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 Bolañ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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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6] 미리보기


다음은 볼라뇨의 소설 [2666]의 일부입니다. 나타샤 위머Natasha Wimmer가 영역한 판본 120쪽에서 123쪽의 내용이고요. 가독 편의상 임의로 한 줄씩 띄웠습니다. 번역의 조악함 탓에 글 말미에서 노튼이 말하는 것처럼 무슨 내용인지 이해 못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겠... 


*******

"하지만 그럼 아르힘볼디는 왜 여기에 왔을까?" 노튼이 물었다.

"친구 때문이겠지. 친한 친구. 아르힘볼디가 여행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만큼이나 친한 친구." 펠티에르가 답했다.

"우리가 만약 틀렸다면? 알멘드로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혼동했거나 아니면 누군가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면?" 노튼이 말했다.

"알멘드로 누구요? 엑토르 엔리케 알멘드로?" 아말피타노가 말했다.

"바로 그 사람이에요. 그 사람 알아요?" 에스피노자가 물었다.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닌데요, 그래도 알멘드로에게 그렇게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말피타노가 말했다.

"왜죠?" 노튼이 물었다.

"글쎄요, 그가 전형적인 멕시코 지식인이기 때문이랄까. 그의 주요 관심사가 그럭저럭 살아남는 거거든요." 아말피타노가 답했다.

"그건 모든 라틴 아메리카 지식인의 주요 관심사 아닌가요?" 펠티에르가 물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들 중 일부는 글쓰기에 좀 더 관심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아말피타노가 말했다.

"무슨 뜻인지 말해봐요." 에스피노자가 말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는데," 아말피타노가 말했다. "그건 오래된 이야기에요. 권력을 가진 멕시코 지식인의 관계에 대한. 그들이 전부 똑같다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일부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긴 하죠. 그 사람들이 나쁜 신념에 굴복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에요. 아니면 완전히 굴복해버렸을 수도 있고요. 당신은 그게 단지 직업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들은 국가를 위해서 일하고 있어요. 유럽에선, 지식인들이 출판사나 논문 때문에 일하죠. 그들의 부인이 그들을 지원해주거나 그들 부모가 부유해서 그들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태주죠. 아니면 그들은 노동자거나 범죄자예요. 그들은 자신의 일을 하면서 정직하게 살죠. 멕시코에선, 그리고 이건 아마 전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일 건데, 아르헨티나는 제외하고요, 지식인들은 국가를 위해서 일해요. 그건 제도혁명당(PRI) 밑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고, 국민행동당(PAN) 밑에 있는 거랑 같은 일일 거예요. 지식인 자신들은 국가를 보호하고 국가를 비평하는 데 열정적이겠죠. 국가는 신경 안 써요. 국가는 그들을 먹여살리고 말 없이 그들을 주시하죠. 그리고 써먹기 위해서 본질적으로 쓸모없는 작가들을 이 거대한 집단에 두죠. 어떻게 써먹냐고요? 그 집단은 악마들을 쫓아내고, 국가 정세를 바꾸죠. 최소한 흔들어버리거나요. 그건, 존재할지도 모르고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아무도 확신하지 않는 어떤 구멍을 석회로 덮어버려요. 물론 항상 이런 방식은 아니고요.

지식인은 대학에서 일을 할 수 있어요, 아니면, 더 좋은 건, 미국 대학에 일하러 가는 거죠. 거기 문학 학부는 멕시코에 있는 것만큼이나 안 좋아요. 하지만 그게 그들이 심야 전화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국가의 이름으로 말하는 누군가로부터의 전화나, 그들에게 더 좋은 직업, 더 좋은 연봉, 지식인들이 자신이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제공할 누군가로부터의 전화 말이에요. 그리고 지식인들은 항상 자신이 더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죠. 이런 메커니즘은 멕시코 작가들의 귀를 잘라내요. 그건 그들을 미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일본어를 모르면서 일본 시를 번역하려고 할 거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술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죠. 알멘드로는, 제가 아는 한 그는 양쪽 다예요. 멕시코에서 문학은 보육원 같아요. 유치원 같기도 하고 운동장 같기도 하고 어린이 클럽 같기도 해요. 날 따라오세요. 날씨는 좋고, 화창하죠. 당신은 나갈 수 있고 공원에 앉아 발레리 책을 펼쳐들어요. 아마 멕시코 작가들이 대부분 읽는 작가일 거예요. 그러고 나서 당신은 친구 집에 건너가서 대화를 나눠요. 하지만 당신의 그림자는 더이상 당신을 따라오지 않아요. 어떤 지점에서 당신의 그림자는 조용히 당신을 떠나버렸죠. 당신은 알아채지 않은 척할 수도 있지만 알고 있죠. 당신은 빌어먹을 그림자를 잃어버린 거예요. 비록 그 이유를 설명할 수많은 방법이 있긴 하지만 말이에요. 태양의 천사 때문이라고, 모자를 쓰지 않은 머리에 내리쬐는 태양에 의해 설득된 망각 때문이라고, 섭취한 알코올의 양, 보이지 않는 고통의 덩어리 같은 것의 움직임, 좀 더 우발적인 것들에 대한 공포, 눈에 보이기 시작한 질병, 상처 입은 허영, 당신의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제 시간에 도착하길 바라는 소망 때문이라고. 하지만 요점은, 당신의 그림자는 사라졌고, 당신은 순간적으로 그걸 잊는다는 거죠.

그러고 나서 당신은 그림자 없이 어떤 무대 같은 곳에 도착하게 되죠. 그리고 당신은 현실을 번역하거나 재해석하거나 노래하기 시작해요. 무대는 실제 고대 그리스 시대의 무대고 무대 안쪽엔 거대한 통로가 있어요. 갱도처럼 보이기도 하고 광산의 큼지막한 입구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걸 동굴이라고 부릅시다. 하지만 작동하고 있는 광산이에요. 광산 입구에서부터 이해할 수 없는 소음이 들려와요. 성유법적인 소음, 분노의 음절이거나 유혹의 음절이거나 유혹적인 분노의 음절이에요. 아니면 단지 중얼거리는 것이고 속삭이는 것이며 끙끙대는 거예요. 요점은,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것, 아무도 제대로 그 광산의 입구를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무대 기구, 빛과 그림자의 연극, 시간의 트릭이 관중의 응시로부터 입구의 실제 모습을 감춰버려요. 사실,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관객, 무대 맨 앞좌석에 바로 있는 관객은 짙은 위장의 장막 뒤에 있는 무언가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진짜 모습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건 무언가의 모습이죠. 다른 관객들은 무대 뒤에 있는 걸 아무것도 불 수 없어요. 그리고 그들은 그걸 보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하는 게 맞겠죠. 반면 그림자 없는 지식인들은 항상 관중을 바라보지요, 그래서 머리 뒤에 눈이 달리지 않은 이상 그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지요. 그들은 단지 광산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을 번역하거나 재해석하거나 재창조하지요. 그들의 작업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굉장히 수준이 낮죠. 그들은 허리케인이 감지되는 곳에 수사법을 고용해요. 그들은 고삐 풀린 격분이 감지되는 곳에서 달변가가 되려고 노력하죠. 그들은 방음 장치와 희망 없는 침묵만이 있는 곳에서 운율 훈련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죠. 그들은 삐약삐약 거리고 멍멍 짖고 야옹야옹 울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거대한 동물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거든요. 아니면 그러한 동물이 부재한다는 것을.

한편, 그들이 작업하는 무대는 굉장히 예쁘고 잘 꾸며져 있고 무척 매력적이에요, 하지만 그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작아지고 또 짝이져요. 무대가 이렇게 축소된다고 그게 망하는 건 아니에요. 그건 단지 작아지고 작아질 뿐이며 홀 역시 작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그걸 보는 사람들 수도 줄어들고 줄어들죠. 이 무대 옆에는 물론 다른 게 있어요.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타난 새로운 무대. 미술 무대예요. 굉장히 크고 관중의 수는 적어요. 비록 전부 우아하기는 하지만 말이죠. 더 괜찮은 말이 없네요. 영화 무대와 TV 무대도 있어요. 규모가 거대하고 홀은 항상 가득 차죠 그리고 매년 무대는 도약하고 튀어오르면서 커지고 있어요. 이따금씩 지식인들이 자신의 토크를 하던 무대 공연자들은 TV 무대 공연에 초대되기도 해요. 이 무대에서도 광산의 입구는 같아요. 관점이 살짝 바뀌었고 위장막이 더 두터워졌고, 역설적으로, 그래서 신비스러운 유머 감각을 반증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악취가 코를 찌르죠. 이런 유머러스한 위장막은 자연스럽게 많은 방식으로 해석됩니다만 결국엔 두 개로 줄어들어요. 대중의 편의를 위한 방식, 아니면 대중이 고르기 쉬운 방식으로.

때때로 지식인들은 TV 무대에 대해 영구적으로 저항하죠. 울부짖는 소리는 광산의 입구에서 계속적으로 들려오고 지식인들은 그것들을 계속해서 오해합니다. 사실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언어의 대가입니다만, 언어는 그들을 결코 풍요롭게 해주지 않아요. 그들의 최고의 말은, 제일 앞줄에 있는 관객들이 하는 말을 빌려다 쓰는 거예요. 이런 관객들을 "
채찍질하는 사람flagellants"이라고 부르죠. 그들은 병들었고, 이따금씩 무시무시한 말들을 만들어내며, 사망률에서는 정점을 찍어요. 하루 일과가 끝나면 극장은 문을 닫고 그들은 커다란 강철 시트로 광산 입구를 덮어버려요. 지식인들은 밤에는 철수합니다. 보름달이 뜨고 밤 공기는 굉장히 깨끗해서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몇몇 바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그 음색이 거래를 채워요. 때때로 지식인들은 길거리를 배회하고 술집 한 군데에 들어가 메스칼 주를 마시죠.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에게 어느 날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해요. 사실은 아니에요. 그는 아무 생각도 안 해요. 그냥 술 마시고 노래 부르죠. 때때로 그는 자신이 전설적인 독일 작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에게 실제로 보이는 건 전부 그림자예요. 어떨 땐 그에게 보이는 건 전부 자기 자신의 그림자예요. 그건 매일 밤 집으로 오기 때문에 그 지식인이 밧줄에 목을 매달지 않죠. 하지만 그는 독일 작가를 봤다고 맹세하죠. 자신의 행복과 질서 감각과 활기를, 죄의식 속에서도 야단 떨며 쉬고 있는 자신의 영혼을 봤다고 맹세합니다. 다음 날 아침, 날씨는 화창하죠. 태양은 빛이 나긴 하지만 뜨겁지는 않아요. 누구든 나가서 잘 쉴 수 있어요, 자신의 뒤꿈치에 그림자를 단 채로. 그리고 공원에 멈춰서서 발레리의 책을 조금 읽죠. 그렇게 죽을 때까지 말이에요."

"당신이 무슨 말 하는지 이해가 안 돼요." 노튼이 말했다.

"실은 그냥 헛소리를 늘어놓은 것뿐이에요." 아말피타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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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9. 12:37


POST : Entre paréntesis

심연으로의 산책(UN PASEO POR EL ABISMO)



멕시코에 대해 쓴 많은 소설 중 최고의 작품은 아마도 영국 작품이거나 미국 작품일 것이다. D.H. 로렌스가 시도한 주인공 소설(*[날개 돋힌 뱀]), 그리고 그레이엄 그린의 도덕 소설(*[권력과 영광]), 말콤 라우리의 총체 소설(*[화산 아래서]). 이들은 말하자면 혼돈에 집중하는 소설(이것은 이상적인 소설의 주제 바로 그것이다)이고, 그 혼돈을 정돈하려 하는 소설이며, 읽을 수 있게 하는 소설이다. 소수의 현대 멕시코 작가들은, 카를로스 푸엔테스와 페르난도 델 파소라는 가능한 예외와 더불어, 최근에서야 이러한 기획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러한 노력이 이전에는 금지되어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우리가 멕시코라고 부르는 그것이, 또한 숲이나 사막, 얼굴 없이 뒤섞여 있는 군중인 그것이, 마치 외국인들을 위해서만 예약된 영토라도 되는 것처럼.

로드리고 프레산은 멕시코에 대해 쓰기 위해 이런 저런 필요조건들을 충분히 완수한다. [만트라]는 만화경 같은 소설이고, 성난 유머로 뒤덮여 있는 소설이다. (이따금씩 과잉돼 있기도 하지만.) 이 소설은 멕시코 시티 새벽의 정신 착란 상태와 인류학적인 기록 사이를 오고가며, 굉장히 드물게 정확한 산문으로 씌어졌다. 멕시코 시티는 자신의 지하 밑바닥에 다른 도시들을 쌓아두고 있다. 마치 자기 자신을 삼켜버리려고 하는 뱀의 시도처럼.

이 소설은 외면적으로(내가 '외면적으로'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소설에서 모든 것이 외면적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소설의 각 부분들은 수학적인 정밀함으로 조립되어 있을지언정) 세 개의 큰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아르헨티나 소년이 화자로 나온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시간을 보내고, 이후 그가 있는 학교에 새로운 학생이 도착한다. 멕시코 아이인 새 학생은 1분도 지나지 않아 그 반의 리더로 희생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선생이 그를 혼자 내버려뒀을 때 실탄이 장전된 총으로 러시아 룰렛이라는 천재적인 (그리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게임을 하게 되면서. 그 아이 마르틴 만트라는, 바꿔 말하자면 앙팡 테리블의 화신이다. TV 연속극의 두 배우의 아이인 그는 마스크를 쓴 전(前)레슬러를 경호원으로 동행한 채 학교에 간다. 그리고 영화와 텔레비전 세계를 전복하려는 생각을 한다. 멕시코 - 이곳에서 그 놀라운 아이가 태어난다 - 의 앞날은 그 아이에 의해 그리고 화자로 나오는 아르헨티나 소년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 더불어 결코 정확하게 말해지지는 않았지만 이따금씩 질병이나 사회 붕괴처럼 보이는 무언가에 의해, 그리고 아마도 유년기의 결정적인 부재가 될 뿐인 무언가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된다.

이 1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은 과거의 영웅, 헤르바시오 비카리오 카브레라 (사후의) 장군이다. 그는 아르헨티나 독립 전쟁에서 싸웠던 덜렁대는 멕시코인이다. 그는 너무 조급한 판단으로 인해 총살당한 희생자이고, 이것은 3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인 어느 로봇과 같은 방식이다. 그 로봇의 망령은 [페드로 파라모]의 혼란스러운 일인칭 나레이션과 유사하게 보인다.

내 판단에 가장 훌륭한 2부는 소설에서 분량이 제일 많고 알파벳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멕시코 시티나 심연에 대한 백과사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2부는 또한 가장 많은 분량으로 144쪽에서 509쪽까지를 차지한다. 독서 방법은 열려 있다. 순서대로 읽을 수도 있고 좋아하는 글자를 찾아가며 볼 수도 있다. 이번에 화자는 프랑스인이다. 오직 마르틴 만트라가 하는 말만 들을 수 있는 프랑스인. 그는 죽기 위해서 그리고 죽이기 위해서
심지어는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누군가를 죽이고자 멕시코로 여행을 떠난다.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복잡한 구성 사이에, 조앤 볼머의 삶이 있다. 그녀는 남편인 버로스가 빌헬름 텔 연극에서 빌리엄 역할을 하던 중 (*오발 사고로) 멕시코 시티에서 죽었다. 그리고 마스크를 쓴 레슬러의 역사와, 마스크를 쓴 이런 레슬러들 중 한 명이 프랑스에서 만들고 싶어 했던 누벨 바그 영화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LIM(*el Lenguaje Internacional de los Muertos)의 역사, 즉 죽은 자들의 국제 언어 의 역사가 있고 멕시코 괴물들의 역사, 멕시코 포르노의 역사, 여성 락그룹 아노렉시아와 수스 플라키타스(*거식녀와 말라깽이들?)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미디어를 이용하며 세계 종말적인 게릴라처럼 활동한 마르틴 만트라의 역사가 있다. 물론 파리에서의, 프랑스인 화자와 멕시코 여인이 나눴던 사랑의 역사 또한 부족하지 않게 있다.

[만트라]의 말들을 무작위로 발췌해보자. "TV 연속극"이라는 항목에서 독자는 이런 내용을 읽을 수 있다. "TV 연속극은 마치 돌연변이 통신원과 같다." "TV 수상기" 항목에선, "네가 나에게, 죽은 자들이 보이는 이런 죽은 텔레비전의 상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너에게 답할 것이다(...) 자신의 눈을 다른 좀비들에게 먹으라고 주는 이런 화면에 나오는 좀비들의 상표는 좀비이다." "구토"라는 항목에선, "이렇게 조안 볼머가 나에게 말한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여러 담배를 피우면서 그녀가 나에게 말한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그것들은 다른 상표의 담배라고 말한다. 어떨 때는 일인칭 시점으로 말하고, 또 어떨 때는 삼인칭 시점으로 말하며, 간헐적으로는 지진이 난 것처럼 경련하면서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국제 언어(*LIM)이다."

그러니까 죽은 자들이 말하는 언어의 리듬은 진동과 닮아 있다. 그리고 [만트라]는, 겹겹이 쌓여 있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죽은자들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멕시코의 죽은자들, 저명한 사람부터 익명의 사람까지 전부다. 독자가 인지하게 되는 그 진동은 LIM의 진동이고, 이것들이 알파벳 순서로 쓰여 있는 한 언제든 소설이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인 3부는 미래적인 우화이다. 멕시코 시티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이런 폐허 속에서 누에바 테노치티틀란 델 템블로르라고 불리는 새로운 도시가 세워진다. 한 로봇이 이 이상한 도시의 줌심부로 돌아온다. 만트락스라고 하는 자신의 창조자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할 것이라고 그는 자신의 모체 컴퓨터와 약속했다. 명백하게, 우리는 [페드로 파라모]의 새로운 버전, 즉 룰포의 [페드로 파라모]와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위험천만한 만남 앞에 있는 것이다. 희생자의 비석 근처에서, 놀라운 결말을 지니고 있는.

최근 몇 년 동안 읽었던 소설 중 이렇게 감격스러운 소설은 드물었다. [만트라]를 통해 나는 더 많이 웃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은 나에게 대단히 고결하게 보이는 동시에 퇴폐적으로 보였다. 작가의 우울한 에너지는 바닥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항상 미학적인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절대 촌스럽거나 감상주의적인 것에 빠지지 않으며, 항상 스페인어권 문학에서 호평을 얻는다. 이 소설은 멕시코에 대한 소설이고, 사실상 모든 위대한 소설이 그런 것처럼 시간의 흐름에 대해, 그리고 꿈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해 진정으로 다루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이건 대단히 비밀스러운 분야인데, 문학을 만드는 기술에 대하여 다룬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깨닫지 못하지만.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307-310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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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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