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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 Entre paréntesis

최고의 팀(La mejor banda)



출처: http://es.paperblog.com/entre-parentesis-4-la-mejor-banda-roberto-bolano-374378


최고의 팀

만약 유럽에서 가장 감시가 철저한 은행을 털어야만 한다면, 그리고 만약 그런 짓을 함께 할 동료들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다면, 난 의심의 여지없이, 다섯 명의 시인으로 된 그룹을 선택할 것이다. 다섯 명의 진정한 시인들, 아폴로적이든 디오니소스적이든, 그런 건 상관없다. 진정한 시인들, 그러니까 시인의 운명을 가진 시인들, 시인의 삶을 사는 시인들. 세상에 그들보다 더 용감한 사람은 없다. 더 큰 위엄과 통찰력으로 재앙에 맞서는 사람은 없다. 분명 그들은, 구이도 카발칸티의 독자들과 아르나우트 다니엘의 독자들, 뼈의 평원을 가로질렀던 도망자 아르킬로코스의 독자들은 약하다. 그리고 그들은 언어의 공백 속에서, 마치 빠져나갈 출구가 없는 행성에 갖힌 우주비행사처럼 일하고, 언어로 된 건물이나,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 부르는 바보 같은 노래밖에 없는, 독자도 없고 편집자도 없는 사막에서 일한다. 작가들의 모임에서 시인들은 가장 빛나는 존재이면서 최소한으로 필요한 존재이다. 열여섯이나 열일곱 살 정도의 광적인 청년들이 시인이 되고자 결심한다면, 그들의 가족에게 재앙이 닥친다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동성애자 유대인, 흑인 혼혈인, 반볼셰비키주의자, 그리고 시베리아로 추방된 사람들의 가족들 역시 수치스럽게 살고는 한다. 보들레르의 독자들 역시 중고등학교에서 잘 지내지 못한다. 반 친구들과도 그렇고 선생님들과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약하다는 것은 속임수이다. 그들의 사랑에 대한 변덕스러운 선언과 유머도 마찬가지. 그들의 모호한 그림자 뒤에서 우리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확실히 가장 용감한 사람들이다. 시인들이 괜히 오르페우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오르페우스는 아르고나우타이에서 노의 리듬을 담당하여 지옥까지 내려갔다가 살아서 돌아왔다. 그의 열정에 비하면 덜하겠지만, 끝끝내 살아 있다. 만약 아메리카에서 가장 보안이 잘 된 은행을 습격해야 한다면, 나의 팀은 시인들로만 이루어질 것이다. 결과는 아마 처참한 형태가 되겠지만,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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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9. 1. 16:49


POST : Entre paréntesis

문명(Civilización)


어렵다... ( -_-)


출처 : http://es.paperblog.com/entre-parentesis-8-civilizacion-roberto-bolano-379036

로베르토 볼라뇨의 책 [괄호 치고](아나그라마 출판사) 120쪽에서 다음의 글을 볼 수 있다.


문명

 [지옥의 묵시록Apocalipse Now]에서 로버트 듀발이 연기한 인물에게 네이팜 냄새보다 더 좋은 아침식사는 없었다. 그에게 그 냄새는 승리를 알려주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을린 냄새(사람들이 말하길, 공기에 매달려 있는 듯한 강렬한 냄새)는 때론 승리를 알려주지만 이따금씩 공포스럽기도 하다.

나는 네이팜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다. 화약 냄새는 맡아봤다. 화약 냄새는 확실히 승리를 알려주기보다는 축제스러운 느낌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렇다. 다른 경우에 그것은 공포스럽다. 최루가스 냄새 - 어떤 나라에서는 화약 냄새보다 먼저 나곤 한다 - 는 대조적으로, 스포츠의 느낌이 나기도 하지만 복통을 일으키기도 한다. 승리의 행진의 냄새는 항상 먼지처럼 보인다. 팔과 다리에 난 문둥병처럼 들러붙어 있는, 투명하면서도 빛나는 먼지. 감금된 군중의 냄새는 먼지처럼 보이기도 하고 죽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마 그게 그것일 것이다. 넓고 개방된 공간, 이를테면 운동경기장이나 공터에 있는 군중의 냄새는 공포스러운 데가 있다. 나는 축구 경기와 콘서트와 집회를 싫어한다. 그런 장소에서의 공포는 때때로 견딜 수가 없다.

반대로 걷는 것은 좋아한다. 음탕한 노인네들과 함께라면. 여름에 블라네스의 파세오 마리티모Paseo Marítimo에서라면. 해변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한다. 그곳에는 반쯤 벗은 몸뚱이들이 승리로 가득한 채 무리지어 있다. 잘생긴 사람이든 못생긴 사람이든, 뚱뚱한 사람이든 마른 사람든, 완벽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그곳의 공기는 우리에게 끝내주는 냄새, 태닝 크림의 냄새를 가져다준다. 몸뚱이들로 뒤범벅이 된 그런 무리들이 뿜어내는 냄새를 나는 좋아한다.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악센트를 주는 것이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이따금씩 우울한 냄새가 나기도 한다. 형이상학적인 냄새가 날 수도 있다. 수많은 태닝 크림과 자외선 차단제 들. 거기선 민주주의의 냄새가 난다. 문명의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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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25. 06:08


POST : Entre paréntesis

보르헤스와 갈까마귀(Borges y los cuervos)


오랜만의 포스팅. 뭘 검색하다가 우연히 아래 블로그를 발견했다. 볼라뇨의 에세이집 [괄호 치고]의 글들 일부를 발췌해뒀음은 물론 이 책 저 책에서 볼라뇨의 말/글들을 수집해둔 블로그다. (늘 그렇듯 개떡 같은 번역이라 쵸큼 우울하다.)

출처 : http://es.paperblog.com/entre-parentesis-5-borges-y-los-cuervos-roberto-bolano-376703


볼라뇨의 책 [괄호 치고] 144쪽에서 볼라뇨가 존경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 관한 다음의 텍스트(아름다운 제목이다, 더 말할 것도 없다)를 읽을 수 있다.

보르헤스와 갈까마귀

나는 제네바에 있다. 그리고 보르헤스가 묻혀 있는 묘지를 찾는다. 아침엔 가을 날씨처럼 쌀쌀하다. 비록 고집이 있고 위대한 민주주의 전통을 갖고 있는 제네바 사람들을 미소짓게 하는 얼마간의 햇살이 어슴프레 비치기는 하지만 말이다. 플라인팔라이스Plainpalais(보르헤스가 있는 묘지)는 이상적인 묘지다. 매일 오후 어느 미국 외교관의 무덤 앞에 앉아 책을 읽기 위해 오고 싶은 기분이 든다. 이곳은 묘지라기보다는 공원처럼 보인다. 대단히 사소한 부분까지 엄청나게 잘 관리된 그런 공원. 묘지기에게 보르헤스의 무덤에 대해 묻자 그는 바닥을 보고 고개를 흔들며 정확한 어휘들로 그 장소를 가리킨다. 잃어버릴 리가 없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방문객들의 왕래가 계속될 거라 짐작하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묘지는 문자 그대로 텅 비어 있다. 마침내 보르헤스의 무덤에 도착했으나 주변엔 아무도 없다. 나는 칼데론(*17세기 스페인 극작가)을 생각하고, 영국과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들을 생각하며, 삶이 얼마나 이상한지에 대해 생각한다. 아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낫겠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무덤을 볼 뿐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비석과, 그가 태어난 해와 죽은 해, 그리고 독일어로 된 문구를 볼 뿐이다. 그러고 나서 무덤 앞에 있는 벤치에 앉는다. 갈까마귀들이 크게 우짖는다, 목이 쉰 듯 걸걸한 소리로,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갈까마귀라니! 제네바에 있는 게 아니라 마치 애드거 앨런 포의 시 속에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나서야 묘지엔 갈까마귀가 가득하다는 걸 깨닫는다. 커다랗고 검은 까마귀들은 비석이나 노목의 가지에 앉아 있거나 플라인팔라이스 묘지 잔디밭에서 폴짝거린다. 잠시 후 나는 걷고 싶은, 더 많은 무덤들을 둘러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아마 운이 좋으면 이탈로 칼비노의 무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한다. 하지만 마음이 점점 더 진정되지 않는다. 반면에 갈까마귀들은 묘지의 금지구역을 지나치지 않고 나를 따라온다. 언제든지 날아올라 이곳을 떠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후에 그들은 로다노 주변이나 호숫가에 앉아 쉴 것이다. 백조와 오리 들을 둘러보기 위해서 말이다. 경멸의 눈초리로 볼 것이다.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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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25. 03:24


POST : Etcétera

『전화』 편집자 노트 (by 김뉘연)


볼라뇨에 대한, 그리고 볼라뇨의 단편집 [전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전화]에 수록된 단편들 중 일부는 단번에 이해되기에는 조금 모호한 경향이 있다. 보르헤스의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단편 속 표현을 빌리자면 "애매모호성은 하나의 풍요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느가." 좌우간 이 편집자 노트를 통해 그런 모호함이 많은 부분 해소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렇다고 그것이 정답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현재는 출판사의 공식 커뮤니티에만 포스팅되어 있는데 증쇄할 때 책에 직접 실렸으면 좋겠다.

총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스크롤 압박에도 불구하고 한 포스팅에 담는다.
 

출처 : 
http://cafe.naver.com/openbooks21/830

          

『전화』 편집자 노트

- 통화 중

 

열린책들에서는 그간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을 4편 펴냈다. 기회주의적인 삶을 산 어느 사제의 씁쓸한 독백이 담긴 『칠레의 밤』, 멕시코를 떠도는 한 우루과이 여인의 잔혹한 기억을 파고드는 『부적』, 하늘을 누비며 시를 쓰는 칠레 조종사의 행방을 좇는 『먼 별』, 그리고 볼라뇨의 첫 단편집 『전화』. 이제 볼라뇨의 방대한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2666』의 출간을 앞둔 지금, 이 단편집을 펼쳐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얽히고설킨 볼라뇨식 미로를 통과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일말의 실마리들이 이 안에 숨은 까닭이다. 로베르토 볼라뇨는 14가지 단서들에 이야기라는 외피를 입힌 후, 작가의 삶(1부), 폭력(2부), 그리고 여자의 일생(3부) 등 세 가지 주제로 나누고 다시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냈다.

이 편집자 노트 또한 세 파트에 걸쳐 작성되었다. 등장인물들부터 독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볼라뇨의 사람들>을 둘러싼 이야기, 그리고 볼라뇨의 작품 세계를 보다 세밀하게 엿보고자 진행한 <옮긴이와의 대화> 2편. 모쪼록 그동안 소개된 로베르토 볼라뇨 세계의 일면에 매료되어 막연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이 노트가 미로 속 유용한 지도가 되었으면 한다.

 열린책들 볼라뇨,심농 편집자 김뉘연     

 



 제1부. 떠돌이들 - 볼라뇨의 사람들, 탐정이 되어 거울 앞에 서다


< 망명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작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천히 또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조금씩 작아져서 자신의 진정한 크기를 획득하는 것이죠. (……) 모든 작가는 문학에 뛰어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망명자입니다. 모든 독자는 책을 펼쳤다는 것만으로 이미 망명자입니다.> - 로베르토 볼라뇨, 「망명」, 에세이집 『괄호 치고』 중에서

 

볼라뇨가 묻는다. 세상 어디에서든 먹고 살 수 있는 직업 두 가지는? 작가, 그리고 창녀. 자기 자신을 팔아 어느 땅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 이보다 더 매력적인 조건을 가진 직업이 또 있을까? 다시, 볼라뇨가 답한다. <작가가 되는 것보다는 살인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가 되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밤중에 혼자 범죄 현장을 다시 찾아가고, 귀신을 보고도 겁먹지 않는 형사 말입니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경찰이기 때문에 자기 입에다 한 방 먹이면 그만입니다.> 볼라뇨식 <탐정 놀이>의 시작. 볼라뇨는 스스로 탐정이 되는 것은 물론, 우리 또한 탐정으로 만들고 만다.

『전화』 속 볼라뇨의 문장들을 뒤따라가던 당신은 불현듯 누군가를 뒤쫓고 있다. 그들은 우리 곁에 머물다 홀연히 사라진다. 혹은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다. 시인, 군인, 독학생, 이방인, 포르노 여배우……. 이 범상치 않은 목록을 관통하는 공통분모는 바로 <망명>이다. 칠레에서 태어나 멕시코와 스페인을 떠돌고, 기존 문학을 헤집으며 그 틀을 파괴해 나가는 가운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로베르토 볼라뇨, 그리고 볼라뇨의 사람들. 이들은 모두 <망명자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망명자들을 뒤쫓는 망명자들, 또는 탐정들, 이라고 해두자.

딱히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로 막을 내리곤 하는 이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가는 가운데 당신은 문득 거울 앞에 서게 된다. (<탐정 놀이>에 이은) 볼라뇨식 <거울 놀이>. 볼라뇨가 말한 바 망명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작아지는 것, 그렇게 자신의 진정한 크기를 획득하는 것이다. 떠돌이들의 삶, 쫓고 쫓기는 게임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렇다. 탐정도, 범인도, 거울 앞에 섰다.

 


출처 : http://cafe.naver.com/openbooks21/844


『전화』 편집자 노트  제2부. 떠도는 이야기들

- 옮긴이와의 첫 번째 대화

 

열린책들이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를 알리고자 펴냈던 버즈북(buzzbook, 신간 예고 매체)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의 비평들을 번역하기도 했던 옮긴이와 『전화』 출간을 일주일 앞두고 있던 지난 9월 3일, 짧은 이야기들을 둘러싼 긴 이야기를 나눴다. 꼬리에 꼬리를 문 대화들의 품새가 이제 보니 볼라뇨의 단편들을 닮아 있다.

★ 옮긴이와의 대화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전합니다. 이 첫 번째 대화에서는 볼라뇨의 첫 단편집 『전화』를 매개 삼아 『칠레의 밤』, 『부적』, 『먼 별』, 그리고 『전화』로 이어지는 볼라뇨의 작품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자 했습니다. 이어질 두 번째 대화에는 『전화』 속 14편의 단편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열린책들 볼라뇨·심농 편집자 김뉘연     

 

볼라뇨와 벨라노

 

편집자 _ 로베르토 볼라뇨의 첫 단편집이 드디어 출간되었습니다. 볼라뇨와의 전화 통화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그런데, 볼라뇨 단편집 3편 『전화』, 『살인 창녀들』, 『참을 수 없는 가우초』 가운데, <전화>라는 제목이 가장 싱겁기는 합니다…….


옮긴이 _ 원래는 우리말 제목을 <전화 통화>라고 정했다가, 다시 <전화>와 <통화> 중 <전화>로 결정했는데요. 그 이유는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결국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전화 통화에 실패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전화>라는 제목은 사실 전화보다는 전화가 만들어 내는 <거리>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화라는 것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사용하는 도구이고,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죠. 이러한 거리감이 만들어 내는 불확실성, 그 불확실성이 주는 공포와 불안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 시작 전의 제사(題詞)에서 인용된 체호프의 문장 <누가 당신만큼 내 공포를 잘 이해할 수 있겠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 _ 흥미로운 해석인데요. 제사의 의미 또한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옮긴이 _ 『전화』에 수록된 열네 편의 단편들은 언뜻 보기에 그 성격이 각기 달라 보입니다. 그런데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이렇듯 특정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각 단편의 등장인물들은 주로 서로 떨어져 있으니까요.

 

편집자 _ 등장인물 중 특히 중요한 한 사람 이야기를 해볼까요. 아르투로 벨라노. 로베르토 볼라뇨와 이름이 닮은 이 등장인물은 볼라뇨의 소설 『먼 별』에서 아르투로 B.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던, 이를테면 볼라뇨의 얼터 에고인데요. 『전화』 속 여러 단편 가운데 이 아르투로 벨라노라는 이름이 종종 눈에 띕니다.

 

옮긴이 _ 단편 중 1인칭 화자가 많이 등장하죠. 거의 다 아르투로 벨라노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아르투로 벨라노가 과연 모두 동일 인물일까요?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면면이 너무나 다양하거든요. 『전화』 속 단편 중 <형사들>에 등장하는 아르투로 벨라노, 장편소설 『부적』의 아르투로 벨라노, 그리고 볼라뇨의 또 다른 단편집 『살인 창녀들』의 아르투로 벨라노 등 이 모든 아르투로 벨라노들이 각자 칠레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각각의 내용이 차이가 납니다. 또 볼라뇨의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유일하게 주인공으로 등장하고요. 기본적으로는 볼라뇨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철저히 소설 속 인물이기도 한 거죠. 이것이 아르투로 벨라노라는 인물이 가지는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볼라뇨 작품 자체가 <자전적 요소와 픽션적 요소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상징하는 인물이 아르투로 벨라노인 셈입니다.

 

편집자 _ 확실히 볼라뇨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특히 이번 단편들의 경우, 분명 볼라뇨가 자기 삶의 파편들을 재구성한 인상인데요.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자전적인 작품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옮긴이 _ 볼라뇨 인터뷰 가운데 다음의 말이 기억납니다. 볼라뇨가 자신의 삶을 모티프로 삼을 때는 <기억을 단순히 되살린다>는 겁니다. 즉 자전적인 이야기가 녹아 있다고 해서 한 개인의 사적인 일기 같은 작품이 아니라, 이러한 자전적 요소가 픽션을 만들어내기 위한 하나의 기능으로 존재하는 듯합니다. 어쩌면 이런 점에 있어 볼라뇨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죠. 사실 볼라뇨가 개인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은 별로 없기도 하고요. 열다섯 살에 학교를 중퇴했으니 다른 작가들처럼 딱히 내세울 경력은 없지요. 다음의 예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자신의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대해서도, 볼라뇨는 이건 문학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쓴 문학에 관한 소설은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 유일하다>고 했어요.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인간>과 <시대>에 관한 이야기이고, 멕시코 이야기를 쓴 까닭은 그냥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주제였기 때문이라고요. 그러니까 친구 마리오 산티아고와 함께 했던 <인프라레알리스모infrarrealismo> 운동을 특별히 부각시킬 의도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라뇨 작품 세계의 본바탕은 자전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과시하려고 쓰는 종류의 작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

 

편집자 _ 눈 밝은 독자라면 현재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부적』이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일부분을, 그리고 『먼 별』이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의 일부분을 확장한 이야기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이렇듯 <볼라뇨 세계>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 작품과 작품이 연결되는 <상호텍스트성>을 대변하는 인물이 바로 볼라뇨의 얼터 에고인 아르투로 벨라노라는 생각이 듭니다.

 

옮긴이 _ 그리고 이러한 볼라뇨 작품 속 <상호텍스트성>을 일종의 <거울 놀이>라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의 단편이 다른 장편과, 또는 다른 단편집에 실린 작품과 유사한 내용으로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번 단편집 『전화』를 예로 들어 본다면, 3부에서 다룬 여자들의 삶 중 단편 「조안나 실베스트리」는 장편 『먼 별』의 에피소드 중 하나를 깊게 파고든 이야기입니다.

 

망명자들

 

편집자 _ <거울 놀이>, 기억해 두겠습니다. 이렇듯 『전화』는 기본적으로 볼라뇨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요. 올해 초 열린책들에서 로베르토 볼라뇨를 알리고자 펴냈던 버즈북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를 이번에 다시 읽다 보니 『전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변방(변두리)의 이야기, 방랑자들(망명자들)의 이야기, 그 어긋난 세계의 이야기…….

 

옮긴이 _ 그럼 <망명>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망명>은 볼라뇨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어느 글에서 볼라뇨는 우리 모두를 망명자라 칭하고 있는데요. 망명자에 대한 볼라뇨의 생각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망명자와는 조금 다릅니다. 볼라뇨 에세이집 『괄호 치고』에 수록된 「망명Exilios」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볼까요.

<망명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작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천히 또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조금씩 작아져서 자신의 진정한 크기를 획득하는 것이죠.>

<(……) 어쩌면 우리 작가들과 독자들은 유년기를 지나면서 망명을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문학에서 망명 작가라는 명칭을 따로 설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작가는 문학에 뛰어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망명자입니다. 모든 독자는 책을 펼쳤다는 것만으로 이미 망명자입니다.>

<(……) 사람들은 제가 칠레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저는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로 칠레에 돌아가지 않았지요. 그래서 흔히들 저를 망명 작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저는 한 번도 그렇게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제가 망명자라고 느끼는 순간은, 칠레 사람들이 제게 스페인 사람처럼 말한다고 하거나, 멕시코 사람들이 제게 칠레 사람처럼 말한다고 하거나, 스페인 사람들이 제게 아르헨티나 사람처럼 말한다고 할 때죠. 그러니까 망명이라는 것은 어떤 억양의 문제일 따름입니다. 엔리케 빌라마타스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더군요. 얼마 전에 그 친구가 망명에 관한 좌담회에 참석했답니다. 마리오 베네데티,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 아우구스토 몬테로소가 참가한 자리였죠. 베네데티와 페리 로시는 망명을 잔인하고 소름끼치는 무엇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몬테로소는 오히려 망명이 즐겁고 행복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지요. 그러니까 멕시코에 오랫동안 망명하면서 겪은 모든 일들에 만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좌담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빌라마타스도 더 자세하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무조건적으로 몬테로소의 말에 공감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망명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보다 망명하는 편이 더 나은 것이죠.>

칠레에서 태어난 볼라뇨는 열다섯에 멕시코로, 스물넷에 유럽으로 떠나 스페인 바닷가의 작은 마을 블라네스에서 여생을 보냈는데요. 그를 두고 사람들이 <엘 칠레노(칠레인)>이라고들 불렀다고 합니다(볼라뇨가 만약 아르헨티나인이었다면 그런 별명이 생길 수 없었을 거예요. 아르헨티나 같은 경우에는 망명 작가가 너무 많아서, 이를테면, 한 사람을 두고 <아르헨티노>라 부를 수가 없거든요). 이렇듯 외국인으로서 살아온 경험이 작품 속에 자연스레 녹아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의 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외국인이라는 개념은 물리적인 것이 아닌 정서적인 것입니다. 볼라뇨의 소설 속 거의 모든 인물들은 (실제 외국인이 아닐 지라도) 특별한 의미에서의 이방인이니까요.

 

편집자 _ <변방>을 떠도는 <망명자들>. 이들이 바로 볼라뇨의 사람들이군요.

 

옮긴이 _ 또는 세대의 문제로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볼라뇨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그 시대적 배경이 1970~80년대가 대부분인데, 스페인, 중남미, 미국, 러시아 등 그 국가적 배경은 다양합니다. 그러니까 볼라뇨는 1970~80년대 각 세계의 청춘의 삶을 그려 낸 것이죠(실제로, 1953년생인 볼라뇨는 칠레의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하려는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발발했던 1973년 당시 스무 살 청춘이었다 - 편집자주). 『전화』에도 좋은 예가 있습니다. 3부에 수록된 단편 중 「앤 무어의 삶」 같은 경우, 중남미에서 혼란의 시기를 보낸 젊은이가 미국에서 혼란의 시기를 보낸 젊은이와 만난다는 내용 자체가 재미있었습니다. 이렇듯 같은 세대를 산 사람들의 청춘은 서로 닮아 있지 않을까요. 1960년대, 1970년대의 세계적 시대상을 돌아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반전 운동과 히피 문화가 미국 대륙을 휩쓸었다면 중남미는 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극도의 혼란을 겪었고, 한국 또한 그랬고요. 이렇게 그 세대만의 경험을 연결시키는 지점들이 볼라뇨 작품 곳곳에 박혀 있습니다. 한 지역에 국한해 특수하게 처리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 두 사람이 각자의 나라인 미국이나 중남미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제3의 나라인 스페인에서 마주하게 된다는 것. 「앤 무어의 삶」에는 앤의 남자 중 한 명으로 한국인도 등장하는데, 만약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을 볼라뇨가 알고 있었다면, 분명 이 단편에 녹여 내지 않았을까요…….

 

편집자 _ 그러니까 볼라뇨는 자신의 작품들로 <볼라뇨 세계>만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 알고 보니 온 세상을 독보적인 기준으로 재편성한 것이군요.

 

옮긴이 _ 여기서 다시, 아르투로 벨라노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나를 구성하는 틀을 벗어 버리면 나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나요. 단편 「앤 무어의 삶」 속 주인공 앤 무어 또한 자기 삶의 안정적인 틀을 벗어나면서 자신을 찾게 되는데요. 그런데, 『전화』 속 단편들 가운데 정작 볼라뇨의 얼터 에고인 아르투로 벨라노가 자신을 찾는 과정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주인공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방황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거리를 두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아르투로 벨라노가 아닐까요. 관찰자로서 아르투로 벨라노는, 물론 등장인물들에게 연민을 느낄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주인공들의 삶을 두고 자기 위안을 삼거나 과도하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태도가 볼라뇨 소설의 장점이고, 바로 볼라뇨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닐까 싶네요.

 

편집자 _ 지켜보는 자가 있어 의미 있는 삶. 그렇다면, 그 삶은 더 이상 변두리 인생이 아니네요.

 

옮긴이 _ 어쩌면 변두리 인생을 사는 사람만이 변두리 인생을 사는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갖는 건지도 모르지요. 다시 <망명>으로 돌아가자면 망명 또한 어쩌면 즐거운 일입니다. 망명을 자기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기회이며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삶을 후회하며 자괴감에,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 태도. 왜 볼라뇨는 칠레 쿠데타에 얽힌 이야기들을 다루면서도 한 번도 폭력적인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을까요? 위와 같은 맥락에서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언급하다 보면 감정이 엄청나게 이입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볼라뇨가 쿠데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즉, 이러한 방식이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차원에서 한국 문학에서도 광주 등 아픈 과거사를 다루는 방식을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권력에 대한 분노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트라우마에 짓눌려 지나친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볼라뇨 특유의 이러한 윤리적인 태도를 참고하면 어떨까 싶네요.

그리고…… 여담이 될 수도 있겠는데요, 볼라뇨는 작가에게 망명이 그다지 나쁜 경험이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변호사나 정치인을 생각해 보세요. 자기 나라 밖으로 나가면 물 밖의 물고기 꼴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어디에서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직업입니까. 군인? 그래도 제한적이죠. 형사? 그보다는, 살인청부업자? 아닙니다. 어디에서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창녀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작가와 창녀는 같습니다.>

 

편집자 _ 자신을 판다는 점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와 창녀는 같다!

 

옮긴이 _ 또한 볼라뇨의 인터뷰건 에세이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로 <용기>, 그러니까 <배짱>입니다. <나는 시인들의 삶을 존경한다, 그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니까, 진정한 시인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볼라뇨는 말했습니다. 『전화』 속 단편 「엔리케 마르틴」 첫머리에서도 이 시인에 관련된 내용이 나오죠.

< 시인은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고로, 인간은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거짓이다. 사실 인간이 진심으로 견뎌 낼 수 있는 일은 손꼽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진심으로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확신을 지닌 채 성장했다. 이 문단의 첫 번째 문장은 참이다. 그러나 파멸과 광기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또, 「최고의 은행 강도」라는 글에서는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 유럽에서 경호가 엄한 은행을 털어야 하고, 내가 마음대로 도둑질할 동료들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한순간의 주저 없이 5명의 시인을 선택하겠다. 왜냐하면 시인이야말로 가장 용기 있고, 배짱 있고, 대담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더라도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저지르는 은행 강도는 보나마나 실패하겠지만, 굉장히 아름다운 일이 될 거다.>


편집자 _ <배짱 있는 자가 누구냐.> 볼라뇨 에세이 제목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옮긴이 _ 아무래도 볼라뇨는 이 <배짱>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덕목이라고 생각했던 듯합니다. 그러니까 평생 시인이 되고자 했던 볼라뇨인 만큼 시인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던 거겠죠. 시인, 모든 걸 견딜 수 있는 자. 또한 볼라뇨는 작가를 두고 <영웅적인 실패자의 대열에 선, 글쓰기라는 험난한 과업과 끈질기게 싸웠으며 실패를 받아들일 줄 아는 용기를 지닌 자>라 하기도 했습니다. 『전화』 가운데 「앙리 시몽 르프랭스」라는 단편이 이러한 내용입니다. 작중 삼류 작가인 르프랭스가 끝까지 살아남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용기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볼라뇨가 편애해 마지않는 사람들, 형사며 살인청부업자들 또한 이러한 용기, <깡>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네요.

 

탐정들

 

편집자 _ 그런데 볼라뇨는 형사들, 즉 탐정들에 왜 그렇게 매료되었을까요?

 

옮긴이 _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작가가 되는 것보다는 살인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가 되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다는……. 볼라뇨는 평소 작가를 형사에 자주 비유했는데요. 작가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살인청부업자와 같다고도 했고요.

이 이야기는 조금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앞서 얘기했던 변방의 사람들과도 다시 연관되는 내용인데요. 볼라뇨 작품 가운데 작가들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볼라뇨는 이 작가라는 이들을 극단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유형이라고 여기는 듯합니다. 하드보일드 류의 인물들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전화』 속 인물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형사, 삼류작가, 시인, 포르노 배우, 군인…….

그 런데 이 극단적인 사람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사라진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대표작 『2666』을 보더라도 이제 사라지고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찾는 여정이고요. 이건 볼라뇨가 정치를 다루는 일종의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볼라뇨가 태어난 땅 칠레의 쿠데타, 『부적』에서 주요 사건으로 등장하는 멕시코 틀라텔롤코 사태, 『전화』 속 단편 「센시니」의 배경이 되는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중남미를 휩쓴 독재 정권의 여파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 버렸는데요. 이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는 것 그 자체가 행방불명된 젊은이들에 대한 어떤 손짓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가운데 볼라뇨는 그에 어울리는 추리 소설적 기법을 쓰게 된 것이고, 이렇게 사라진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여정 가운데 독자는 자연히 형사가 되고 탐정이 됩니다. 『부적』, 『먼 별』, 『전화』 모두 이러한 선상에 놓인 작품들입니다. 어쩌면 중남미야말로 하드보일드의 배경으로 너무도 적절한 공간인 것이죠.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아시아나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편집자 _ 볼라뇨식 <탐정 놀이>군요!

 

옮긴이 _ 볼라뇨의 친구 중 한 명은 볼라뇨를 <야만스러운 탐정>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냉정하고 이성적이어야 할 탐정이 야만스럽고 열정적이라니 아이러니한 표현인데요. 한마디로 막 나가는 탐정이라는 건데…… 탐정은 막 나가면 안 되는 건데 말입니다.

어쨌든 그래서 <탐정 소설 + 실종된 사람들 + 폭력>이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한 하나의 형태, 이를테면 <하드보일드 추리 본격 소설>(?) 정도가 볼라뇨 문학의 기본 형식이 아닐까, 이 정도로 정리해 봅니다…….

 

옮긴이는 아마도 지금쯤 볼라뇨가 탐정 영화를 찍고 있을 거라 했다. <볼라뇨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기가 단테의 『신곡』을 좋아하는데 이를 영화화하면 어떨까 한다고 했었거든요. 지금은 폭력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지옥의 제7환을 배경으로, 자기 작품 속 인물들을 주인공 삼아 열심히 하드보일드 영화를 찍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출처 :  http://cafe.naver.com/openbooks21/895

 

『전화』 편집자 노트 제3부

- 『전화』 속 단편들 : 『전화』를 읽은 독자들에게

 

★ 먼저 밝힙니다.

1. 이 노트에는 단편집 『전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2. 이 노트는 옮긴이와 열린책들 볼라뇨 편집자가 대담을 나눈 후, 옮긴이의 생각들을 편집자가 정리한 것입니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첫 단편집 『전화』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전화>는 5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양한 작가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역시 5편의 단편이 실린 제2부 <형사들>은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폭력의 근원,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의 양상에 대한 볼라뇨식 탐구라 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4편의 단편이 수록된 제3부 <앤 무어의 삶>은 앤 무어를 비롯한 네 여성의 삶을 뒤쫓는다.

  

옮긴이 박세형, 열린책들 볼라뇨·심농 편집자 김뉘연        


 

제1부. 전화

 

■ 센시니

바르셀로나의 야영장에서 야간 경비를 보다 잘린, 쥐 새끼보다 가난한 20대 청년이 한 문학 공모전을 통해 스페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아르헨티나 작가 루이스 안토니오 센시니와 연이 닿는다. (글쓰기가 아닌) 공모전에 정진하라는 다소 이상한 편지로 시작하는 이들의 서신 교환을 둘러싼 두 작가의 인연은 과연 어디까지 지속될까. <공모전 사나이>로 거듭나는 이 문학 청년은 센시니를 쫓고, 우리는 이 청년을 쫓는다. 실제로 쿳사 재단이 후원하는 산세바스티안 단편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

 

볼라뇨가 말하는 볼라뇨

1980년대 초 스페인과 중남미는 어떤 곳이었을까? 1983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해. 중남미 <붐boom> 세대가 인정받고 그들의 작품이 두루 공유되었던 시절. 스페인 프랑코 정권의 독재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가 도래했던 시절.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위시한 <모비다movida> 운동 등 바야흐로 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했던 시절. 그리고 중남미의 몇몇 국가에서는 아직도 독재 정권이 굳건하던 시절. 단편 「센시니」는 이런 상황에서 그 당시 스페인에 머물렀던 어느 두 중남미 작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중남미 문학이 <소설의 죽음>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었지만, 스페인으로 망명한 여러 중남미 작가들은 (요즘 말로) <듣보잡>과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이 단편에 등장하는 수많은 작가들의 이름은 이 같은 역사적 상황을 환기하는 기호들이다).

모든 종류의 문학상에 단편을 응모하며 마드리드에서 간신히 삶을 유지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원로 작가 센시니. 주인공 센시니는 실존 인물이었던 아르헨티나 소설가 안토니오 디 베네데토(1922~1986)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1983년 발렌시아 시가 주관한 알팜브라 단편 경연 대회에서 서로를 알게 된 볼라뇨와 안토니오는 이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았다. 작중 센시니가 썼다는 단편은 볼라뇨가 해당 공모전에 보낸 단편(북한과 접한 국경의 시골 마을에서 요양을 하다 자살하는 중국군 장교의 이야기이다)과 비슷한 측면이 있으며, 센시니가 작품 제목을 바꿔 가며 공모전에 응모한 에피소드 또한 볼라뇨 자신의 경험을 빗댄 것이다.

볼라뇨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이 당시 볼라뇨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혼자 살았고, 친구들도 거의 만나지 않았으며, 돈이 없어 단편 공모전에서 생계를 유지했던 시절.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그때, 무명의 젊은이 볼라뇨는 우연찮은 기회에 칠레 시인 엔리케 린과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가볍게 시작된 서신 교환은 훗날 이 편지들을 묶어 출간하자는 제안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양으로 불어났다(볼라뇨는 엔리케 린이 <생명의 은인>이었다고 되뇌며, 자신의 단편집 『살인 창녀들』에 포함된 단편 「엔리케 린과의 만남」에서 그때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그러므로 이 단편 「센시니」는 지옥과도 같았던 작가 지망생 시절 청년 볼라뇨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어쩌면 단편 가운데 드러나는 센시니 및 그 세대 작가들에 대한 평가는 볼라뇨가 자신의 글에 내리는 은근한 평가일는지도 모른다. <간결하고, 지적이며, 독자를 자기 작품의 공모자로 끌어들이는 작품>. 물론 볼라뇨가 <간결하고>, <지적인> 작가인지에 대한 견해는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독자를 공모자로 끌어들이는> 작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공모>라는 것이 행복한 일인지, 고달픈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센시니」는 실제로 쿳사 재단이 후원하는 산세바스티안 단편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현실은 허구를 완성하고, 허구는 현실을 창조한다.

★ 기억해둘 이름, 그레고르 잠자. 주인공 센시니의 아들 그레고리오 센시니는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변신」 속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이름을 따왔다. 카프카에 대한 이러한 암시는 훗날 볼라뇨의 단편집 『참을 수 없는 가우초』의 어느 단편에도 등장한다.

 

■ 앙리 시몽 르프랭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일어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실패한 작가이다. 파리의 저속한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지방 잡지에 시나 단편 나부랭이를 발표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 가는 작가라는 말씀이다. 원고를 보낼 때마다 퇴짜를 맞는 이 작가는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이후 자신의 영토(조국)가 어디인지 깨닫는다. 그가 발을 디뎌야 할 곳은 엉터리 작가들과 원한에 사무친 작가들, 곧 삼류 작가들의 땅인 것이다.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르프랭스는 단순한 운반이나 소규모 테러 등을 감행하며 글쟁이들을 돕지만, 이상하게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정의할 수도 없는 거부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르프랭스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삼류 작가라는 것을 끝내 인정한다. 동시에 일류 작가들도 삼류 작가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 용기 있는 자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실패한 작가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실패한 작가의 삶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앙리 시몽 르프랭스는 실패에 이골이 난 미혼의 중년 남자다. 삼류 작가인 그가 끝까지 살아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볼라뇨의 또 다른 작품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 용기 있는 작가들의 <나쁜 예>들을 모아 놓았다면, 앙리 시몽 르프랭스는 용기 있는 작가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그렇다. 답은 <용기>다.

용기 있는 시인 르프랭스는 자신을 인정하고 할 일을 해낸 끝에 결국 몇 가지 권리를 쟁취해 낸다. 볼라뇨는 이 소설이 하나의 도덕적 우화라고 이야기한다(혹은 시인의 윤리에 대한 우화로 볼 수도 있겠다. 『칠레의 밤』 주인공, 이바카체 신부를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 르프랭스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삼류 작가라는 것을 끝내 인정한다. 그렇지만 일류 작가들도 삼류 작가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변변찮은 작가들은 그저 독자나 시동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말이다. 르프랭스는 훌륭한 작가들의 목숨을 구해 내면서(아니면 그저 도와주면서) 스스로 몇 가지 권리를 쟁취했음을 알게 된다. 글귀를 끼적거릴 수 있는 권리, 실수할 수 있는 권리, 문예지 두세 곳에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권리.>

용기 있는 자의 삶은 이렇게 흘러간다.

★ 앙리 시몽 르프랭스에게 한 젊은 여성 작가가 말한다. <당신의 얼굴이며 말하는 방식과 눈길에 많은 사람들의 거부감을 자아내는 무언가가 있어요. (……) 당신은 모습을 감추고 수수께끼 같은 작가가 되어야 해요. 작품에 당신의 얼굴이 배어나지 않게 하려면요.> 감추는 것. 어쩌면 이것이, 볼라뇨 작품 전체를 읽는 하나의 알레고리일지 모른다.

 

■ 엔리케 마르틴

엔리케 마르틴은 1953년생으로 카스티야어와 카탈루냐어로 시를 쓴 시인이다. 전력투구로 모든 의지와 노력을 쏟아 부으며 간절하게 시인이 되기를 열망했던 남자다. 고집스러운 집념, 까짓 거 다 덤비라는 기세로 친구에게 암호문을 작성해 보내곤 하던 그는 벽을 가득 채운 숫자들, 해독 불가능한 수식, 이어 다음의 한 마디를 남긴 채 자살한다. <아는 자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소포 하나. 소포 안에는 2절지 크기의 종이 50장이 들어 있었다. 모두 손으로 직접 쓴 시 뭉텅이였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또 다른 용기 있는 자

<시인은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볼 라뇨는 시인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로 단편 「엔리케 마르틴」의 문을 연다. 이는 (앞선 단편 「앙리 시몽 르프랭스」에 이어) 다시 <용기>에 대한 이야기다. 무슨 일이든 참아내는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를 쓰는 이들. 볼라뇨에게 시인이란 그런 사람이다.

이 단편은 볼라뇨가 자신의 친구였던 스페인 작가 엔리케 빌라마타스(1948~ )에게 바치는 작품이다. 등장인물인 시인 엔리케 마르틴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이 내용과 엔리케 빌라마타스와의 연결고리가 흥미롭다. 볼라뇨는 친구 빌라마타스가 쓴 소설 중 자살에 관한 단편을 모은 『모범적인 자살들Suicidios ejemplares』을 단편 작가 지망생의 필독서로 꼽은 바 있기 때문이다(이 단편집 가운데 특히, 평생 동안 숨겨 오던 자신의 작품을 출판사의 손에 맡기고 사라지는 작가를 다룬 단편 「사라짐의 예술」과 함께 읽을 수 있다).

엔리케 마르틴은 그렇다면 무엇을 견뎌 낸 건가? 침실 벽 한가득 크고 작은 숫자들을 적어 놓고, 들보에 대롱대롱 매달린 시인. 이 시인은 화자인 동갑내기 친구, <나>에게 무언가를 남기고 떠났다.

<몇 달 뒤에 나는 집을 떠나게 되었다. 암캐는 함께 데려갈 예정이었고, 고양이들은 이웃집에 입양시킨 터였다. 떠나기 전날 밤에 엔리케가 맡긴 소포를 열어 보았다. 수식이나 약도, 또는 그의 죽음을 설명해 줄 만한 표시가 있으리라 기대했다. 소포 안에는 깔끔하게 제본한 2절지 크기의 종이 50장이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지도나 암호문 따위는 없었다. 모두 손으로 직접 쓴 것으로 미겔 에르난데스나 레온 펠리페, 블라스 데 오테로나 가브리엘 셀라야를 모방한 시들뿐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내가 도망칠 차례였다.>

평생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시인은 끝까지 숨어서 무언가를 썼다. 그런데 어떻게든 숨어서 쓴 시가 자기 것도 아닌 남의 시였다는 사실……. 작가라는 이들의 운명을 생각한다면, 작가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이제는 내가 도망칠 차례였다>는 화자의 말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 볼라뇨가 세상을 뜬 후 그의 컴퓨터에서 한 편의 시가 발견되었다. 엔리케 빌라마타스에게 바치는 시였다. <우리의 말들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역시 빌라마타스에게 헌정된 이 소설과 그 끝이 닮았다. 그나저나 친구에게 자살한 이야기를 바치다니. 볼라뇨와 빌라마타스는 세상 누구보다 절친했거나, 혹은 원수였으리라.

  

■ 문학적 모험

작가 B는 알아볼 수 없게 가면을 덧씌워서 작가들을 조롱하는 책을 쓴다. A와 같은 특정한 유형의 작가들을 조롱하는 단편집이다. 그는 어떤 단편에서 동갑내기 작가 A와 엇비슷한 인물을 그려낸다. 무엇보다 명성을 얻었고, 다음으로 돈까지 쥐었고, 심지어 독자층도 두터운 작가 말이다. 명성이나 돈과는 거리가 멀고 삼류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는 B와 천양지차인, 성인군자인 양 점잔을 빼는 A의 글을 그악스런 독자인 B는 도저히 참아 줄 수 없다. B는 단편 중 하나에서 A를 이름을 바꿔 조롱하는데, A는 신문에 이 작품을 열렬히 칭찬하는 글을 발표하고, B의 책은 소리 없는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다. B는 A를 만나러 간다.

 

거울 앞에 서다

볼라뇨는 『아메리카의 나치문학』 등의 출간과 함께 제도에 진입한다. 그리고 로물로 가예고스 상을 수상한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성공한 작가의 반열에 올라선다. 제도에 저항하며 혁명을 꿈꿨던 젊은 시절 친구들의 눈에는 아마 고깝게 보였을 것이다. 볼라뇨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어떤 식으로 변명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제도 안에 진입한 작가가 계속 제도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단편 「문학적 모험」의 B는 기성 문단에서 성공한 작가 A를 조롱하는 글을 쓴다. 하지만 B는 A의 열렬한 지지를 등에 업고 문단에 안전하게 진입한다. 결국 B가 A를 만나기에 이르는 과정은, B가 제도권에 진입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제도를 둘러 싼 거부감과 이끌림은 A라는 인물을 대하는 B의 심리 변화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A(아르투로)와 B(벨라노)가 만난다면? 작품은 제도의 문턱에 이르는 아르투로 벨라노의 모습을 묘사하며 끝을 맺는다. 이후에 아르투로 벨라노가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글쎄, 로베르토 볼라뇨에게 물어볼 일이다. (* 아르투로 벨라노 : 로베르토 볼라뇨의 얼터 에고. 『전화』 속 여러 단편을 비롯해 볼라뇨의 여러 작품에 등장한다.)

이 단편을 볼라뇨의 자기 풍자로 읽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앞선 단편 「센시니」와 비교해 본다면? 자신이 쓴 단편의 제목을 바꿔 가며 여러 공모전에 두루 응모해 받은 상금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작가 센시니의 방식은 제도에 대한 완벽한 조롱이자, 작가 A로 대표되는 성공한 작가들을 조롱하는 글을 쓰는 작가 B의 방식보다 현명해 보인다. 작가 B는 그 자신 또한 제도 안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면서도 제도에 완전히 포섭되지는 않으려 하는, 일종의 미꾸라지와도 같은 존재다. 그 가운데 자신을 정당화하는 태도에 대한 풍자, 이것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볼라뇨의 시선일 것이다.

A를 만나기까지 한없이 증폭되던 B의 심리적 공포와 더불어 긴장감 가득히 진행되던 이야기는 문득 허무하게 멈춰 버린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던 분위기가, 너무도 빤한 결말로 치닫는다. 사실 이렇게 <정지된 상태>로 결말을 짓는 방식은 볼라뇨 단편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볼라뇨식 얼음땡 놀이라고나 할까.

★ B가 공포를 느끼는 대상은 과연 무엇일까? 이 단편은 작가 B가 제도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제 막 제도권 안에 발을 들인 작가 B가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작가 A를 조롱한 사실이 알려지면 입장 곤란해 질 수 있다. 이제 막 꽃을 피우려는 문학적인 커리어가 졸지에 막을 내릴 수도 있다는 공포감, 혹시 이 공포가 전이되어 A라는 사람에 대한 막연한 공포로 둔갑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문제다.


■ 전화

B는 X를 사랑한다. 물론 불행한 사랑이다. X는 B에게 전화로 이별을 통보하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다. 어느 날 밤 B는 두 통의 전화를 거쳐 X와 통화하는 데 성공한다. 스페인 땅의 끝과 끝. B는 X의 도시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그리고 도착해서 사랑을 나누고, 돌보고, 떠나 달라고 요구받고, 떠나고, 다시 전화한다. 그리고 B가 앞으로 다시는 전화하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즈음, 어느 날 누군가 B의 집 문을 두드린다. 사흘 전에 스페인 땅 한쪽 끝에서 누군가 X를 살해했다고 한다. B는 다시 X의 도시로 향한다. X의 오빠를 만나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오고, 일주일 뒤 범인을 알리는 전화를 받는다. B는 덩그러니 홀로 남는다.

 

얼굴을 보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이 행위의 전제는? 현재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편집 『전화』와 같은 제목의 단편 「전화」 속 주인공들 또한 마찬가지다. 옛 연인이었던 B와 X는 전화를 통해 이별하고, 전화를 통해 다시 만난다. 그리고 다시 헤어진다.

X와 다시 헤어진 B는 X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지만, 끝내 X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흔해 빠진 이야기다. 애처롭기는 하지만 빤한 이야기다.> X의 얼굴을 보지 못한 B가 대신 본 얼굴은 살인자의 얼굴이다. B는 꿈속에서, X를 살해한 이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거울을 바라본다. 혹시, B가 살인자인 건가?

「전 화」는 모종의 살인 사건을 전개해 가는 가운데 읽는 이의 긴장감을 쥐락펴락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심리 소설 성격을 띤다. 볼라뇨가 독자의 심리를 가지고 논다고 할 수 있겠다.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사랑 이야기가 흘러가는 가운데 B의 이상한 꿈 이야기, X의 묘한 태도 등이 불쑥 튀어나와 그 흐름을 어긋나게 한다. 빤한 사랑 이야기를 빤하지 않게 만드는 방식. 단편 「전화」는, 단편집 『전화』와 닮았다.

★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 못해 전화를 거는 이들. 그들이 보게 되는 얼굴은 결국 자기 자신의 얼굴이다. 거울 앞에 선 자들이 여기 있다.

 

제2부. 형사들

 

■ 굼벵이 아저씨

크리스탈 서점과 소타노 서점을 오가며 책을 훔치고, 오전 10시면 시내 영화관에서 조조 영화를 보곤 하던 내 이름은 아르투로 벨라노이다. 나는 아침이면 크리스탈 서점에 처박혀 책을 되작이다가 알라메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는 아저씨를 보았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나무 틈에 앉아 조용히 허공을 응시하는 아저씨의 모습은 하얀 굼벵이 같았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눈을 계속 뜬 채 담배만 뻐금뻐금 빨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서점 근처 공원 안쪽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볼라뇨가 실제로 멕시코시티에 살 때 자주 들렀던 서점들, 그리고 단편의 화자처럼 손버릇이 나빴던 청년 볼라뇨를 둘러싼 추억.

 

어느 <책 도둑>의 기억

볼라뇨가 쓴 동명의 시와 비슷한 내용으로 구성된 이 단편은 볼라뇨가 작품 가운데 내내 집착했던 공간, 멕시코 북부의 자그마한 마을 비야비시오사를 배경에 깔고 있다[볼라뇨는 (<굼벵이 아저씨>와 같은) 살인자들만 있는 마을, 비야비시오사의 연대기를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볼라뇨의 초기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2666>의 배경으로도 등장하는 이 멕시코 북부는 멕시코와 미국과의 경계에 자리한 지역으로, 살인 사건과 마약 밀매 등 온갖 범죄의 온상인, 중남미에서 가장 하드보일드한 공간. 20세기의 폭력과 악에 주목했던 작가 볼라뇨가 당연히 관심을 가졌을 법하다(신자유주의로 인해 몰락한 멕시코를 지켜보며, 이 나라를 현대적인 악의 공간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겠다). 우리 또한, 앞으로 출간될 볼라뇨의 작품 가운데 이 멕시코 북부가 어떻게 묘사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이 단편 역시 「센시니」와 같이 볼라뇨의 자전적 경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여기서의 볼라뇨는 좀 더 젊다. 멕시코시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볼라뇨는, 단편 속 화자처럼 손버릇이 나빴다. 볼라뇨는 그의 에세이집 『괄호 치고』에서 책을 훔치는 건 도둑질이 아니라고, 젊었을 때 누구나 다 해봐야 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자기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책을 둔 서점 직원 때문에 자신의 교양에 문제가 생겼다는 그의 말에 도리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본문에서처럼 실제로 멕시코시티의 동명 서점 2곳을 번갈아 들락거렸던 볼라뇨는 주로 크리스탈 서점에서 책을 훔치곤 했는데, 어느 날 소타노 서점에서 훔치다 걸린 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한편 칠레에서는 책값이 싸서 그냥 샀다고 한다).

이 단편과는 크게 상관없지만 서점과 얽힌 의미심장한 에피소드 하나. 칠레의 쿠데타 직후, 젊은 볼라뇨가 조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서점에 들러 오래된 프랑스 소설들을 되작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서점 주인이 <어떤 작가가 사형수에게 자신의 책을 읽으라고 권할 수 있겠는가> 하고 볼라뇨에게 묻는다. <사형수의 무릎 위에 한 권의 소설을 올려놓을 배짱 있는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괄호 치고』 속 에세이, 「배짱 있는 자가 누구냐」 중에서). 공 포가 만연한 시대적 상황 가운데 과연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폭력 앞에서 작가들은 과연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청년 볼라뇨는 서점 주인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서둘러 책방을 빠져 나온다. 어쩌면 『칠레의 밤』을 비롯한 볼라뇨의 몇몇 작품들은 이 서점 주인의 질문에 대한 뒤늦은 답변일지도 모른다.

★ 당시 청년 볼라뇨를 뒤흔든 소설, 알베르 카뮈의 『전락』 또한 작중 그대로 인용된다. 볼라뇨 애독자를 자청하는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칠레의 밤』과 함께 읽기에 좋은 소설이라고 한다.

 

■ 눈

나는 5년 전에 바르셀로나 타예르스 거리의 술집에서 그 친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친구도 이역만리 땅 칠레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깡마른데다 키는 똥자루만 하고 피부는 가무잡잡한 사내, 로헬리오 에스트라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칠레 공산당의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을 아버지로 둔 그는 1974년 정초에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에 도착. 체육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체육 교사가 됨. 로저 스트라다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사고를 치고 다닌 그는 어떤 운동선수 코치의 조수로 일하며 뒷돈으로 월급을 불렸다. 스포츠 도박, 마약과 매춘 알선에 몸담고 암시장과 유흥업소를 오가던 그는 모스크바 갱들과 어울리다가 보스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 보스를 죽인다. 우여곡절 끝에 바르셀로나로 건너와 사립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근무하게 된 그는 다시 창녀들과 몸을 섞고 술집을 드나든다. 그리고 밤이 되면, 러시아와 모스크바를 그리워한다.

 

시대의 초상

『전화』 3부에 수록된 단편 「앤 무어의 삶」에서 세계 각 지역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군상들을 그렸듯이, 볼라뇨는 이 단편 「눈」에서도 그 당시의 (칠레가 아닌 다른 나라) 러시아를, 스탈린 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주의의 물결이 도래하면서 마피아들이 사회를 장악하기 시작했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 칠레 쿠데타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유랑 생활을 시작한, 외국인이자 이방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볼라뇨의 그림자가 구석마다 어른거린다. 더불어 이제 칠레를 넘어서 동시대의 다른 세상으로 눈을 돌리는, 점차 그 반경이 넓어져 가는 볼라뇨 소설의 궤적 또한 엿볼 수 있다. 칠레인인 주인공이 (같은 언어권인 스페인이 아닌) 러시아에 망명해 살다가, 이어 (스페인어를 쓰는) 바르셀로나로 건너가, 칠레가 아닌 러시아를 그리워하는 생경한 감수성이 의외의 재미를 안긴다. 화자와 주인공이 5년 전 처음 만났다는 바르셀로나 타예르스 거리는 볼라뇨가 실제로 자주 갔던 곳이라고 한다.

★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화자는 뜬금없이 러시아 장군 추이코프의 이름을 언급한다. 볼라뇨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가장 큰 사치는 <책상용 전쟁 게임 대컬렉션과 컴퓨터용 전쟁 게임 소컬렉션>이라고 밝힐 정도로 전쟁,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볼라뇨의 이러한 관심은 이 두 단편뿐 아니라 장편소설 『먼 별』과 『제3제국』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 또 다른 러시아 이야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전선에서 싸웠던 청색 사단 소속의 병사 이야기. 세비야 출신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러시아 땅까지 이르게 된 그는 자신을 일컫는 <코르체(신병)>이라는 단어를 <찬트레(성가대 지휘자)>라는 단어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정말로 성가대 지휘자가 된다. 이어 부상을 당해 군 병원에 입원했다가 엉뚱한 기차표를 지급받고 나치 친위대 파병 대대에 도착한 그는 러시아 병사들의 습격을 받는다. 그런데 고문 중에 그가 내뱉은 <코뇨(씨발)>이라는 단어가 <쿤스트(예술)>로 둔갑해 그들 귀에 들어가고, 병사는 살아남는다.

 

볼라뇨식 블랙 유머

푸른색 윗도리의 제복을 입어 <청색 사단>이라 불렸던 스페인 부대가 독일 군복으로 갈아입고 히틀러를 돕는다면, 이제 이 부대는 무슨 사단이라 불려야 할까? 어쨌든 청색 사단 소속의 한 신병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전선에서 겪었던 우여곡절을 다룬 이 이야기는 14편의 단편 중 그 분량이 가장 짧다. 그리고, 볼라뇨는 이 짤막한 이야기 가운데 그만의 위트를 절묘하게 녹여낸다. <코르체corche(신병)>이라 불리던 사내가 <시간의 흐름과 일상적인 공포가 작용해> 이 단어를 <찬트레chantre(성가대 지휘자)>라 받아들이고, 종내 성가대 지휘자가 되는 이야기. 고문을 받던 중 스페인어로 <코뇨coño(씨발)>라고 외친 그의 절규가 <입에 물린 집게 때문에> 대기 중으로 나오면서 독일어 <쿤스트Kunst(예술)>로 둔갑한 이야기. 그러므로 이 단편은 볼라뇨식 블랙 유머의 정수를 넘어선, 예술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일 수도 있겠다.

결국, 이 신병은 살아남았다.

★ 러시아 병사들은 이 신병을 고문하면서 집게로 혀를 잡아당기고 짓이겨 댄다. 그런데 사실 그 집게는 독일인들이 신체의 다른 부분을 고문할 때 사용하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신체의 다른 부분>은 어디일까? 정답을 맞힌 분들은 발톱을 깎아드립니다.



■ 윌리엄 번즈

캘리포니아 주 벤투라 출신의 윌리엄 번즈가 소노라 주 산타테레사의 경찰 판초 몬헤에게, 몬헤가 다시 화자에게 들려준 이야기. 인생의 암울했던 시기에 윌리엄 번즈는 두 명의 여자를 따라나선다. 또래의 나이 지긋한 여자, 그리고 새파랗게 젊은 여자. 윌리엄 번즈는 산동네 변두리로 휴가를 떠나는 그녀들을 한 살인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길을 따라나선다. 그녀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를 피해 다니고, 이 남자로부터 그녀들을 지키겠다고 나선 윌리엄 번즈는 우여곡절 끝에 살인자가 되고, 결국 여섯 달 뒤 신원 불명의 사람들에게 살해당한다.

 

얼굴 없는 공포

한 명의 화자, 두 명의 여자, 세 마리의 개,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자. 단편 「윌리엄 번즈」는 심리적 공포에 대한 아주 멋진 탐구라 할 만하다. 「윌리엄 번즈」에 드리워진 공포에는 실체가 없다. 여자들 스스로 설정한 살인자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이 화자인 윌리엄 번즈에게 전이되고, 이 실체 없는 공포심에 전염된 윌리엄 번즈는 결국 살인자의 자리에 선다. 하지만 등장인물 모두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진짜 살인자는 누구인가? <얼굴 없는 공포>라는 주제는 볼라뇨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미 『먼 별』을 읽은 독자들은 카를로스 비더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 주인공 윌리엄 번즈와 두 여자가 머무는 집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 <그렇게 수많은 창문이 달려 있는 집은 평생 처음 보았어요. 제각각 크기가 다른 창문들이 제멋대로 자리 잡고 있었죠. 밖에서 보면 창문의 개수로 미루어 삼층집이 아닌가 생각하기 십상이었어요. 실제로는 이층집이었죠. 집 안에 들어서서 창문을 바라보면 어지럽고 흥분이 일면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거실 쪽과 1층의 침실에서 바라볼 때 특히나 그런 느낌이 강했죠. 여자들이 제가 묵을 방으로 정해 준 곳에는 창문이 두 개밖에 없었어요. 위아래로 그다지 크지 않은 창문 둘이 자리 잡고 있었죠. 위쪽 것은 천장에 닿을 만한 높이에, 아래쪽 것은 지상에서 두 뼘도 되지 않는 높이에 나 있었어요.> 이것은 실제 존재하는 공간에 대한 묘사일까? 혹은 화자의 머릿속을 그대로 옮겨 놓은 공간일까?

 

■ 형사들

칠레 형사 두 명이 나누는 대화 형식의 단편. 선호하는 무기 이야기부터 시작해 그들 손을 거쳐 간 여러 범죄자들 이야기, 그리고 1973년 <그날>에 그들이 <이 나라의 진정한 남자들>을 죽인 이야기에 이어 열다섯에 멕시코로 건너갔다가 스무 살 때 칠레로 돌아온, 볼라뇨를 모델로 한 인물인 고등학교 동창 아르투로 벨라노를 만났던 이야기까지 주절주절 늘어놓는 두 형사의 잡담.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도 한 줌의 희망은 있다.> <희망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지.> <희망만이라도 소중히 지켜 내야지.>

 

조용한 칠레인

두 명의 형사가 나누는 대화로만 구성된 단편 「형사들」에는 스무 살 볼라뇨가 조국 칠레에 돌아갔다가 쿠데타 중 콘셉시온 근처에서 (그의 멕시코 억양이 경찰의 관심을 끄는 바람에 어이없이) 체포되어 투옥되었던, 그리고 마침 어릴 적 친구였던 간수의 도움으로 8일 만에 석방되었던 극적인 사건이 녹아 있다. 두 형사의 대화 중반부터 주요 내용으로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 이름은 아르투로 벨라노. 볼라뇨의 얼터 에고이다. 당시 볼라뇨는 실제로 8일 동안 구치소에서 지내다가 학창시절 친구였던 그를 알아본 두 간수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는데, 이 두 간수가 바로 두 형사들이다.

「형사들」의 두 형사는 칠레 사람들을 두고 <조용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볼라뇨의 장편소설 『칠레의 밤』에서, 화자 이바카체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나는 평생 그리 말했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질 도덕적 의무가 있으니까. 심지어 자기 침묵, 그래 그 침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침묵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에게 들리고, 오직 그분만이 침묵을 이해하시고 판단하시니까. 그러니 침묵에도 아주 주의해야 한다.> 이렇게 볼라뇨는 암울한 정치적 상황 앞에 그저 묵묵히 서 있는 칠레인들에게, 그 <침묵>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라고 일갈한다. 또한 볼라뇨가 바라보는 <침묵의 나라> 칠레는, <남자다운 사람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앞의 단편 「굼벵이 아저씨」 관련 내용에서 언급됐던) 볼라뇨의 에세이 제목이자 서점 주인의 질문이 떠오른다. <배짱 있는 자가 누구냐?>

볼라뇨는 당시의 끔찍했던 시대 상황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그 당시를 살아냈던 사람들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편을 즐긴다. 사건 자체보다는 그 사건에서 비롯되는 사람들의 경험을 주목하는 것이다. 이 단편에서 아르투로 벨라노는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끔찍한 공포를 겪고 난 후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기는 벨라노도, 콘트레라스도, 아란시비아도, 칠레인들도, 어쩌면 우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렇게 변명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잖아!>

 

제3부. 앤 무어의 삶

 

■ 감방 동지

우리는 같은 해 같은 달에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서로 다른 감옥에 있었다. 1950년에 빌바오에서 태어난 소피아는 갈색 피부에 키가 작달막하고 매우 아름다운 여자였다. 1973년 11월에 내가 칠레에서 체포되었을 때, 소피아는 아라곤의 감옥에 수감된 상태였다. 당시에 소피아는 사라고사 대학에서 생물학인가 화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몇 명을 제하고 동기생 전부가 감옥에 가게 되었다. 이 두 잠자리 친구, 그리고 그녀의 또 다른 잠자리 친구인 공산당 친구, 전남편 에밀리오와 그의 애인 누리아를 둘러싼 이야기. 어느 날, 소피아는 작별 쪽지를 남긴 채 훌쩍 떠난다. 그리고 그녀가 새 애인과 함께 에밀리오를 죽이려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나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소피아를 만나러 간다.

 

감방은 우리의 방

세계 각 지역에서 삶을 살아가는 동세대에 대한 볼라뇨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단편. <감옥>이 세대적 동질성을 대변하는 단어였던 시절, 나와 소피아는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감옥에 갇혔던) 감방 동지, 그리고 잠자리 친구다. 이 남다른 관계의 흐름을 그린 이야기는 독특한 구성 방식으로 눈길을 끈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붉은색 벽으로 둘러싸인 천장이 드높은 방, 퓌레 포대를 쌓아두고 물에 덩어리를 개어 끼니를 때우고 온갖 약을 섭렵했던 소피아, 소피아의 또 다른 잠자리 친구였던 20대 공산당 당원, 어느 날 불쑥 소피아를 찾아온 옛 남편 에밀리오와 그의 애인 누리아, 소피아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공산당원 후안, 그리고 유령처럼 헤매다 어느 날 작별을 알리는 쪽지를 두고 사라진 소피아. 이렇게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문득 이상한 행동을 일삼는 소피아의 뒤를 쫓던 나는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소피아를 보게 된다. 그리고 내가 소피아의 집을 찾아가는 순간, 이야기는 실로 기이한 방향으로 전환한다. 그리고 잔뜩 긴장된 분위기가 고조되던 이야기의 후반부는, 소피아의 <순간적이었지만 완벽한> 미소와 더불어 급격히 일상으로 돌아온다(1부의 마지막 단편 「문학적 모험」과 유사한 구조이다). 독자를 가지고 노는 볼라뇨의 능수능란함이 무서울 정도인가? <그러고 나서 우리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 피자 가게에서 저녁을 먹었다.> 빤하다면 빤한 마무리가 오히려 두려움을 자아낸다.

★ 애인의 행방을 묻는 내게 소피아는 미소로 답한다. <떠났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런데 방 하나가 자물쇠로 닫혀 있다. 혹시 소피아는 여성판 <푸른 수염>인 것일까?

 

■ 클라라

클라라는 풍만한 가슴에 다리가 가느다란 푸른 눈의 여자였다. 나는 미친 듯이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스페인 남부 도시로 돌아가자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당시 클라라는 열여덟이었고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에 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하며 은퇴한 풍경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는 중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미인 대회에 참가한다는 편지가 왔다. 나는 2등으로 입상한 클라라를 만나러 갔지만 결국 클라라는 시집을 간다. 그리고 1년인가 2년 후에 이혼을 하고, 다른 남자와 동거했다 바람을 피워 헤어지고, 그 사이사이 우울증에 시달린다. 그리고 이혼남 파코를 만나 재혼해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암에 걸린 클라라는, 어느 날 돌연 사라진다.

 

이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이다.

★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볼라뇨의 남성 화자들. 그들의 모습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 조안나 실베스트리

서른일곱 살의 포르노 배우, 조안나 실베스트리가 지금 님므의 레트라페즈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침대 맡을 지키는 어떤 칠레 형사의 이야기를 듣는 참이다. 이 남자는 누구를 찾는 것일까? 조안나 실베스트리는 1990년 즈음 자신이 인생의 정점을 달렸던 기억을 되짚어 본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를 촬영했던 기억. 그 기억 가운데 캘리포니아 최고의 포르노 스타였던, 그러나 지금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잭 홈스가 있다. 이제 조안나는 병든 잭을 만나러 간다. 볼라뇨의 장편소설 『먼 별』의 한 부분을 확장한 작품.

 

우리 모두는 유령이다

볼라뇨의 장편소설 『먼 별』의 8장 속 에피소드와 짝을 이루는 이 단편의 화자 조안나 실베스트리는 서른일곱 먹은 포르노 배우다. 조안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 한 칠레 형사에게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독백조로 읊어 댄다. 남성 화자를 통해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세 편의 단편과 다르게, 이 단편은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 집에는 시계가 없어>라는 잭의 말처럼 조안나 실베스트리의 이야기는 과거의 LA와 현재의 님므를 하나로 엮어 낸다. 하지만 우리의 포르노 배우가 독자들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다른 어느 단편보다도 더 애틋한 사랑 이야기이다. 조안나가 그려 내는 잭 홈스의 모습은 포르노 배우라기보다 은둔자나 성자에 가깝다. 볼라뇨가 주변인의 삶에 바치는 경의의 표시일까?

조안나가 다른 포르노 배우들과 벌이는 행각들을 지켜보는 잭 홈스의 모습은 『먼 별』에서 카메라 뒤에서 영화를 촬영했던 R. P. 잉글리시의 모습과 일견 겹쳐 보이기도 한다. 현장에 실제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이 모두를 바라보고 지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잭 홈스의 모델이었던 실존인물 존 홈스는 배우로 활약하면서 형사 역할을 맡아 유명세를 얻은 바 있다. 병원으로 조안나를 찾아온 형사 로메로의 모습과도 겹치는 부분이다.

어쩌면 수수께끼의 답은 이미 나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안나는,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자신은 유령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말미에 고백한다. <우리는 모두 유령이에요. 너무 빨리 유령 영화 속으로 들어와 버렸죠.> 조안나의 지극히 유용한 충고. 유령을 쫓는 자 또한 유령이 되고야 말 것이다.

★ 볼라뇨는 포르노 영화배우와 포르노 산업의 이면에 관심이 많았다. 독자들은 앞으로 출간될 볼라뇨의 단편집 『살인 창녀들』에서 또 다시 이 주제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형사 로메로 씨는 볼라뇨의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공포(악)는 필연인가 우연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 앤 무어의 삶

앤 무어라는 한 여성의 일기와도 같은 이야기. 1948년 시카고에서 태어나고 3년 뒤 몬타나 주로 이사해 그곳에서 성장한 앤은 언니 수전의 남자 친구가 부모님을 살해한 사건과 얽힌, 평탄하면서도 기묘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열일곱 때 학업을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앤은 화가인 폴을 만나 동거하다 멕시코로 여행을 떠나고, 루벤이라는 한 남자와 친하게 지내게 되고, 결국 앤은 루벤과 함께 머문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찰스라는 흑인과 사귀고, 금세 헤어진다. 그리고 한국인 토니를 만난다. 토니와는 결혼까지 했지만 또다시 헤어지고, 토니는 자살한다. 그 소식을 들은 다음 날 아침 앤은 멕시코시티로 향한다. 너무 많은 남자를 만나고 너무 많은 직업을 전전했던 앤은 불현듯 스페인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앤을 만난다.

 

여자의 일생

『전화』 제3부를 아우르는 타이틀과 동명인 단편 「앤 무어의 삶」. 이 단편의 스케일은 한 편의 장편소설을 방불케 한다. 볼라뇨는 장편에 마땅한 소재를 단편에 담아내는 실험을 택했다. 볼라뇨의 장편소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속 단편 「라미레스 호프만」과 유사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단편은 앞선 단편들에 이어 세계 각 지역의 동세대 사람들을 향한 볼라뇨의 관심이 드러나는 또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다. 1960~70년대 미국과 중남미 지역 젊은이들의 삶이, 앤 무어의 삶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더불어 비트 세대에 대한 향수 또한 간간이 어른거린다. 물론 지나치듯이 언급되는 미국 여성 작가들의 이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볼라뇨가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배운 스승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 앤이 사귀었던 남자로 한국인 토니가 등장한다. 토니는 포르노를 즐겼고, 일벌레였고, 논쟁을 피했다. 볼라뇨가 한국 남자를 만난 적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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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6.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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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 세르카스, [살라미나의 병사들]에서



초기에 인터뷰한 사람 중에는 로베르토 볼라뇨도 있었다. 볼라뇨는 칠레 출신의 작가였는데, 오래전부터 블라네스에서 살고 있었다. 그 해안가 마을은 바르셀로나와 헤로나 사이의 국경 마을이다. 47세였다. 등 뒤로는 상당한 수의 장서들이 있고, 히피 잡상인 같은 아주 개성 있는 분위기로, 유럽에 망명 와 있는 자기 세대의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에게 골칫거리로 여결질 법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방문하기 바로 전 중요한 문학상을 수상했고, 받은 상금으로 블라네스 시내의 카레 암플라 거리에 있는 현대식 아파트를 하나 사서, 부인과 아들 하나와 함께 살고 있었다. (188쪽)


볼라뇨 씨는 차와 토스트를, 나는 커피와 물을 주문했다. 우린 대화를 나누었다. 볼라뇨 씨는 지금 자기는 여러 가지 상황이 좋다고 말했다. 자기 책으로 수입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20년 동안 거지보다 더 가난했었다고 말했다. 아주 어릴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온갖 일을 했다(비록 글 쓰는 것 외에 일다운 일은 한 적이 없었지만). 아옌데 시절 칠레에서 혁명에 동참했고, 피노체트 시절에는 감옥에 있었다. 멕시코와 프랑스에서 살았다.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몇 해 전에는 아주 위험한 수술을 받았는데, 그 후로는 블라네스에서 은둔자처럼 글을 쓰는 것 외에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은 일체 하지 않고 가족들하고만 지내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190쪽) 

 
그는 차를 입으로 후후 불며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다시 찻잔을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이봐요, 내가 솔직하게 얘기하죠. 수년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난 아옌데를 욕했어요. 모든 잘못이 그 사람한테 있다고 생각했지요. 우리한테 무기를 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한 내 자신을 욕합니다. 기가 막히게도, 그 인간은 우릴 자기 자식처럼 생각한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살해되길 원하지 않았던 거지요. 만약 우리에게 무기를 주었더라면 우린 파리 목숨이었을 겁니다." 다시 잔을 잡으면서 말을 마쳤다. "결국 아옌데는 영웅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럼 영웅이란 뭡니까?"
  그 질문에 댕황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한 번도 그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아니, 어쩌면 늘 그 질문을 자신에게 해오고 있었던 것처럼. 그는 잔을 든 채 언뜻 내 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항만으로 돌리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나서 어깨를 들썩했다.
  "모르겠네요. 그는 말을 이었다. "자신을 영웅이라고 믿고 그렇게 잘 해내는 사람. 아니면 선(善)에 관하여 용기와 본능을 가지고 있어서 결코 실수하지 않는, 아니 적어도 실수해서는 안 되는 유일한 순간에 실수하지 않기에 영웅이 아닐 수 없는 사람. 혹은 아옌데처럼 영운은 사람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죽이지 않는 자, 죽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자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 모르겠네요. 당신이 보기에 영웅은 어떤 사람입니까?" (...)
  "모르겠는데요. 존 르카레에 따르면, 영웅의 기질을 가져야만 기품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죠."
  "그래요. 하지만 기품 있는 사람과 영웅은 같지 않죠." 볼라뇨 씨는 즉각 반박했다. "기품 있는 사람은 많아요. 필요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죠. 영웅은 반대로 아주 적습니다. 사실, 내가 보기에 영웅의 행동에는 거의 언제나 뭔가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본능적인 것이 있습니다. 뭔가 자기 본성 속에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지요. 게다가 사람은 평생토록 기품 있는 사람이 될 수는 있으나, 지속적으로 숭고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웅은 단지 예외적으로 어느 한 순간만 영웅인 것입니다. 아니면 고작해야 광기와 영감을 지니는 일정한 기간 동안에만요. 아옌데가 바로 그랬어요. (191-193쪽)


(...) 볼라뇨 씨는 다시 그 인터뷰 기사도 언급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슨 작품을 쓰고 있느냐고 물었다. 글을 쓰지 않고 있는 작가에게 요즘 어떤 것을 쓰고 있느냐는 질문처럼 신경을 거스르는 것은 없기에, 나는 약간 심기가 불편해져서 대답했다.
  "아니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듯 볼라뇨 씨한테도 신문에 글을 쓰는 것은 글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덧붙였다. "저는 이제 소설은 쓰지 않습니다." 나는 콘치를 떠올리며 말했다. "전 상상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죠."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 없습니다." 볼라뇨 씨가 말했다. "단지 기억이 필요합니다. 소설은 기억을 조합하면서 쓰이지요."
  "그렇다면 전 기억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발한 척하면서 설명을 했다. "지금 저는 신문기자입니다. 말하자면 행동가죠."
  "그게 아닌데요." 볼라뇨씨가 말했다. "행동가는 곧 작가가 되려다 좌절한 사람이지요. 만약 돈키호테가 기사도와 관련된 책을 한 권이라도 썼더라면 결코 돈키호테가 되질 못했을 겁니다. 저 또한 글 쓰는 것을 배우지 못했더라면 지금쯤 FARC(각주: Fuerzas Armadas Revolucionnarias de Colombia. 콜롬비아의 반정부혁명군)와 함께 총이나 쏘고 있겠지요. 게다가 진정한 작가에겐 결코 작가라는 신분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비록 글을 쓰지 않는다 해도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제가 진정한 작가라고 생각하시죠?"
  "책다운 책을 두 권 쓰셨잖아요."
  "젊은 객기지요."
  "신문은 안 치나요?"
  "치지요. 하지만 즐거움을 위해 신문에 글을 쓰지는 않습니다. 단지 생계 수단이지요. 게다가 신문 기자와 작가는 같지 않고요."
  "그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가 인정했다. "좋은 신문 기자는 항상 좋은 작가입니다. 하지만 좋은 작가가 좋은 신문 기자인 경우는 거의 없죠."
  나는 웃었다.
  "기발하지만 틀린 말씀입니다." 내가 말했다. (195-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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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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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쓰는 기술에 대한 조언(Consejos sobre el arte de escribir cuentos)



아래 글은 로베르토 볼라뇨가 직접 쓴 글이다. '단편소설 쓰는 기술에 대한 조언' 정도로 해석하면 되려나. 우리나라에 번역된 볼라뇨의 단편집 [전화] 중 "엔리케 마르틴"이란 단편은 볼라뇨가 스페인 작가 엔키레 빌라마타스에게 선물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붙어 있는 역주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볼라뇨는 빌라마타스가 새로운 세대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평가하며 단편집 [모범적인 자살들Suicidios ejemplares](1991)을 단편 작가 지망생의 필독서로 꼽은 바 있다"

이 주석과 관련된 내용이 아래 글에서 나온다.


출처 : http://www.enriquevilamatas.com/obra/l_suicidiosejemplares.html


나도 어느덧 마흔네 살이나 먹었으니 단편소설 쓰는 기술에 대해 몇 가지 조언을 해보겠다.

1. 한 번에 한 편씩 단편소설을 쓰지 말라. 솔직하게 말해, 죽는 날까지 똑같은 단편소설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2. 좋은 방법은 세 편을 동시에 쓰는 것이다. 다섯 편을 동시에 써도 좋다.

3. 주의할 점: 두 편을 동시에 쓰는 것에 대한 유혹은 한 번에 한 편씩 쓰는 데 전념하는 것만큼 위험하다. 하지만 작품 안에 불공평하고 끈적끈적한 거울 연인 놀이가 배태된다. (* 작품들 간의 자기 복제를 말하는 것 같다.)

4. 키로가를 읽어야 하고 펠리스베르토 에르난데스와 보르헤스를 읽어야 한다. 룰포몬테로소,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읽어야 한다. 자신의 작품에 약간이라도 평가가 있는 단편작가라면 절대 셀라움브랄을 읽어서는 안 된다. 코르타사르비오이 카사레스를 읽는 건 맞지만 어떤 식으로든 셀라와 움브랄은 아니다.

5. 혹시나 싶어 한 번 더 반복한다. 셀라와 움브랄은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안 된다.

6. 단편작가는 용감해져야 한다. 그걸 받아들이는 일은 슬프지만 그게 사실이다.

7. 단편작가들은 Petrus Borel을 읽었다는 것을 자만하곤 한다. 사실상 많은 단편작가들이 Petrus Borel을 모방하려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엄청난 착각이다! 그들은 Petrus Borel이 입는 것을 모방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진실은 그들이 Petrus Borel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이다. 고티에에 대해서도 모르고 네르발에 대해서도 모른다!

8. 좋은 점: 우리는 의견이 일치한다. Petrus Borel처럼 옷을 입고 Petrus Borel을 읽자. 하지만 쥘 레나르Marcel Schwob 또한 읽자. 특히 Marcel Schwob을 읽고 알폰소 레예스를 지나 보르헤스까지 가야 한다.

9. 진실은 에드가 앨런 포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을 모든 것이 충분히 있다는 점이다.

10. 9번에 대해서 생각하자. 누구든 9번을 생각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무릎을 꿇고라도.


11. 강추할 만한 책과 작가들. 롱기누스의 [숭고에 관하여]. 불행하지만 용감한 필립 시드니의 소네트들, 로드 브루케가 쓴 필립 시드니의 전기. 에드가 리 마스터가 편집한 스푼 리버 선집. 엔리케 빌라마타스의 [모범적인 자살들].

12. 이 책들을 읽고, 체호프와 금세기(*20세기)가 낳은 최고의 단편작가 두 명 중 하나인 레이먼드 카버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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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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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뇨 애호 작품들/작가들


"볼라뇨는 2003년 간 부전으로 세상을 뜨기 전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자신이 애호하는 작품들을 밝힌 바 있다. 볼라뇨의 표현대로 <5천 권에 버금가는> 다섯 권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멜빌의 <모비 딕>, 보르헤스 전집, 코르타사르의 <팔방놀이>, 툴의 <저능아들의 동맹>(* <바보들의 결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리스트는 계속된다.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 자크 바셰의 <전쟁의 편지들>, 알프레드 자리의 <위비 전집>, 조르주 페렉의 <인생 사용법>, 프란츠 카프카의 <성>과 <심판>, G. C. 리히텐베르크의 <잠언집>,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 리비우스의 <로마사>, 그리고 파스칼의 <팡세>. 아르헨티나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로드리고 프레산이 말한 그대로, 볼라뇨의 작품에서 유일한 주인공, 그의 책들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문학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는 볼라뇨다. <읽는 것은 언제나 쓰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작가들 사이에서라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법한 볼라뇨의 이 말은,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말이다. 그러나 볼라뇨가 숨을 거둔 바닷가 소도시 블라네스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나갔는지 또한 알 필요가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북쪽으로 60킬로미터쯤 떨어진 그곳에서 볼라뇨는 하찮은 장신구 장사로 밥벌이를 했다. 그리고 밤이면 두꺼운 공책에 하루 장사를 결산한 후, 바닥에 엎드려서 글을 썼다(그는 책상이 없었다). <좋은 글쓰기란 어둠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 줄 아는 것, 허공 속으로 뛰어들 줄 아는 것, 문학이 기본적으로 위험한 소명임을 아는 것이다.> 다시, 볼라뇨의 말이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에서)


"그때 로헬리오가 우리 쪽 술자리로 다가오더니 미하일 불가코프야말로 의심할 여지없는 20세기 최고의 작가라고 말했다. 카탈루냐 친구들 중에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와 [극장 소설](*[극장]으로 번역)을 읽은 사람도 있었지만, 로헬리오는 저명한 소설가가 쓴 다른 작품의 제목을 러시아어로 인용했다. 내 기억으로는 열 권도 넘었던 것 같다." ([전화], 123-124쪽)


"나는 책을 펼쳤다. 후안 카를로스 비달이 번역한 <브루노 슐츠 전집>이었다. 나는 읽으려고 시도했다. 책을 몇 장 넘겨보고 나서 내가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읽기는 했지만 단어들은 이해할 수 없는 갈겨쓴 글자들처럼 지나갔다." ([아메리카의 나치문학], 200쪽)


"논쟁의 여지가 없는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볼라뇨가 '엉터리 작가'라고 깎아내린 이사벨 아옌데의 경우를 들어 보자. 아옌데는 [엘 파이스]와의 인터뷰(2003년 9월 3일)에서 이렇게 반격했다. "저는 심하게 상처받지는 않았어요. 볼라뇨는 모든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했으니까요. 다른 사람에 대해 좋은 말이라고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저는 그가 죽었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불쾌한 신사 분이었죠." 아옌데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한 작가를 '엉터리 작가'라고 부르는 일은 작가로서의 존재 자체ㅡ 완저히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라뇨가 아옌데를 작가로서 공격한 반면에 아옌데는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볼라뇨를 인격적으로 모독했다.

이사벨 아옌데의 단언은 볼라뇨가 훌륭하다고 평가한 작가의 목록(그는 자신이 존경한 작가 조르주 페렉처럼 목록 작성하기를 좋아했다)를 열거하게끔 부추긴다. 보르헤스, 비오이 카사레스, 부스토스 도메크, 실비나 오캄포, 로돌프 윌콕, 코르타사르, 마누엘 푸익, 코피, 니카노르 파라, 엔리케 린, 곤살로 로하스, 호르헤 에드와르즈, 때때로 호세 도노소, 후안 룰포, 세르히오 피톨, 카를로스 몬시바이스, 후안 마르세, 알바로 폼보, 리카르도 피글리아. 뻔한 이름들이지만 안과 밖의 경계가 분명한 하나의 지도를 그려볼 수 있다. 기준은 첫째로 문학에 대한 열정이고, 둘째로, 마틴 에이미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투적인 것과의 전쟁이다.

하지만 볼라뇨가 동 세대 및 젊은 작가에게 바친 폭넓고 탐닉적인 독서를 아마도 더 의미 있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볼라뇨가 1990년대 세대의 스페인어에 나타나는 단절의 의지라 명명한 현상에 부합하는 작가들이다. 면면을 조금 살펴보자. 페르난도 바예호, 세사르 아이라, 알란 파울스, 로드리고 프레산, 로드리고 레이 로사, 후안 비요로, 다니엘 사다, 카르멘 보우요사, 호르헤 볼피, 엔리케 빌라 마타스, 하비에르 마리아스, 페드로 레메벨, 로베르토 브로드스키. 이제는 그림이 더 분명해졌다."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 20-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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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2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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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뇨 포레버!


어쩌자고 이런 어려운 글을...

이 글을 쓴 작가는 아니나 다를까 하비에르 세르카스. 제목만 봐도 딱 알겠네, 누가 볼라뇨 빠돌이 아니랄까봐. (나는 이 시점에서 어찌하여 세르카스를 잔뜩 질투하고 있는 건가...) 어쨌거나 현재 내 수준엔 너무 어려운 문장들이었다. 같이 스페인어 스터디 하는 아르아르 아르마니임 덕분에 그나마 혼자서는 해결 못했던 여러 문장을 해석할 수 있었다. 첫째 문단 말미는 생략... ( -_-)


원문 출처 : http://www.elpais.com/articulo/portada/Bolano/forever/elpepusoceps/20090405elpepspor_2/Tes


유령이 라틴 아케리카 문학판을 떠돌고 있다.
그 유령은 하나의 질문이다. 그 질문은 미국(과 모든 지역)에서 로베르토 볼라뇨의 사후 대성공의 원인은 무엇인가이다. 사람들은 그의 엄청난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정기적으로 들려오는 성공에 관한 소식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가장 최근의 소식으로는 [2666] - 볼라뇨의 유고 작품 - 이 지난 3월 전미 서평가 연맹에서 수여하는 2008년에 출간된 최고로 좋은 소설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평을 받고 진정한 베스트셀러가 된 후에 말이다. 그런 모든 일들은 외국문학에 방어적인 그런 나라에서는 대단히 예외적인 것이다. 유령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론 매우 여러 가지다. 북아메리카에서 볼라뇨가 성공한 원인을 그의 때이른 죽음 때문이라고 읽었다. 그의 주위에 비운의 전설이 이미 만들어졌다는 것 때문이라고도, 정치적 추구나 문학적인 소외나 헤로인 집착의 허구적인 부분 때문이라고도 읽었다. 북아메리카에서 볼라뇨가 성공한 원인을, 볼라뇨가 북아메리카 작가가 되는 어떤 방식, 그러니까 그의 문학적인 모델이 북아메리카인이며 그의 소설은 스페인어보다는 영어에서 더 잘 기능하기 때문이라고도 읽었다. 북아메리카에서 볼라뇨가 성공한 원인을, 볼라뇨를 발견한 북아메리카의 대형 출판사가 그를 북아메리카에서 성공시키기 위해 이런 모든 일들을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도 읽었다. 더 많은 답변을 읽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볼라뇨의 성공 가치를 깎아내리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건 궁극적으로는 중요한 게 아니지만, 볼라뇨의 다른 작품에 대한 가치도 깎아내리기 위해서 고안되었다는, 이건 중요하다, 당혹스러운 감정을 발생시켰다. 고백하자면 난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때이른 죽음을 맞은 작가도 많고 볼라뇨만큼 성공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아마 현재에도 없을 거라는 비운의 그런 전설에 둘러싸인 작가들도 많다. 자신의 문학적인 모델이 북아메리카인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는 북아메리카 작가인 작가들도 많이 있지만 볼라뇨만큼 성공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아마 현재에도 없을 것이다(볼라뇨의 작품이 스페인어보다 영어에서 더 잘 기능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더 잘 설명해주는데 사실 이렇게 이렇게 말하는 건 조금 우스운 일이다). (*네 문장 같은 한 문장 생략)


사실 유령 같은 질문은, 내가 생각하기에, 잘못된 질문이다. 올바른 질문은 아마도 다른 데 있을 것이다. 여러분 모두는 볼라뇨를 이미 읽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읽지 않았다면, 한 번만, 지금까지 했던 말들은 다 없었던 걸로 하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달라. 지금 당장 이 기사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장 가까운 서점으로 달려간다. 진열창을 발로 걷어차 부셔버리고, 볼라뇨의 아무 책이나 집어든다. 책과 진열창에 대해 경건한 마음으로 보상을 하고 다가올 며칠을 볼라뇨의 책을 읽는 데 투자한다. 그러면 다음의 내 올바른 질문에 아마도 동의할 것이다. 볼라뇨는 왜 죽고 나서야 성공했는가가 아니라 왜 살아 있을 때 성공하지 못했는가. 물론, [2666] - 미국과 다른 모든 지역에서 그를 신화화한 유고 작품 - 은 예외적인 소설이지만,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먼 별]과 [아메리카에서의 나치문학]과 다른 단편집들과 현실에 천착하여 위대한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전지전능한 기계가 된 순간부터
그가 쓴 모든, 아니 거의 모든 작품들 역시 특별하다. 그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명예라는 차원에서 그것은 사실 아무 가치가 없다. 읽힌다는는 것으로 볼라뇨는 충분히 위대하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인생 말미에도 소수자의 강한 특권을 향유하기는 했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책들이 그의 수도자 같은 수수한 삶에서 그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때때로, 나를 슬프게 한다. 거짓말이다. 그것은 너무한 현실처럼 보인다. 그러나 단지 나에게만, 때때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사실 볼라뇨는 살면서 절대적인 성공을 알았다. 그것은 유령 같은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며 올바른 질문처럼 보이는 첫 번째 질문 역시 잘못된 질문이라는 의미이다. 모든 진정한 작가는 성공과 실패(혹은 성공과 실패라고 곧잘 부르곤 하는 것)가 신기루라는 것을 안다. 최고의 작가들, 좋은 작가들, 보통의 작가들, 안 좋은 작가들, 최악의 작가들이 그것을 갖고 있다는 것이 증거다. 아니면 다른 식으로도 말할 수 있다. 모든 진정한 작가는 진정한 성공과 실패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시릴 코놀리는 이렇게 썼다. "작가의 진정한 임무는 걸작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을 창조하는 데 성공하는 작가는 극소수이다. 내가 봤을 때 볼라뇨는 그런 작가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비교할 수 없는 글쓰기의 강렬함을 시도했다. 단지 하나의 걸작에서가 아니라 여러 작품들에서. 볼라뇨와 비교하여 더 찬양 받을 만한 성공을 할 수 있는 작가가 없다는 것을 볼라뇨보다 내가 더 잘 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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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25.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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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뇨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로물로 가예고스 상 수상


 어색한 부분이 많아서 속상하지만...

 원문 출처 http://www.elpais.com/articulo/cultura/BOLANO/_ROBERTO_/ESCRITOR/PREMIO_INTERNACIONAL_ROMULO_GALLEGOS_/LITERATURA/Bolano/gana/Premio/Romulo/Gallegos/detectives/salvajes/elpepicul/19990703elpepicul_4/Tes


 작가 볼라뇨(칠레 산티아고, 1953)가 소설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어제, 900만 페세타 이상의 상금이 주어지는 국제 로물로 가예고스 상을 수상했다. 작가에 의하면, 상을 받는 것은 순전히 운의 문제다. 스페인에서 20년 동안 정착해온 볼라뇨는 자신의 소설을 이렇게 정의했다. "섹스, 마약, 락앤롤이 있는 모험 소설." 이 소설은 로물로 가예고스 상과 함께 다른 문학상(1998년에 에랄데 상)을 받았다.

 작가는 "일반적으로 이런 일들은 운의 문제예요. 다른 작품들처럼 그렇게 나쁜 소설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도 엄밀하게 말해서 그건 운이죠"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이력에 다른 수상 경력을 보탰다. 칠레 산티아고 시 상이다. 그의 조국에서 수여하는 가장 중요한 상들 중 하나이다. 스페인, 멕시코, 미국, 리베리아, 이스라엘, 비엔나, 앙골라, 프랑스 등지에서 전개되는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작가와 마찬가지로) 50년대에 태어난 세대의 멕시코 충격impulso mexicano(라틴 아메리카의 충격에 대한 메타포)에 대한 소설이다. 작가에 의하면, 이 소설은 다음의 특징들로 정의할 수 있다. "어떤 노마디즘, 이상적인 혁명으로의 인도, 유토피아와 모든 변화에 대한 소망. 즉, 맨손으로 이룩한 혁명."

 그리고 이후에 오는 것은 패배예요, 그러나 그것 역시도 삶이죠, 라고 자신을 낙천주의자로 여기는 볼라뇨가 덧붙였다. 그래서 최소한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있어요, 라고 말했다. 비록 하루 24시간 내내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는 말도 더하기는 했지만. "그건 일종의 세속적인 신화 속에서 당신을 빛나게 할 거예요. 하지만 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라고 작가는 단언한다. 그의 최근 소설은 [부적]이 두달 전에 출간됐다. 다음엔 [소돔의 현자들Sabios de Sodoma](*볼라뇨 작품 목록에 나오지 않는데 출간되면서 제목이 바뀐 것 같다)이라는 타이틀의 이야기 책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에랄데 상(200만 페소의 상금이 주어진다)을 주최하는 호르헤 에랄데는 볼라뇨의 소설을 "wellesiano 스릴러"로 정의했다. 자전적인 요소가 담긴 [야만스러운 탐정들]에는 혁명 시기에 사라진 멕시코 여성 작가를 찾는 남자 주인공 두 명이 있다. 그녀를 찾고자 그들은 1976년부터 1996년까지 20년에 걸쳐 노력한다. 이 내용은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수많은 모험 중 하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소설에는 많은 읽을거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볼라뇨가 말하길, "그들과 나는 무장 혁명을 시도한 세대에 속해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존재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불가능한 시도였죠. 소설은 20년을 따라 나이가 들어가는 두 명의 남자에 대해 다뤄요." 로물로 가예고스 상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상 중 하나로 간주된다. [도시와 개들]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1964년에 처음 이 상을 수상했다. 이듬해는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받았다. 지금까지 이 상을 받은 스페인 작가는 하비에르 마리아스가 유일하다. 1995년에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로 받았다. 베네수엘라에서 수여하는 이 상(보통 150명 이상의 작가들이 참여한다)을 받은 유일한 여성 작가는 앙헬레스 마스트레타이다. 1997년에 [사랑의 불행]으로 받았다. 로베르토 볼라뇨는 오후에 수상 소식을 전해듣고 이렇게 말했다.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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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20. 11:05


POST : Etcétera

볼라뇨 만세!


  오늘 2011년 7월 15일은 볼라뇨가 죽은 지 8년째 되는 날이다. 현재 가장 애정하고 있는 작가인데 그의 기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이렇게 스페인 기사 하나를 한국말로 옮겨봤다. (아직 스페인어 접속법도 모르는 수준이라 이 짧은 글에도 틀린 부분이 많을 텐데... 혹시 수고를 무릅쓰고 지적해주시면 감사히 고치겠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작가 하비에르 세르카스. 우리나라에는 그의 작품 [살라미나의 병사들]이 번역돼 있다. [살라미나의 병사들]은, 간단히 말하자면 스페인 내전을 다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이런 간단한 언급은 이 소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지만 요지는 그게 아니라), 마지막 3부에는 볼라뇨가 직접 소설 속에 등장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르카스는 자신의 작품에 볼라뇨를 등장시킬 만큼 그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이다. 그 애정은 아래 글에서도, 무엇보다 글의 제목에서부터 느낄 수 있다. 자기도 번듯한 작가이면서 볼라뇨 만세라니...

 아래 옮겨둔 글은 세르카스가 98년에 EL PAIS라는 신문에 쓴 글이다. 그가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이후에 볼라뇨가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스페인 및 라틴아메리카 소설판에 어마어마한 돌풍을 몰고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5년 후에 볼라뇨가 그렇게 죽을 것이라는 것 역시.

 
원문 출처 (http://www.elpais.com/articulo/cultura/BOLANO/_ROBERTO_/ESCRITOR/PREMIO_HERRALDE_DE_NOVELA/Viva/Bolano/elpepicul/19981103elpepicul_6/Tes)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작가였다. 오래 전 히라노에서였다. 그곳은 오랫 동안 볼라뇨가 살았던 곳이다. 친구 한 명이 그를 내게 소개해줬는데 나처럼 작가가 되길 원하던 친구였다. 하지만 한 줄도 쓰지 못한 상태였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볼라뇨와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있진 않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안다. 내 친구가 볼라뇨에게 소설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냥 가는 거죠. 근데 어디로 갈지는 몰라요." 그 말이 내게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왜나하면 그건 진정한 작가의 말 같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이 사람이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없는, 히피 잡상인 - 잡동사니를 팔며 시장바닥을 걸어다니는 사람들 - 의 분위기를 풍긴다고 확신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난 진정한 작가란 쓸쓸한 관료들처럼만 옷을 입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치 프란츠 카프카가 그랬던 것처럼. 물론 나는 틀렸다. 그러나 많은 해가 지난 후에서야, 그보다 여러 해 전에 볼라뇨의 이름과 히피 잡상인 같은 그의 사진을 연관 짓지 못한 채, 질투와 선망을 동시에 하면서 그의 여러 책들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시 한 번 히라노에서 그를 만났다. 이번엔 [전화](*볼라뇨 단편집 제목) 출판 기념회에서였다. 볼라뇨를 나에게 소개해준 친구 작가가 역시 있었다. 나는 볼라뇨와 겨우 악수했고 그와 네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오래 전에 내가 알고 있던 그 사람과 같다는 것, 그리고 그의 첫 소설은 갔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당연히 나는 그날 볼라뇨에게, 그를 처음 봤을 때 그가 진정한 작가가 될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틀렸다는 부끄러움을 숨기고자 나는 그의 주변에서 밤새도록 뛰어다니며 보냈다. 쓸쓸한 관료처럼 옷을 입은 채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볼라뇨 만세!"

요즘은 작가들이 불운한 자서전을 개발하는 것이 유행이다. 볼라뇨는 그걸 개발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삶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그는 히로나를 포함, 정말 믿기 어려운 곳들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세계의 여러 시장들에서 잡동사니를 파는 일을 포함해, 정말 번잡스러운 일들을 해왔다. 사실상, 진실한 그 어떤 작가들처럼, 그는 자신의 삶에서 단 하나의 일만 해왔다.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은 성취되지 않았지만 지금 현재 카탈란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가들 중에 하나가 되는 일은 성취됐다. 그는 몇 년 전에 아주 어려운 수술을 받았다. 그 이후 블라네스에서 은둔자처럼 살았다. 거기서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완성시켰다. 그는 히피 잡상인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살면서 술을 많이 마셨다. 지금은 오직 쓰기 때문에 가까스로 산다. 술은 거의 마시지 않고 미린다만 마신다. 그건 꽤 번거로운 일인데 왜냐하면 그 상한 음료를 이제 아무도 제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에랄데 상을 받았다. 그 소설을 읽지 않았기에 그것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대신 분명한 점은, 볼라뇨가 에랄데 상에 보답했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들에게도 역시 보답해왔다. 무척 고마운 일이다. 아, 잊을 뻔했다. 볼라뇨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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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15.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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