다. 마스뉘 생-장으로 갈 거야, M이 어디로 갈지 묻기도 전에 그가 말한다. M은 그 지역이 벨기에의 어디쯤에 있는지 아는 바가 없다. 나도 몰라, B가 말한다. 많이 멀지 않으면 제가 차로 태워드릴 수도 있어요, M이 말한다. 거기에 친구는 좀 있어요? B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결국 그들은 호텔 문 앞에서 헤어지고, B는 약국이 보일 때까지 거리를 걷는다. 콘돔을 구입한다. 그러고 나서 전날 밤에 갔던 탑리스 바로 향하지만(그리고 도중에 여러 차례 길을 잃는다) 발견하지 못한다. 이튿날 도로가에 있는 식당에서 M과 아침 식사를 한다. M은 드문드문 그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녀는 슬플 때면, 차에 올라, 목적지를 명확하게 정해두지 않고 운전하기 시작한다. 단지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한 번은, 그녀가 말한다, 브레멘에 도착했는데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독일에 있다는 것만 알았죠. 아침에 브뤼셀에서 출발했다는 것만 알았어요. 그리고 이미 밤이었죠. 그래서 어떻게 했어? 대답을 추측하며 B가 묻는다. 몇 바퀴 돌다가 돌아갔죠, M이 말한다.


  마스뉘 생-장에서 그들은 암소들을 본다. 나무들. 휴경 중인 밭. 석면 시멘트로 된 헛간. 삼 층짜리 집들. B의 요청으로 M은 야채와 우편엽서를 팔고 있는 노파에게 줄리아 니스의 집이 어디인지 묻는다. 노파는 어깨를 으쓱한다. 하지만 그 후 웃음을 터뜨리더니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B는 그 이야기를 차창을 통해 듣는다. M과 노파 둘 다 손으로 제스처를 한다. 마치 시간이나 비에 대해 말하는 것 같군, B는 생각한다. 줄리아 니스의 집은 콜롱비에 거리에 있다. 넓고 손질이 안 된 정원과, 주차용으로 바뀐 캐노피가 있다. 집 벽은 노란 색이다. 오랫동안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 잎이 무성해진 나무들이 집의 왼쪽 절반을 어둡게 하고 있다. 그쪽엔 창문이 없다. 노파가 머리가 이상한 것 같아, M이 말한다, 이 집일 수도 있지만 다른 집일 수도 있어. B가 벨을 누른다. 집 안쪽에서 종소리 같은 것이 울린다. 잠시 후 15세 정도의 소녀가 나온다. 청바지를 입고 있고 머리는 젖은 상태다. M이 그녀에게, 여기에 줄리아 니스와 그의 아들 앙리가 사는 곳인지 묻는다. 소녀는 여기엔 마르토 씨네가 산다고 말한다. 언제부터? B가 묻는다. 오래 전부터요. 소녀가 말한다. 머리 감고 있었어? M이 묻는다. 염색하고 있었어요. 소녀가 말한다. B가 이해할 수 없는 짤막한 대화가 이어지고, 그러나 어느 순간, 울타리 쪽에서 하이힐을 신고 있는 M과, 맞은편에서 스키니진을 입고 있는 소녀가 어떤 그림의 주요 인물과 유사하게 보인다. 처음엔 평화롭고 조화로운 모습을 보였으나, 이후 그들은 그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야기한다. 시간이 더 흐르고, 북쪽에서 남쪽 마을, 남쪽에서 북쪽 마을을 돌아다닌 후 그들은 도서관처럼 보이는 곳에 들어간다. 여기에 마스니의 앙리가 책을 보러 왔을까? 불가능한 것 같은데. 도서관은 새로 만들어졌고 앙리 르페브르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있었던 도서관의 사용자임이 틀림없었다. 당신의 그 앙리와 지금 도서관 사이에 최소한 도서관이 두 개 더 있었어요, M이 말한다. 자기 나라의 공공 시설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보인다. 저녁으로 B는 비프스테이크를 먹고 M은 샐러드를 먹지만 절반 정도를 남긴다. 나는 아저씨 친구가 죽었을 땐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M이 향수 어린 말투로 말한다. 친구는 아니었어, B가 말한다. 하지만 태어나긴 했잖아요, M이 농담조로 부드럽게 웃으며 말한다. 그가 죽었을 때 나는 여행하고 있었어, B가 말한다.


  그 후, 그들이 식사하고 있는 식당은 텅 비어 창문 옆에 있는 테이블에 그들 둘만이 남아 있다. M은 <루나 파크> 2호를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멈춘다. 그 페이지엔 루나 파크 3호인지 4호인지(4호가 빛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에 실릴 작업물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미래의 필자들 목록을 큰 목소리로 읽는다. 장-자크 아브라함스, 피에르트 베르소, 실바노 뷔소티, 윌리암 버로스, 존 케이지에서, 앙리 르페브르, 줄리아 니스와 소피 포돌스키에 이를 때까지. 전부 굉장히 친해진 것 같아요, M이 농담조로 웃으면서 말한다.


  모두 죽은 사람들이군, B가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M이 더 이상 자주 웃지 않는 것이 어찌나 아쉬운지.


  넌 웃는 게 아주 예뻐, 그가 말한다. M이 그의 눈을 본다. 지금 저한테 작업거시는 거예요?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있나, B가 중얼거린다.


  좀 더 시간이 기울어 그들은 식당에서 나와 차로 돌아간다. 이제 어디로 가요? M이 묻는다. 브뤼셀로 가야지, B가 말한다. M은 잠깐 생각하더니 그건 좋은 생각 같지 않다고 말하지만 결국 시동을 켠다. 여기선 이제 더 이상 할 게 없잖아, B가 말한다. 이 말은 돌아가는 여정 내내 그를 따라다닌다. 마치 유령 같은 자동차에서 나오는 헤드라이트처럼.


  브뤼셀에 도착하자 B는 그날 아침에 나왔던 호텔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한다. M에게 그것은 바보 같은 일로 보이는데, 자신의 집에 침대 형 소파가 있음에도 고작 몇 시간을 보내려고 돈을 쓸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M의 집 옆에 정차시킨 채, 잠시 동안 그들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대화를 나눈다. 결국 B는 그녀의 집에서 밤을 보내는 데 동의한다. 이튿날 아침 집에서 일찍 나와, 파리로 가는 첫 번째 열차를 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브라질 출신 부부가 운영하는 채식 전용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새벽 세 시에 문을 닫는 식당이다. 그들은 다시 한 번 가게에서 마지막으로 나가는 손님이 된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 M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말한다. 잠깐 동안 B는 M이 자신의 전 생애를 분석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확실한 것은 아니다. M은 자신의 청소년기에 대해, 뉴욕에 드나들었던 일에 대해, 불면의 나날에 대해 말한다. 자신의 연인들이나 이전에 했던 일이나 광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M은 와인을 마시고 B는 이따금 담배를 피운다. 그들은 가끔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차창을 통해 차가 오고가는 것을 쳐다본다. 집에 도착해 M은 B가 침대 형 소파를 펴는 것을 도와주고 나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B는 옷을 벗지 않은 채 마치 다른 행성의 언어로 쓰인 듯한 소설을 읽다가 까무룩 잠이 든다. 그를 깨운 것은 M의 목소리다. 전날 밤의 그 창녀 목소리 같군, B는 생각한다, 잠꼬대를 하던 그 여자. 하지만 일어나서 M의 방으로 가 그녀의 악몽을 깨우고자 하는 의지를 모으기도 전에 그는 다시 잠에 빠진다.


  다음날 아침 그는 파리 행 열차를 탄다.

 

  생-자크 거리에 있는 호텔의 이전과 다른 방에 짐을 푼다. 초반 며칠 동안 그는 안드레 뒤 부셰의 어떤 책이라도 구해보고자 헌책방을 돌아다닌다. 어떤 책도 찾을 수 없다. 뒤 부셰는, 마스뉘의 앙리와 마찬가지로, 지도에서 사라졌다. 넷째 날에는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방으로 음식을 올려달라고 하지만 거의 먹지 않는다. 구입한 마지막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휴지통에 집어던진다. 잠을 자고 악몽을 꾸지만, 잠에서 깬 후 잠꼬대를 하지는 않았다고 확신한다. 다음 날 오랫동안 샤워를 하고 나서, 룩셈부르크 공원에 산책하러 나간다. 지하철을 타고 피갈레Pigalle에서 내린다. 라 브뤼예르La Bruyère 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바랭Navarin 거리의 작은 호텔에서 창녀와 잠을 잔다. 그녀는 목덜미 쪽은 머리칼이 아주 짧지만 머리 위쪽은 아주 길다. 그녀는 자신이 4층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엘리베이터는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녀나 그녀의 친구들이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방이 하나 있을 뿐이다.


  섹스를 하면서 여자는 농담을 던진다. B가 웃는다. 그 또한, 엉망진창의 프랑스어로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농담을 건넨다. 볼일이 끝나고 여자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B에게 샤워를 하고 싶은지 묻는다. B는 아니라고, 아침에 이미 샤워를 했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담배를 피우고 그녀가 어떻게 샤워하는지 보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간다.


  놀랄 것도 없이(최소한 그것을 엿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가 어떻게 가발을 벗어 좌변기 뚜껑에 올려두는지 목격한다. 그녀는 거의 빡빡머리였고, 숱이 많은 쪽 두피 위에 상대적으로 최근에 난 상처 두 개가 두드러진다. B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어쩌다 난 상처냐고 그녀에게 묻는다. 여자는 샤워를 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말을 듣지 못한다. B는 질문을 반복하지 않는다. 화장실에서 나가지도 않는다. 의외로, 타일 바닥에 드러누워 샤워 커튼 반대편에서 나오는 수증기를 바라본다. 평화로우면서도 체념한 상태로. 더 이상 가발도, 좌변기도, 담배를 들고 있는 자신의 손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밖으로 나오자 밤이었고 그들은 헤어진다. 이후 그는 걷기로 마음먹는다. 서두르지 않지만 결코 멈추지도 않는다. 몽마르트르Montmartre 묘지에서 퐁 루아얄까지Pont Royal, 왠지 모르게 친숙하다는 느낌을 받는 길을 걷는다. 호텔에 도착해서 그는 거울을 본다. 두들겨 맞은 개를 보길 바랐지만 그가 본 것은 깡마르고, 산책으로 살짝 땀에 젖은 모습의 중년 남자이다. 그는 시시때때로 자신의 눈을 찾고, 만나고, 피한다. 이튿날 아침 브뤼셀에 있는 M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가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도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전화를 받는다. 나야, B가 말한다. 잘 지내요? M이 묻는다. 괜찮아, B가 말한다. 앙리 르페브르는 만났어요? M이 묻는다. 아직 자고 있었던 게 틀림없군, B가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말한다. 아니. M이 웃는다. 그녀의 웃음은 예쁘다. 왜 그렇게 그 사람을 신경 써요? 웃음을 그치지 않은 채 묻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사람한테 신경을 안 쓰거든, B가 말한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곧장 그는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해. 그리고 생각한다. M은 전화를 끊을 거야. 그는 이를 꽉 깨문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의 얼굴에 경련을 일어난다. 하지만 M은 전화를 끊지 않는다.(끝)



* 원본 <Putas asesinas>, EDITORIAL ANAGRAMA,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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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4. 15:45


POST : Etcétera

댄스 카드 (CARNET DE BAILE)


<서울생활>이라는 곳에도 싣게 됐다.


http://seoulbal.com/2013/11/07/%EB%8C%84%EC%8A%A4-%EC%B9%B4%EB%93%9Ccarnet-de-baile-%EB%A1%9C%EB%B2%A0%EB%A5%B4%ED%86%A0-%EB%B3%BC%EB%9D%BC%EB%87%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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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네루다을 읽어주었다. 킬페에서, 카우케네스에서, 로스앤젤레스에서. 2. 단 한 권의 책이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곡의 절망적인 노래』, 에디토리날 로사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1961. 속표지에 네루다의 데생과 100만부 판매 기념판이라는 일러두기가 있었는데, 1961년에 『스무 편의 시』가 100만부 팔렸다는 걸까 아니면 네루다의 모든 출판물이 100만부 팔렸다는 걸까? 전자일까봐 걱정이다. 비록 두 가지 가능성 모두 심란하긴 마찬가지이지만, 이제 더 이상 실현 가능한 일도 아니다. 3. 책 두 번째 페이지에는 어머니의 이름 – 마리아 빅토리아 알바로스 플로레스 – 이 쓰여 있다. 얼핏 그 이름을 보면, 다른 모든 단서들과는 다르게, 거기에 그 이름을 쓴 사람은 어머니 본인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아버지의 글씨도 아니고, 내가 알 만한 그 누구의 글씨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몇 년에 걸쳐 점차 희미해지는 그 서명을 관찰한 후, 설령 유보적일지언정, 그것을 내 어머니가 썼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4. 1961년, 1962년에 어머니는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고, 서른다섯 살이 안 되었으며,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젊고 활기찼다. 5. 『스무 편의 시』, 나의 『스무 편의 시』는 오랫동안 거리를 떠돌아다녔다. 처음엔 칠레 남부의 여러 마을들, 그러고 나서 멕시코시티의 여러 집들, 그 후 스페인의 세 도시. 6. 그 책은 물론 내 것이 아니었다. 7. 처음엔 어머니 것이었다. 그것을 누나에게 선물로 주었고, 누나가 히로나에서 멕시코로 떠날 때 다시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누나가 남기고 간 책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과학소설들과 그때까지 나온 마니엘 푸이그 전집이었다. 내가 직접 누나에게 선물했던 책이었고, 반복해서 읽었던 책이었다. 7. 네루다는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았다. 더욱이 『스무 편의 사랑의 시』는 아니었다! 8. 1968년에 우리 가족은 멕시코시티로 이주했다. 2년 후인 1970년에 나는 알레한드로 조도르프스키와 만났다. 그는 나에게 명성 있는 예술가의 화신이었다. 나는 어느 극장의 출구에서 그를 찾아냈다. (이셀라 베가와 함께 연출한 버전의 차라투스투라를 보고 나서였다.) 그에게 영화 연출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고, 그때부터 그의 집을 끈질기게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좋은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도로프스키는 나에게 담배를 매주 얼마나 피우는지 물었다. 충분히 피운다고, 오래 전부터 골초였다고 말했다. 조도로프스키는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에조 타카타가 하는 선 명상 수업에 등록하라고 말했다. 알았어요, 내가 말했다. 며칠 동안 에조 타카타와 함께 지냈다. 하지만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9. 선 명상 수업이 한창일 때 에조 타카타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일본인들의 대열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자 그는 나무 몽둥이를 휘두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수업에서 도망가려고 하는 학생들을 두들겨 팰 때 사용하는 바로 그 나무 몽둥이였다. 말하자면, 에조는 그 몽둥이를, 계속 다닐지 말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예스라고 대답하는 학생들을 두들겨 팰 때 사용했던 것이다. 그때 발생하는 소리는 향 연기로 자욱해 희미해진 공간을 가득 채우곤 했다. 10. 하지만 나에게는 그 구타를 피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고성을 지르며 돌발적으로 공격해왔다. 나는 입구 쪽 어떤 여자 옆에 있었고 에조는 그 방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다. 그가 눈을 감고 있으리라 짐작했고 내가 빠져나가는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일본인은 내가 나가는 소리를 들었고 결사적인 태세로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11. 아버지는 아마추어 복싱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그가 불패 신화를 자랑하던 곳은 칠레 남부 지역으로 한정되었다. 나는 권투하는 것을 좋아했던 적이 없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권투를 배웠다. 집에는 항상 권투 글러브가 있었다. 칠레에 있을 때도 그랬고 멕시코에 있을 때도 그랬다. 12. 에조 타카타 선생님이 고함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들 때, 그는 아마 나를 다치게 할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본능적으로 방어할 것이라고 예측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몽둥이 찜질은 대개 제자들의 경직된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나는 근육이 경직된 상태가 아니었다. 단지 그곳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13. 누군가 당신을 공격한다면 당신은 방어하게 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17살 된 사내에겐. 특히 멕시코시티에선. 14. 조도로프스키에 따르면, 그가 에조 타카타에게 멕시코를 소개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타카타가 오악사카 밀림에서, 환각 상태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대부분 북아메리카 사람인 마약중독자들을 찾아다니던 시절이. 15. 그러거나 말거나, 타카타와 함께 한들 나는 담배를 끊을 수 없었다. 16. 조도로프스키가 좋았던 점 중 하나는 그가 칠레 지식인들에 대해 말하면서(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거기에 나를 포함시켰던 점이다. 그 때문에 나는 큰 자부심을 느꼈다. 비록 나에게 그런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눈곱만치도 없었다고 할지언정. 17. 어느 날 오후,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우리는 칠레 시인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니카노르 파라가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말했다. 그러고는 곧장 니카노르의 시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또 다른 니카노르의 시, 그 후 마지막으로 또 다른 니카노르의 시를 암송했다. 조도로프스키는 암송 실력이 좋았지만 그 시들은 나에게 별다른 감명을 주지 않았다. 당시 나는 신경과민의 젊은이였고, 더불어 어리석으면서 거만하기까지 했다. 나는 칠레의 위대한 시인은, 의심의 여지없이, 파블로 네루다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머지는 찌끄레기예요. 토론은 30분 동안 지속되었다. 조도로프스키는 구르디예프나, 크리슈나무르티, 헬레나 블라츠키의 이론에 대해 뽐낸 후, 키르케고르와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그러고 나서 토포르와 아라발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했다. 니카노르가 어딘가로 가던 중에 자신의 집에서 머물렀다고 그가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 말 속에서 치기어린 자부심이 전해졌고 그 다음부턴 작가들 대부분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18. 그가 썼던 글 중 어딘가에서 바타이유는 눈물이 의사소통의 궁극적인 방식이라고 말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범하거나 일반적으로 흘린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눈물이 부드럽게 볼을 타고 흘렀던 게 아니라, 통제되지 않은 것처럼, 분출하는 듯,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와 어느 정도 비슷하게, 모든 것을 물에 잠기게 할 듯 눈물을 흘렸다. 19. 조도로프스키의 집에서 나올 때 내가 더 이상 그의 집에 갈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은 그가 했던 말처럼 나를 슬프게 했으며, 나는 길거리에서도 계속 눈물을 흘렸다. 또한 알게 된 것은, 이것은 아주 애매모호한 방식이었는데, 다시는 그와 같은 다정한 선생을, 하얀 장갑을 낀 도둑을, 완벽한 사기꾼을 만날 수 없으리라는 점이었다. 20. 하지만 내 행동에서 가장 이상했던 점은, 파블로 네루다 대해 내가 했던, 논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참한 옹호 – 어쨌거나 옹호는 옹호였다 – 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내가 읽은 네루다의 작품이라고는 『스무 편의 사랑의 노래』(당시에 이 시집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머러스하게 느껴졌다)와 『황혼Crepusculario』에 수록된 “작별인사Farewell”밖에 없었음에도 말이다. 촌스러움으로 최고 절정에 이른 시였음에도 그 시에 대한 나의 신실함은 무너지지 않았다. 21. 1971년에 바예호와 우이도브로, 마르틴 아단, 보르헤스, 오켄도 데 아마르, 파블로 데 로카, 길베르토 오웬, 로페스 벨라르데, 올리베리오 히론도를 읽었다. 물론 니카노르 파라도 읽었다. 심지어 파블로 네루다도 읽었다! 22. 당시에 친구로 지내던 멕시코 시인들이나, 보헤미안과 함께 지내는 사람들, 독자들은 기본적으로 바예호 빠와 네루다 빠로 나뉘었다. 물론 나는 파라 빠였다. 무덤덤하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23. 하지만 우리는 부모들을 살해해야만 했다. 시인은 천성적으로 고아이기에. 24. 1973년에 칠레로 다시 돌아왔다. 반복적인 입원으로 지연된, 대륙과 해양을 통과하는 긴 여행을 한 후였다. 나는 다양한 모습의 혁명을 목도했다. 머잖아 중앙아메리카를 집어삼킬 격렬한 폭풍은 이제 내 친구들의 시야에도 들어왔다. 그들은 마치 영화에 대해 대화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해 말했다. 25. 나는 1973년 8월에 칠레에 도착했다.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는 일에 참여하고 싶었다. 내가 구입했던 첫 번째 시집은 니카노르 파라의 『두꺼운 작품Obra gruesa』이었다. 두 번째 시집은 『인공장치Artefactos』였는데 이 역시 파라의 작품이었다. 26.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는 즐거움은 한 달도 채 맛보지 못했다. 물론 당시에 나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우직한 파라 빠일 뿐이었다. 27. 어느 학회에 참석해 다양한 칠레 시인들을 보았다. 끔찍했다. 28. 9월 11일에는 내가 살던 동네의 유일한 활동 조직에 자원했다. 조직장은 공산주의 노동자로 약간 통통한 편에 우유부단한 성격이었지만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부인이 더 용감해 보이기도 했다. 우리 모두는 목재 바닥의 자그마한 부엌에 모이곤 했다. 조직장이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부엌 찬장에 놓인 책에 꽂혀 있었다. 많지는 않았는데 대부분 아버지가 읽던 것과 같은 가우초 소설이었다. 29. 9월 11일은 나에게 피가 흘러내리는 광경이면서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30. 나는 텅빈 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암구호를 잊어버렸다. 내 동료들은 열다섯 살이거나 퇴직자거나 실직자였다. 31. 네루다가 죽었을 때 나는 삼촌들, 이모들, 사촌들과 함께 물첸에 있었다. 11월, 로스앤젤리스에서 콘셉시온으로 여행하던 중에 고속도로 단속반이 차를 세우더니 나를 죄수로 체포했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거기서 바로 나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 유치장에서 나는, 경찰서 수감소장이 젊은 경찰관과 창녀의 자식 같은 얼굴을 한 남자와(밀가루 푸대에서 반죽이 된 듯 허여멀건한 얼굴이었다) 콘셉시온 지부장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자신이 멕시코 테러리스트를 잡았다고 말했다. 잠시 후에 말을 고쳤다. 외국인 테러리스트죠. 그는 나의 말투, 미국 달러, 티셔츠와 바지의 브랜드에 대해 언급했다. 32. 내 외증조부모들은 플로레스와 그라냐 가문이었는데, 그들은 부질없이 아라우카니아 지역을 통제해보려 했다(비록 자기 자신을 통제할 능력조차 없었음에도). 그러므로 그들은 절제가 없다는 점에서 네루다주의자였다. 내 할아버지 로버트 알바로스 마르티는 대령이었고 남부의 여러 지역에서 군생활을 했다. 할아버지는 모호한 이유로 때이르게 퇴역하게 되었는데 이 점이 나에게 그가 네루다주의자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부계 혈통은 갈리시아와 카탈루냐 출신인데 비오-비오 지역에 자신들의 삶을 내려놓게 되었고, 그곳의 풍경이나 그들의 근면함을 봤을 때 그들은 네루다주의자였다. 33. 며칠 동안 콘셉시온에 수감되어 있다가 얼마 후 출감하게 되었다. 잔뜩 겁에 질렸던 게 무색하게도 그들은 날 고문하지 않았고, 내 물건을 훔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먹을거리를 거의 주지 않았고, 밤에 덮을 이불도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이 베풀어준 선의에 의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동틀 무렵에 그들이 다른 사람을 고문하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기에 잘 수가 없었다. 읽을 거리도 없었다. 누군가 거기에 놔두고 간 영국 잡지만이 예외였다. 그 잡지에서 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느꼈던 것은, 시인 딜런 토마스의 소유였던 집에 대한 기사였다. 34. 두 명의 형사가 나를 수렁에서 꺼내주었다. 한 명은 로스 앤젤레스의 리세오 데 옴브레스에 있을 때의 전 동료였고, 나머지 한 명은 친구 페르난도 페르난데스였다. 그는 고작 나보다 한 살 많은 스물한 살이었음에도, 그의 냉정한 피가 칠레인들이 절박하고도 공허하게 닮고자 했던 이상적인 영국 신사의 이미지와 비교할 만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5. 1974년 1월에 칠레를 떠났고 절대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36. 나와 같은 세대의 칠레인들은 용감했을까? 그렇다, 그들은 용감했다. 37. 나는 멕시코에서 MIR 당원인 한 여자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녀는 살아 있는 쥐를 질 속에 삽입하는 방식으로 고문을 당했다. 이 여자는 망명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멕시코시티로 떠나왔다. 칠레를 떠났음에도 그녀는 하루하루를 슬픔에 잠겨 보냈고 슬픔의 크기를 견디다 못해 죽고 말았다. 이것이 내가 들은 이야기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녀를 알지 못했다. 38. 이것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이름 없이 박해 받고 탄압 당한 과테말라 동료들에 대해 알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믿기지 않았던 이유는, 이야기가 흔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리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느 날 같은 방식으로 고문을 당한 칠레 여자가 파리에 당도했다. 이 칠레 여자 역시 MIR 당원이었고, 멕시코시티에서 죽은 여자와 같은 나이였으며, 같은 이유로, 그러니까 슬픔을 견디다 못해 죽고 말았다. 39. 시간이 흘러 스톡홀롬의 칠레 여자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젊었고, MIR의 전직 혹은 현직 당원이었으며 1973년 11월에 쥐를 이용한 같은 방식의 고문을 당했다. 그녀 또한 죽음에 이르렀는데, 그녀를 치료하던 의사들이 아연하게도, 그녀는 슬픔 때문에, 우울증 때문에 죽고 만 것이었다. 41. 이 익명의 칠레 여자는, 상습적으로 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여자는, 같은 인물일까 아니면 비록 같은 당원에 아름다움마저 유사하지만 세 명의 다른 여자일까?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같은 여자이고, 바예호의 시 “무더기Masa”에서처럼, 죽으면서 증식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죽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실제로 바예호의 시에서는 죽은 사람은 증식하지 않고, 애원하는 사람들, 죽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증식한다). 42. 소피 포돌스키라는 이름의 벨기에 시인이 있었다. 그녀는 1953년에 태어났고 1974년에 자살했으며 단 한 권의 책을 출판했다. 제목은 『모든 것이 허락되는 나라Le Pays où tout est permis』(몽포콩 리서치 센터, 1972년, 280페이지 필사본). 43. 랭보의 친구였던 제르망 누보(1852-1920)는 인생의 말년을 방랑자처럼 걸인처럼 지냈다. 그는 자신을 위밀리라고 부르고(1910년에 『위밀리 시집』을 출판) 여러 교회의 입구에서 살았다. 44. 모든 것이 가능하다. 모든 시인이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45. 한번은 내가 좋아하는 젊은 칠레 시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어쩌면 “젊은”이 아니라 “현존하는”이라는 어휘를 사용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로드리고 리라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더 이상 현존하는 시인은 아니었는데(하지만 젊은 건 맞다, 우리 모두보다 훨씬 젊다) 왜냐하면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46. 칠레 젊은 시인들의 댄스 커플은 다음과 같다. 기하학적인 네루다 파와 잔인한 우이도브로 파, 유머러스한 미스트랄 파와 겸손한 데 로카 파, 뼈 있는 니카노르 파라 파와 볼 줄 아는 엔리케 린 파. 47. 고백할 게 있다. 나는 배알이 꼴려서 네루다의 자서전을 읽을 수 없다. 어찌나 모순이 넘쳐나던지. 자신의 추한 모습을 감추고 아름답게 보이려고 어찌나 용을 썼던지. 어찌나 아량이라곤 눈곱만치도 없고 유머감각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던지. 48. 이미 지나가버리긴 했지만 내 인생에서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는데 그건 바로 우리 집 복도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보이던 때였다. 히틀러는 복도를 왔다갔다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열린 내 방 문 앞을 지나갈 때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가 악마라고 생각했고(그것 말고 무엇일 수 있겠는가?), 나의 광기가 갈 데까지 갔다고 생각했다. 49. 15일이 지난 후 히틀러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나는 이 다음에 나타날 인물이 스탈린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나타나지 않았다. 50. 내 복도에 등장한 인물은 네루다였다. 그는 히틀러처럼 15일 동안 있지 않았다. 3일만 있었다. 상당히 짧은 시간이었고, 내 우울함이 줄어들고 있다는 징후였다. 51. 그 대신, 네루다는 시끄러웠다. (히틀러가 대양 위를 표류하는 유빙처럼 조용했던 반면) 그는 끊임없이 투덜댔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으며 양손을 쭉 펼치고는 (그 차가운 유럽의) 복도의 공기를 만족스레 들이마셨다. 첫째 밤에 보였던 그의 병든 손짓과 거지 같은 모습은 조금씩 변해가다가 결국, 그 유령은 한껏 멋부리는 듯이, 다르게 말하자면, 예의바르고 위엄 있고 엄숙한 시인의 모습처럼 보였다. 52. 세 번째이자 마지막 밤, 네루다는 내 문 앞을 지나가다 멈춰 서서 나를 보았고(히틀러는 절대 나를 보지 않았다), 이건 엄청나게 이상한 일인데, 나에게 말을 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없어서 손을 움직여 자신의 무력함을 드러낼 뿐이었고 끝내는, 아침 해가 떠오르면서 사라지기 직전, 나에게 미소를 지었다(마치 모든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에게 말하기라도 하듯이?). 53. 오래 전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에서 혁명을 시도하려다가 죽은 아르헨티나의 삼형제를 알고 있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를 배신 했고 곧바로 막내를 배신 했다. 막내는 그 어떤 배신도 저지르지 않은 채, 사람들이 말하기를, 형들의 이름을 외치며 죽었다고 했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죽는 것이 가장 그럴 법한 일이기는 하지만. 54. 스페인 사자의 아들들이지, 선천적 낙관주의자 루벤 다리오가 말했다. 월트 휘트먼, 호세 마르티, 비올레타 파라의 아들들은, 가죽이 벗겨지고 잊혀진 채, 공동 묘지에, 바다 속 깊은 곳에, 그들의 뼈는 트로이인의 운명을 띤 채 뒤섞여 살아남은 자들을 두렵게 한다. 55. 요즘은 그들에 대해 생각한다. 스페인을 방문한 국제 여단의 퇴역 군인들, 주먹을 치켜든 채 버스에서 내리는 귀여운 노인네들을 보면서. 원래는 40,000명에 이르렀으나 현재 스페인으로 돌아온 사람은 350명 남짓에 불과하다. 56. 벨트란 모랄레스에 대해 생각하고, 로드리고 리라에 대해 생각하고, 마리오 산티아고에 대해 생각하고, 레이날도 아레나스에 대해 생각한다. 고문을 받다가 죽은 시인들에 대해 생각하고, 에이즈에 걸리거나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라틴아메리카라는 천국을 꿈꾸다가 라틴아메리카라는 지옥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수치심과 무력함의 구렁텅이에서 좌파들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준 작품들에 대해 생각한다. 57. 공허하고 날카로운 우리들의 얼굴에 대해 생각하고, 이사크 바벨의 잔인한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58. 내가 어른이 되면 시너지 효과를 받는 네루다주의자가 되고 싶다. 59. 잠들기 전에 해보는 질문들. 어째서 네루다는 카프카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네루다는 릴케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네루다는 데 로카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60. 앙리 바르뷔스는 좋아했을까? 모든 것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숄로호프도. 그리고 알베르티도. 그리고 옥타비오 파스도. 연옥으로 함께 여행 가면 좋을 만한 기이한 동료들. 61. 하지만 그는 사랑에 대한 시를 쓰곤 했던 엘뤼아르 역시 좋아했다. 62. 만약 네루다가 코카인 중독자이거나 헤로인 중독자였다면, 만약 그가 1936년에 마드리드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면, 만약 그가 로르카의 연인이고 로르카가 죽은 후 자살해버렸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만약 네루다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물론 실제로 진면목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63. 우리가 <네루다의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자신의 자식들을 집어삼키려는 우골리노가 잠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64.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이! 천진난만하게! 단지 배가 고팠기 때문이고 죽는 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65. 그는 자식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다. 66. 우리는 무릎에 피를 흘리고 허파는 뻥 뚫렸으며 눈물 가득한 눈망울을 한 채, 십자가를 향해, 네루다를 향해 돌아가기라도 하는 걸가? 67. 우리의 이름이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을지라도 그의 이름은 계속해서 빛날 것이고 칠레 문학이라 불리는 망상의 문학 위에서 계속해서 활공을 펼칠 것이다. 68. 그 후 모든 시인들은 교도소나 정신병원이라 불리는 예술 공동체에서 살아가게 되겠지. 69. 우리의 망상의 집, 우리가 함께 살 집.


* 원본 <Putas asesinas>, EDITORIAL ANAGRAMA,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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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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