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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6] 미리보기


다음은 볼라뇨의 소설 [2666]의 일부입니다. 나타샤 위머Natasha Wimmer가 영역한 판본 120쪽에서 123쪽의 내용이고요. 가독 편의상 임의로 한 줄씩 띄웠습니다. 번역의 조악함 탓에 글 말미에서 노튼이 말하는 것처럼 무슨 내용인지 이해 못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겠... 


*******

"하지만 그럼 아르힘볼디는 왜 여기에 왔을까?" 노튼이 물었다.

"친구 때문이겠지. 친한 친구. 아르힘볼디가 여행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만큼이나 친한 친구." 펠티에르가 답했다.

"우리가 만약 틀렸다면? 알멘드로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혼동했거나 아니면 누군가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면?" 노튼이 말했다.

"알멘드로 누구요? 엑토르 엔리케 알멘드로?" 아말피타노가 말했다.

"바로 그 사람이에요. 그 사람 알아요?" 에스피노자가 물었다.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닌데요, 그래도 알멘드로에게 그렇게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말피타노가 말했다.

"왜죠?" 노튼이 물었다.

"글쎄요, 그가 전형적인 멕시코 지식인이기 때문이랄까. 그의 주요 관심사가 그럭저럭 살아남는 거거든요." 아말피타노가 답했다.

"그건 모든 라틴 아메리카 지식인의 주요 관심사 아닌가요?" 펠티에르가 물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들 중 일부는 글쓰기에 좀 더 관심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아말피타노가 말했다.

"무슨 뜻인지 말해봐요." 에스피노자가 말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는데," 아말피타노가 말했다. "그건 오래된 이야기에요. 권력을 가진 멕시코 지식인의 관계에 대한. 그들이 전부 똑같다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일부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긴 하죠. 그 사람들이 나쁜 신념에 굴복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에요. 아니면 완전히 굴복해버렸을 수도 있고요. 당신은 그게 단지 직업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들은 국가를 위해서 일하고 있어요. 유럽에선, 지식인들이 출판사나 논문 때문에 일하죠. 그들의 부인이 그들을 지원해주거나 그들 부모가 부유해서 그들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태주죠. 아니면 그들은 노동자거나 범죄자예요. 그들은 자신의 일을 하면서 정직하게 살죠. 멕시코에선, 그리고 이건 아마 전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일 건데, 아르헨티나는 제외하고요, 지식인들은 국가를 위해서 일해요. 그건 제도혁명당(PRI) 밑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고, 국민행동당(PAN) 밑에 있는 거랑 같은 일일 거예요. 지식인 자신들은 국가를 보호하고 국가를 비평하는 데 열정적이겠죠. 국가는 신경 안 써요. 국가는 그들을 먹여살리고 말 없이 그들을 주시하죠. 그리고 써먹기 위해서 본질적으로 쓸모없는 작가들을 이 거대한 집단에 두죠. 어떻게 써먹냐고요? 그 집단은 악마들을 쫓아내고, 국가 정세를 바꾸죠. 최소한 흔들어버리거나요. 그건, 존재할지도 모르고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아무도 확신하지 않는 어떤 구멍을 석회로 덮어버려요. 물론 항상 이런 방식은 아니고요.

지식인은 대학에서 일을 할 수 있어요, 아니면, 더 좋은 건, 미국 대학에 일하러 가는 거죠. 거기 문학 학부는 멕시코에 있는 것만큼이나 안 좋아요. 하지만 그게 그들이 심야 전화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국가의 이름으로 말하는 누군가로부터의 전화나, 그들에게 더 좋은 직업, 더 좋은 연봉, 지식인들이 자신이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제공할 누군가로부터의 전화 말이에요. 그리고 지식인들은 항상 자신이 더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죠. 이런 메커니즘은 멕시코 작가들의 귀를 잘라내요. 그건 그들을 미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일본어를 모르면서 일본 시를 번역하려고 할 거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술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죠. 알멘드로는, 제가 아는 한 그는 양쪽 다예요. 멕시코에서 문학은 보육원 같아요. 유치원 같기도 하고 운동장 같기도 하고 어린이 클럽 같기도 해요. 날 따라오세요. 날씨는 좋고, 화창하죠. 당신은 나갈 수 있고 공원에 앉아 발레리 책을 펼쳐들어요. 아마 멕시코 작가들이 대부분 읽는 작가일 거예요. 그러고 나서 당신은 친구 집에 건너가서 대화를 나눠요. 하지만 당신의 그림자는 더이상 당신을 따라오지 않아요. 어떤 지점에서 당신의 그림자는 조용히 당신을 떠나버렸죠. 당신은 알아채지 않은 척할 수도 있지만 알고 있죠. 당신은 빌어먹을 그림자를 잃어버린 거예요. 비록 그 이유를 설명할 수많은 방법이 있긴 하지만 말이에요. 태양의 천사 때문이라고, 모자를 쓰지 않은 머리에 내리쬐는 태양에 의해 설득된 망각 때문이라고, 섭취한 알코올의 양, 보이지 않는 고통의 덩어리 같은 것의 움직임, 좀 더 우발적인 것들에 대한 공포, 눈에 보이기 시작한 질병, 상처 입은 허영, 당신의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제 시간에 도착하길 바라는 소망 때문이라고. 하지만 요점은, 당신의 그림자는 사라졌고, 당신은 순간적으로 그걸 잊는다는 거죠.

그러고 나서 당신은 그림자 없이 어떤 무대 같은 곳에 도착하게 되죠. 그리고 당신은 현실을 번역하거나 재해석하거나 노래하기 시작해요. 무대는 실제 고대 그리스 시대의 무대고 무대 안쪽엔 거대한 통로가 있어요. 갱도처럼 보이기도 하고 광산의 큼지막한 입구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걸 동굴이라고 부릅시다. 하지만 작동하고 있는 광산이에요. 광산 입구에서부터 이해할 수 없는 소음이 들려와요. 성유법적인 소음, 분노의 음절이거나 유혹의 음절이거나 유혹적인 분노의 음절이에요. 아니면 단지 중얼거리는 것이고 속삭이는 것이며 끙끙대는 거예요. 요점은,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것, 아무도 제대로 그 광산의 입구를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무대 기구, 빛과 그림자의 연극, 시간의 트릭이 관중의 응시로부터 입구의 실제 모습을 감춰버려요. 사실,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관객, 무대 맨 앞좌석에 바로 있는 관객은 짙은 위장의 장막 뒤에 있는 무언가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진짜 모습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건 무언가의 모습이죠. 다른 관객들은 무대 뒤에 있는 걸 아무것도 불 수 없어요. 그리고 그들은 그걸 보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하는 게 맞겠죠. 반면 그림자 없는 지식인들은 항상 관중을 바라보지요, 그래서 머리 뒤에 눈이 달리지 않은 이상 그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지요. 그들은 단지 광산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을 번역하거나 재해석하거나 재창조하지요. 그들의 작업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굉장히 수준이 낮죠. 그들은 허리케인이 감지되는 곳에 수사법을 고용해요. 그들은 고삐 풀린 격분이 감지되는 곳에서 달변가가 되려고 노력하죠. 그들은 방음 장치와 희망 없는 침묵만이 있는 곳에서 운율 훈련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죠. 그들은 삐약삐약 거리고 멍멍 짖고 야옹야옹 울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거대한 동물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거든요. 아니면 그러한 동물이 부재한다는 것을.

한편, 그들이 작업하는 무대는 굉장히 예쁘고 잘 꾸며져 있고 무척 매력적이에요, 하지만 그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작아지고 또 짝이져요. 무대가 이렇게 축소된다고 그게 망하는 건 아니에요. 그건 단지 작아지고 작아질 뿐이며 홀 역시 작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그걸 보는 사람들 수도 줄어들고 줄어들죠. 이 무대 옆에는 물론 다른 게 있어요.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타난 새로운 무대. 미술 무대예요. 굉장히 크고 관중의 수는 적어요. 비록 전부 우아하기는 하지만 말이죠. 더 괜찮은 말이 없네요. 영화 무대와 TV 무대도 있어요. 규모가 거대하고 홀은 항상 가득 차죠 그리고 매년 무대는 도약하고 튀어오르면서 커지고 있어요. 이따금씩 지식인들이 자신의 토크를 하던 무대 공연자들은 TV 무대 공연에 초대되기도 해요. 이 무대에서도 광산의 입구는 같아요. 관점이 살짝 바뀌었고 위장막이 더 두터워졌고, 역설적으로, 그래서 신비스러운 유머 감각을 반증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악취가 코를 찌르죠. 이런 유머러스한 위장막은 자연스럽게 많은 방식으로 해석됩니다만 결국엔 두 개로 줄어들어요. 대중의 편의를 위한 방식, 아니면 대중이 고르기 쉬운 방식으로.

때때로 지식인들은 TV 무대에 대해 영구적으로 저항하죠. 울부짖는 소리는 광산의 입구에서 계속적으로 들려오고 지식인들은 그것들을 계속해서 오해합니다. 사실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언어의 대가입니다만, 언어는 그들을 결코 풍요롭게 해주지 않아요. 그들의 최고의 말은, 제일 앞줄에 있는 관객들이 하는 말을 빌려다 쓰는 거예요. 이런 관객들을 "
채찍질하는 사람flagellants"이라고 부르죠. 그들은 병들었고, 이따금씩 무시무시한 말들을 만들어내며, 사망률에서는 정점을 찍어요. 하루 일과가 끝나면 극장은 문을 닫고 그들은 커다란 강철 시트로 광산 입구를 덮어버려요. 지식인들은 밤에는 철수합니다. 보름달이 뜨고 밤 공기는 굉장히 깨끗해서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몇몇 바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그 음색이 거래를 채워요. 때때로 지식인들은 길거리를 배회하고 술집 한 군데에 들어가 메스칼 주를 마시죠.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에게 어느 날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해요. 사실은 아니에요. 그는 아무 생각도 안 해요. 그냥 술 마시고 노래 부르죠. 때때로 그는 자신이 전설적인 독일 작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에게 실제로 보이는 건 전부 그림자예요. 어떨 땐 그에게 보이는 건 전부 자기 자신의 그림자예요. 그건 매일 밤 집으로 오기 때문에 그 지식인이 밧줄에 목을 매달지 않죠. 하지만 그는 독일 작가를 봤다고 맹세하죠. 자신의 행복과 질서 감각과 활기를, 죄의식 속에서도 야단 떨며 쉬고 있는 자신의 영혼을 봤다고 맹세합니다. 다음 날 아침, 날씨는 화창하죠. 태양은 빛이 나긴 하지만 뜨겁지는 않아요. 누구든 나가서 잘 쉴 수 있어요, 자신의 뒤꿈치에 그림자를 단 채로. 그리고 공원에 멈춰서서 발레리의 책을 조금 읽죠. 그렇게 죽을 때까지 말이에요."

"당신이 무슨 말 하는지 이해가 안 돼요." 노튼이 말했다.

"실은 그냥 헛소리를 늘어놓은 것뿐이에요." 아말피타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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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9. 12:37


POST : Entre paréntesis

심연으로의 산책(UN PASEO POR EL ABISMO)



멕시코에 대해 쓴 많은 소설 중 최고의 작품은 아마도 영국 작품이거나 미국 작품일 것이다. D.H. 로렌스가 시도한 주인공 소설(*[날개 돋힌 뱀]), 그리고 그레이엄 그린의 도덕 소설(*[권력과 영광]), 말콤 라우리의 총체 소설(*[화산 아래서]). 이들은 말하자면 혼돈에 집중하는 소설(이것은 이상적인 소설의 주제 바로 그것이다)이고, 그 혼돈을 정돈하려 하는 소설이며, 읽을 수 있게 하는 소설이다. 소수의 현대 멕시코 작가들은, 카를로스 푸엔테스와 페르난도 델 파소라는 가능한 예외와 더불어, 최근에서야 이러한 기획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러한 노력이 이전에는 금지되어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우리가 멕시코라고 부르는 그것이, 또한 숲이나 사막, 얼굴 없이 뒤섞여 있는 군중인 그것이, 마치 외국인들을 위해서만 예약된 영토라도 되는 것처럼.

로드리고 프레산은 멕시코에 대해 쓰기 위해 이런 저런 필요조건들을 충분히 완수한다. [만트라]는 만화경 같은 소설이고, 성난 유머로 뒤덮여 있는 소설이다. (이따금씩 과잉돼 있기도 하지만.) 이 소설은 멕시코 시티 새벽의 정신 착란 상태와 인류학적인 기록 사이를 오고가며, 굉장히 드물게 정확한 산문으로 씌어졌다. 멕시코 시티는 자신의 지하 밑바닥에 다른 도시들을 쌓아두고 있다. 마치 자기 자신을 삼켜버리려고 하는 뱀의 시도처럼.

이 소설은 외면적으로(내가 '외면적으로'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소설에서 모든 것이 외면적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소설의 각 부분들은 수학적인 정밀함으로 조립되어 있을지언정) 세 개의 큰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아르헨티나 소년이 화자로 나온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시간을 보내고, 이후 그가 있는 학교에 새로운 학생이 도착한다. 멕시코 아이인 새 학생은 1분도 지나지 않아 그 반의 리더로 희생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선생이 그를 혼자 내버려뒀을 때 실탄이 장전된 총으로 러시아 룰렛이라는 천재적인 (그리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게임을 하게 되면서. 그 아이 마르틴 만트라는, 바꿔 말하자면 앙팡 테리블의 화신이다. TV 연속극의 두 배우의 아이인 그는 마스크를 쓴 전(前)레슬러를 경호원으로 동행한 채 학교에 간다. 그리고 영화와 텔레비전 세계를 전복하려는 생각을 한다. 멕시코 - 이곳에서 그 놀라운 아이가 태어난다 - 의 앞날은 그 아이에 의해 그리고 화자로 나오는 아르헨티나 소년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 더불어 결코 정확하게 말해지지는 않았지만 이따금씩 질병이나 사회 붕괴처럼 보이는 무언가에 의해, 그리고 아마도 유년기의 결정적인 부재가 될 뿐인 무언가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된다.

이 1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은 과거의 영웅, 헤르바시오 비카리오 카브레라 (사후의) 장군이다. 그는 아르헨티나 독립 전쟁에서 싸웠던 덜렁대는 멕시코인이다. 그는 너무 조급한 판단으로 인해 총살당한 희생자이고, 이것은 3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인 어느 로봇과 같은 방식이다. 그 로봇의 망령은 [페드로 파라모]의 혼란스러운 일인칭 나레이션과 유사하게 보인다.

내 판단에 가장 훌륭한 2부는 소설에서 분량이 제일 많고 알파벳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멕시코 시티나 심연에 대한 백과사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2부는 또한 가장 많은 분량으로 144쪽에서 509쪽까지를 차지한다. 독서 방법은 열려 있다. 순서대로 읽을 수도 있고 좋아하는 글자를 찾아가며 볼 수도 있다. 이번에 화자는 프랑스인이다. 오직 마르틴 만트라가 하는 말만 들을 수 있는 프랑스인. 그는 죽기 위해서 그리고 죽이기 위해서
심지어는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누군가를 죽이고자 멕시코로 여행을 떠난다.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복잡한 구성 사이에, 조앤 볼머의 삶이 있다. 그녀는 남편인 버로스가 빌헬름 텔 연극에서 빌리엄 역할을 하던 중 (*오발 사고로) 멕시코 시티에서 죽었다. 그리고 마스크를 쓴 레슬러의 역사와, 마스크를 쓴 이런 레슬러들 중 한 명이 프랑스에서 만들고 싶어 했던 누벨 바그 영화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LIM(*el Lenguaje Internacional de los Muertos)의 역사, 즉 죽은 자들의 국제 언어 의 역사가 있고 멕시코 괴물들의 역사, 멕시코 포르노의 역사, 여성 락그룹 아노렉시아와 수스 플라키타스(*거식녀와 말라깽이들?)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미디어를 이용하며 세계 종말적인 게릴라처럼 활동한 마르틴 만트라의 역사가 있다. 물론 파리에서의, 프랑스인 화자와 멕시코 여인이 나눴던 사랑의 역사 또한 부족하지 않게 있다.

[만트라]의 말들을 무작위로 발췌해보자. "TV 연속극"이라는 항목에서 독자는 이런 내용을 읽을 수 있다. "TV 연속극은 마치 돌연변이 통신원과 같다." "TV 수상기" 항목에선, "네가 나에게, 죽은 자들이 보이는 이런 죽은 텔레비전의 상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너에게 답할 것이다(...) 자신의 눈을 다른 좀비들에게 먹으라고 주는 이런 화면에 나오는 좀비들의 상표는 좀비이다." "구토"라는 항목에선, "이렇게 조안 볼머가 나에게 말한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여러 담배를 피우면서 그녀가 나에게 말한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그것들은 다른 상표의 담배라고 말한다. 어떨 때는 일인칭 시점으로 말하고, 또 어떨 때는 삼인칭 시점으로 말하며, 간헐적으로는 지진이 난 것처럼 경련하면서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국제 언어(*LIM)이다."

그러니까 죽은 자들이 말하는 언어의 리듬은 진동과 닮아 있다. 그리고 [만트라]는, 겹겹이 쌓여 있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죽은자들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멕시코의 죽은자들, 저명한 사람부터 익명의 사람까지 전부다. 독자가 인지하게 되는 그 진동은 LIM의 진동이고, 이것들이 알파벳 순서로 쓰여 있는 한 언제든 소설이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인 3부는 미래적인 우화이다. 멕시코 시티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이런 폐허 속에서 누에바 테노치티틀란 델 템블로르라고 불리는 새로운 도시가 세워진다. 한 로봇이 이 이상한 도시의 줌심부로 돌아온다. 만트락스라고 하는 자신의 창조자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할 것이라고 그는 자신의 모체 컴퓨터와 약속했다. 명백하게, 우리는 [페드로 파라모]의 새로운 버전, 즉 룰포의 [페드로 파라모]와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위험천만한 만남 앞에 있는 것이다. 희생자의 비석 근처에서, 놀라운 결말을 지니고 있는.

최근 몇 년 동안 읽었던 소설 중 이렇게 감격스러운 소설은 드물었다. [만트라]를 통해 나는 더 많이 웃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은 나에게 대단히 고결하게 보이는 동시에 퇴폐적으로 보였다. 작가의 우울한 에너지는 바닥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항상 미학적인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절대 촌스럽거나 감상주의적인 것에 빠지지 않으며, 항상 스페인어권 문학에서 호평을 얻는다. 이 소설은 멕시코에 대한 소설이고, 사실상 모든 위대한 소설이 그런 것처럼 시간의 흐름에 대해, 그리고 꿈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해 진정으로 다루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이건 대단히 비밀스러운 분야인데, 문학을 만드는 기술에 대하여 다룬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깨닫지 못하지만.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307-310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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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2. 15:48


POST : Entre paréntesis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관하여(Acerca de [Los detectives salvajes])


제목에 딸린 각주에 따르면 다음 글은 "로물로 가예고스 상 시상식 입장객들에게 나눠줬던 프로그램 책자에 수록됐던" 것이다. (그나저나 하면 할수록 왜 점점 더 어려워지는 걸까...)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관하여

소설 한 편을 끝내는 일은, 크지는 않지만 어떤 즐거움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그중 하나는 그 소설에 대해 잊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점점 희미해져가는 꿈이나 악몽처럼 그것을 흐릿하게 기억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소설, 새로운 나날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더 잘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채로. 카프카 - 그는 금세기 최고의 작가다 - 는 옳았다. 그는 그의 친구에게 자신의 모든 작품을 불태워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브로트에게 했던 요청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연인이었던 도라에게도 했던 것이다. 브로트는 작가였고 카프카와의 약속을 완수하지 못했다. 도라는 덜 교육받았고, 아마도 브로트보다는 카프카를 더 좋아했을 것이며,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의 연인의 요청을 문자 그대로 실행했다고 간주한다. 그날 이후, 혹은 우리가 헛되이 그날 이후라고 믿고 있는 그날 이후, 특히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모든 작가들은 자신의 내부에 브로트와 도라라고 부르는 두 개의 악마와 천사를 가지게 된다. 항상 둘 중 하나는 다른 것보다 크다. 일반적으로 브로트가 도라보다 더 크고 잠재력이 있다. 내 경우는 다르다. 도라도 브로트만큼 충분히 크다. 도라는 내가 썼던 것을 계속해서 잊어버린다. 아무런
수치나 후회의 뒤틀림 없이 새로운 뭔가를 쓰는 데 전념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이제 어느 정도 잊혀졌다는 얘기다. 이 소설에 대한 약간의 코멘트 정도만 겨우 할 수 있을 뿐이다. 한편으로, 나는 이 소설에서 많은 독법 중 하나로 마크 트웨인이 쓴 허클베리 핀에 대한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야만스러운 탐정들] 2부에 나오는 수많은 목소리의 흐름을 미시시피 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이 소설은, 멕시코 시인 마리오 산티아고의 삶의 파편들을 어느 정도 충실하게 옮겨 쓴 것이다.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나에겐 행운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어떤 세대적인 패배와 한 세대의 행복을 반영하려고 했다. 여기서 행복이란 어떤 경우엔 용기를 뜻하지만, 용기의 한계를 뜻하기도 한다. 내가 보르헤스와 코르타사르의 작품에 영원한 빚이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내 소설은, 소설에 나오는 많은 목소리만큼이나 다양한 독법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고통스럽게 읽을 수도 있고, 또한 신나게 읽을 수도 있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326-327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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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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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히오 피톨


앞의 것도 그렇고... 어렵다...


세르히오 피톨


멕시코 작가 세르히오 피톨이 쓴 [카니발 삼부작]이 서점에 깔린 지도 몇 달이 지났다. 이 책은, 은밀하고 대체로 분류가 잘 안 되는 이 작가의 예외적인 세 편의 소설을 한 세트로 묶은 것이다. 그가 왜 은밀한 작가냐고? 왜냐하면 피톨은 카를로스 푸엔테스나 '붐'의 단물을 쪽쪽 빨아먹은 당대의 작가들과는 달리 항상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 멕시코에서는 그의 짝패가 없고 스페인어권 지역에서도 단지 극소수만이 그와 비교할 법하다. 그의 독서 습관에서도 볼 수 있는 점이다. 우리가 피톨에게 빚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르지 안드레예프스키의 기억할 만한 소설 [천국의 입구]의 번역으로, 그리고 항상 명민한 비톨트 곰브로비치에 대한 그의 독서에 있어서.

그는 다양한 여행을 하고 넓고 세계를 떠돌아 다님으로써 먼 곳에까지 푯말을 세울 수 있었다. 더불어 우리가 갑작스레 그의 존재를 확인하게 됐을 때 그는 이미 그곳에 없다. 이런 이유로 그는 그의 작품을 운 좋게 만난 소수의 독자들에 의해서만 찬사를 받는다. 다시 말해 다수의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장점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거대한 그림자이지만, 또한 거리 한가운데에서 고슴도치를 맞닥뜨렸을 때처럼 피하게 되는 거대한 그림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피톨은 살바도르 엘리손도가르시아 폰세보다 더 좋은 작가이다. 어차피 이 두 소설가 역시 많은 사람들의 독서 리스트에서 그다지 큰 의미를 차지하지 않는다.

[카니발 삼부작]에는 우선
1984년 에랄데 상 수상작인 [사랑의 행진El desfile del amor]이 포함되어 있다. 범죄소설이나 되돌릴 수 없는 역사처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멕시코의 거대한 미로 같은 소설이다. 다음으로 [신성한 백로를 길들이다Domar a la divina garza]. 지옥에 다가가는 소설이고, 피톨 식 유머 감각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마지막으로 [부부의 삶La vida conyugal]. 피톨의 다른 모든 작품에서처럼 유머가 부족하지 않고, 현실과 글쓰기에 대한 반영이 담긴 소설이다. 

피톨은 현재 예순여섯 살이고,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만 꼭 말해야만 하는 것이 있는데, 그는 계속해서 반항적이고 용기 있는 사람이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35-136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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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18. 14:48


POST : Entre paréntesis

죽음 앞의 리히텐베르크


리히텐베르크는 우리의 철학자이다. 이따금 그가 우리의 유일한 철학자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파스칼이 있다는 점이고(그는 췌장염으로 죽었다), 또한 디오게네스도 있다는 점이다(그는 최초의 농담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내가 "우리"라고 말할 땐 솔직히 말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위안을 찾는다, 리히텐베르크에게서, 그의 눈에서, 그의 감정적인 동요에서, 그의 의심에서 그리고 그위 취향에서. 때때로 이들은 전부 같은 것이다.

존경할 만한 괴팅건 시의 현자가 다음의 글을 쓴 지도 200년 남짓 되었다. "1799년 2월 9일에서 10일로 넘어가는 밤에, 나는 꿈을 꾸었다. 여행하는 중이었고, 여인숙에서,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길가에 있는 선술집에서 식사를 했다. 가게 안에서는 사람들이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옷을 잘 차려 입은 젊은이는 다소 의심스러운 표정을 한 채 스프를 먹고 있었다. 서 있든 앉아 있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은 채. 그는 두세 번 스프를 떠먹을 때마다 숟가락 하나를 허공에 내던졌다가 곧바로 그 숟가락을 되잡고는 차분히 스프를 삼켰다. 이 꿈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내가 습관적으로 관찰을 했다는 점이다. 많은 것들이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했다. (어떤 소설가에게도 그냥 떠오르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데 이르렀다. 주사위를 가지고 노는 사람들 옆에서 키가 크고 비썩 마른 여자가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게임에서 이기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녀가 답했다. 그리고 뭔가를 잃어버릴 수 있는지도 물어보았다. 없어요. 나에겐 중요한 놀이로 여겨졌다."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구절은 카프카를 떠오르게 하고 20세기 문학의 좋은 점을 떠오르게 한다. 이 구절은 또한 계몽주의의 요약본이고 그 위에서 문화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이 구절은 2월 24일에,
그러니까 꿈을 꾼 지 14일 뒤에 있었던 작가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마치 죽음이, 리히텐베르크와의 최후의 만남 2주 전에 그를 초대하고자 마음먹기라도 했었던 것처럼. 그럼 우리 괴팅건의 철학자는 비썩 마른 체구의 노부인 앞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분명히 그는 유머와 호기심을 가지고 행동한다. 지성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라고 할 수 있는.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34-135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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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18.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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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도브로와 파라와 함께 한 오후


내 친구 마르샬 코르테스-몬로이가 나를 라스 크루시스로 데려간 지도 2년이 다 되어 간다. 거기서 우리는 식사를 하고 니카노르 파라와 함께 오후를 보낸다. [시와 반시](초판 1954년)의 저자인 그는 언덕 중턱에 집 한 채를 가지고 있다. 거기선 광막한 대양이 보이고, 만의 반대편에선 비센테 우이도브로의 무덤도 보인다. 우이도브로의 무덤을 더 잘 보기 위해, 파라의 목재 테라스에 프리즘 쌍안경이 있으면 더 좋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것 없이도 [높은 매Altazor]의 저자의 무덤은 충분히 잘 보인다. 아니면 최소한 그를 좋아하는 만큼 잘 보인다.

저 숲이 보이나? 파라가 묻는다. 네, 보입니다. 어떤 숲이 보이지? 파라가 묻는다. 그가 교수였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위쪽 숲 아니면 아래쪽 숲? 오른쪽 숲 아니면 왼쪽 숲? 전부 다 보입니다. 나는 답한다. 동시에 달 세계 같은 황량한 경치를 응시한다. 좋아, 왼쪽 숲을 봐. 파라가 말한다. 아래쪽에는 고속도로 같은 게 있어. 선처럼 보이지만 선이 아니라 고속도로지. 보이나? 이제 고개를 들면 숲이 보일 거야. 그러니까, 고속도로이거나 지방 도로임이 분명한 스크래치가 보이고, 또한 숲이 보인다. 숲의 위쪽 부분에는 하얀 반점이 있어. 파라가 말한다. 사실이다. 테라스에서 보이는 숲은 검은 색에 가까운 어두운 녹색이다. 그리고 그 숲의 통일성을 가장 윗 경계에 있는 하얀 반점이 망가뜨린다. 하얀 반점이 보이네요. 나는 말한다. 그게 우이도브로의 무덤이야. 파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등을 돌려 방으로 들어간다. 마르샬이 그와 동행하자 순식간에 나는 혼자 남겨진다. 동시에 흔들바람이 솟아오른다. 해변에서 언덕으로 불어온 바람이다. 나는 하얗고 작은 반점을 응시한다. 그 밑엔 비센테 우이도브로의 뼈가 묻혀 있다.

잠시 후 뭔가가 내 바지를 끌어당기는 걸 느낀다. 우이도브로의 유령인가? 아니다. 파라의 고양이들이다.
집 없이 떠도는 예닐곱 마리의 고양이들이 매일 오후 스페인어권 생존 시인 중 가장 위대한 시인의 정원에 끼니를 챙겨먹기 위해 들른다. 마치 나처럼. 더 멀리 갈 것도 없이.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33-134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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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헬 플라네이의 유령


카탈란 화가 앙헬 플라네이의 이름 철자는 Ángel Planells. 카탈란어를 읽을 줄 몰라 구글 번역기 듣기 기능을 참고해 앙헬 플라네이라고 썼는데... (아무래도 틀렸겠지 -_-;) 혹시 읽을 줄 아시는 분 있으면 알려주시길...


앙헬 플라네이의 유령

겨울 오후에 가끔씩 블라네스의 중심가에서 앙헬 플라네이의 유령이 보일 때가 있다. 사람들이 말하길 그의 여자형제들의 집에서 올 때나 그의 조카인 제빵사 조안 플라네이의 집으로 갈 때. 아마도 조안 플라네이는 오늘날 가장 많은 앙헬 플라네이의 작품을 갖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따금씩 나는 조안 플라네이의 빵집에 들러 그의 삼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나에게 뉴 벌링턴 갤러리에서 있었던 1936년 런던 초현실주의자의 첫 번째 전시회 사진을 보여준 지도 꽤 됐다. 사진 안에서 앙헬 플라네이가 서명한 작은 크기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스페인 화가들 중 피카소와 도밍게스, 달리, 미로의 작품을 전시했던 런던 초현실주의자 전시회는, 세계 규모의 전복을 시도하려 했던 그룹의 혁명적인 활동에서 분수령이 되었다. 이후 플라네이에게 스페인 내전이 찾아온다. 그는 오랜 어둠의 시간 동안, 살아남기 위해 끔찍한 정물화를 그려야만 했고 바르셀로나에서 화가 수업을 해야만 했다. 그곳에서 열정이란 지옥의 패거리였던 사제와 수녀의 입에 담긴 공허한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시기 동안 플라네이는 뭘 배웠을까? 우리는 답을 알 수 없다. 어쩌면 굴복하는 일에 대해 완벽하게 연습했을지도. 어쩌면 모든 노력이 얼마나 공허한지 알게 됐을지도. 그래서 매년 여름 그는 블라네스에 올라와 여자형제들 집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의 그림에서 점차  초현실주의의 오랜 테마 - 그땐 이미 초현실주의가 지하 묘지에 잠들어 있을 때다 - 가 되살아났다. 그런 우울한 복귀에 대한 증거가 바로 그림 "알 수 없는 뭔가를 기다리는 선원Mariner esperant l'arribada de no sap què"(1974)이다. 블라네스의 중심 거리에서 그와 몇 차례 만났을 법도 하지만 그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본다. 나는 그가 가끔씩 우리 동네 파세오 마리티모를 걸어다니는 것을 본다. 사색에 빠진 가벼운 유령의 모습으로. 화가 앙헬 플라네이는 1901년에 태어나서 1989년에 죽었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30-131p), ANAGRAMA



Mariner esperant l'arribada de no sap què(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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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14.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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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마타스의 최근 책


한 달쯤 전에 봤던 글인데 이제서야 포스팅을 한다. [괄호 치고]에 언급되는 빈도수만 놓고 봤을 때 엔리케 빌라-마타스는 스페인어권 생존 작가 중에서 볼라뇨가 가장 선호하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아래 언급하고 있는 책은 작년 11월에 [바틀비와 바틀비들]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출간됐다. 출간될 거란 기대를 거의 하지 않았기에 더욱 반가웠다. 아래 글 서두에 나오는 내용과 관련하여 도움이 될 거 같아 원서 표지 이미지 파일 첨부한다.



빌라-마타스의 최근 책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것은 불안하다. 책 겉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에서부터 말이다. 사진 속에는 주말 복장을 차려 입은 세 명의 시골 청년이 등장한다.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채, 그들은 자부심 있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본다. 우아함이 부족하지 않은 자부심이고 무심하면서도 초연함이 느껴지는 자부심이다. 마치 우리들이 모르는 문학의 어떤 부분에 대해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젊을 뿐만 아니라 미남인 이 시골 청년들은 시골 길을 지나간다. 그리 넓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길을. 파종 중이거나 휴경 중인 밭 가운데서, 그들은 얼굴을 돌린 채 자신들을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의 렌즈를 똑바로 바라본다. 길에 멈춰서서, 그들은 긍지에 찬 표정을 띤다. 심연과 현기증을 위해 주조된 듯한 얼굴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바틀비와 바틀비들](아나그라마 출판사)의 내부에서 우리 독자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가벼운 산보와도 같은 빌라-마타스의 최근 책은 각주의 형태로 씌어졌고, 문학에 대한 심연과 현기증뿐만 아니라(비록 어떤 순간에는 이것이 유일한 논쟁거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류가 처하게 되는 인생의 한 단면에 대한 심연과 현기증에 의해 씌어졌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도전적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인생의 특정 순간에 글을 쓰지 않기로 결심한 작가들에 대해 글을 쓰는 작가의 태도가 도전적이고, 글쓰기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명확해지는 구역에, 늘 확실하다고 할 수 없는 우아함과 유머만을 무기로 장착한 채 돌파하는 것이 도전적이다. 이쯤 되면 예의상 좀 더 수사적인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소설인가, 아니면 문학(혹은 반문학) 수상작 선집인가, 아니면 기존의 분류에서 벗어난 잡다한 책인가, 아니면 작가의 일대기인가, 아니면 신문기사를 짜깁기한 것인가? 그 순간 내게 떠오른 유일한 대답은, 이 책은 다른 종류의 책이라는 것이다. 이전의 모든 것들을 혼합하여 만들어진 책. 어쩌면 21세기형 소설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단편소설과 신문기사와 연대기와 자서전을 끌어모아 만든, 말하자면 하이브리드 소설인 것이다. 이 책의 어떤 방식은 빌라-마타스의 다른 작품 [어림수로 끝내기 위하여Para acabar con los números redondo]를 떠오르게 한다. 1997년에 출간된 아주 근사한 책으로 내가 읽었던 정말 멋진 책들 중 하나이다. 거의 주목 받지 못한 채 지나갔으나 그 해 스페인에서 출간된 소설 중 최고의 작품이라는 데 의심을 품는 사람은 없다. 두 책의 기본 정신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시적인 에너지도 같다. 심지어 어떤 가벼움마저 유사하다. 하지만 [어림수로 끝내기 위하여]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던 점이나 그래서 충분히 만족하고 확신할 수 있었던 점이, [바틀비와 바틀비들]에서는 뒤늦은 미궁이 된다. 마치 상징주의 화가들의 그런 미궁처럼. 또한 그것은 열정이고 출구를 향한 탐구이며 이따금씩 백조의 노래(혹은 울부짖음)이다. 그것은 포켓 사이즈의 지옥(혹은 보이지 않는 지옥)을 분류하고 주워 모은 작가의 모든 가치에 대한 것이다. 그런 지옥은 지구적인 차원에서 거대한 지옥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 책은 말한다. 인생의 특정 순간에(광휘의 순간이거나 절망의 순간이거나 광기의 순간이다) 글쓰기를 그만둔 작가들뿐만 아니라 빌라-마타스 작가 본인처럼 절대 글쓰기를 그만두지 않을 작가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 죽음에 대해서, 죽음 앞에서 무용한 행위들 -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를 구하거나 구할 수 있다 - 에 대해서, 작가들뿐만 아니라,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독자가 이해하는 점인데, 사실상 독자들에 대해서, 모든 층위의 인류에 대해서, 살아 있는 사람과 삶을 포기한 사람에 대해서, 모험에 대해서, 죽음과의 싸움에 대해서, 책을 읽는 사람과 책 읽기를 그만둔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를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한 생각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이 모든 것이 고작 179페이지 분량의 책 속에서 드러난다. 빌라-마타스(
그는 당대 스페인 소설판에서 독보적인 존재다)의 유머 감각과 우아함에 의해 부드러워진 책이다. 그의 도전적인 태도는 옷매무새가 단정한, 사진 속의 주말 복장을 한 시골 청년의 그것과 유사하다. 비록 빌라-마타스는 내가 알고 있는 시골 청년의 모습과는 차이가 많이 나지만. 비록 빌라-마타스는 일요일마다 일을 하기는 하지만.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286-288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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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1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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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천사들


오래 전, 1966년에, 미국 기자 헌터 S. 톰슨은 '지옥의 천사들' - 미국 서부의 오토바이 족 - 에 관한 을 한 권 썼다. 그 책으로 인해 당황해 하던 독자들은 도시 패거리들, 그러니까 60년대 '헬스 엔젤스'의 가장 폭력적인 특성들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전국을 질주하면서 흥청망청 맥주를 마셨고 싸움에 몰두했다. 지금으로선 피로 물든 싸움이라기보다는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싸움이다. 물론 '천사들'의 몇몇 싸움이 피로 범벅이 됐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의 미학적 미장센은 웨스턴 시대의 신화와 그 명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무법자desperados"로서의 명성이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자유와 무례함을 선택했다. 젊은 프롤레타리아 백인인 그들은 마초면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가방끈이 짤았고 임시직을 전전했다. 명예 아리아인의 미래 멤버라고 말하고 다니던 사람들이 미국의 교도소에서 불어나던 시기였고 '천사들'의 꿈과 끝없는 고속도로가 자신들 내적인 공허함 속에서 사그라지던 때였다. 톰슨은 '천사들'과 몇 달을 함께 살았다. 정신분열증적으로, 그리고 녹초가 된 상태로. 그 결과가 이 야만적인 책이다. (톰슨이 썼던 모든 책들의 어떤 부분들은 늘 '천사들'보다 훨씬 야만적이다) 3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읽을 만한 그의 책에서 우리는 생생히 되살릴 수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오토바이 족들의 디오니소스적 파티를, 비트닉들의 축제와 히피족들의 탄생 축제를. 난교 파티와 지저분한 성매매를(그 안에서 '천사들'은 전문가였다), 경찰들의 침략을, 피도 눈물도 없는 조직을 이념적으로나마 갱신하려 했던 알렌 긴스버그의 공허하면서도 천진난만한 시도를. '지옥의 천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 미국 서부에는 그들 일부가 남아 있지만 그들은 더이상 어느 누구에게도 공포심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들의 명성은 헐리우드의 기념품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 하켄크로이츠 오토바이 족들에게 엄청 무시당했던) 멕시코인들나 흑인들의 어떤 조직이라도 하룻밤이면 '천사들' 전부를 제거할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29-130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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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4.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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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마스 루나, 왕자


 얼마 전에 어느 왕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름은 디마스 루나.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이따금씩 그를 디마스 문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가 교황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의 혈통이 발렌시아 영토에서가 아니라 톨레도의 척박한 땅에서 유래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그의 핏속에 이제는 잊혀진 어느 바티칸인의 인자함이 들어 있다는 사실. 그가 자신의 친구라든지 고객이라든지 직원 들을 대하는 걸로 충분히 알 수 있다. 반대로 그의 호기심은 무궁무진하다. 내가 아는 한 그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블라네스의 뜨거운 여름 동안 네 가지 이상의 언어를 다룰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관광객들이 도착하면서 지금은 심지어 푸시킨의 언어에서 몇몇 말들을 서툴게나마 하고 있다. (
만약 푸시킨이 그가 하는 말을 듣는다면 자신의 무덤 속으로 되돌아갈 것이 틀림없다.) 그의 수호천사는 [지중해]다. 그가 가장 애호는 영화. 언젠가 그는 굉장히 특이한 칵테일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 요레트 데 마르에서 열린 어느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보드카, 우유, 몇 개의 달달한 알코올과, 지금은 기억 나지도 않는 많은 것들, 단순히 장식을 위해 준비되어 있던 많은 것들을 혼합한 칵테일로 말이다. 블라네스에서 디마스 루나와 함께 있으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그 누구도 절대 완전하게 혼자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스페인식 선술집의 부패하지 않는 정신이 그의 안에 살고 있다. 그는 잘 살기 위해, 선을 행하기 위해, 그리고 누구의 삶도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28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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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2. 30.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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