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 Bolaño!

POST : Entre paréntesis

비행기


남아메리카에서 돌아오는 어느 날이었다. 밤이었고, 비행기는 브라질 위를 날고 있는 듯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비행기는 약한 불빛만 켜둔 채 날고 있었다. TV에서는 (내 생각에) 코믹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영화는 소리 없이 흘러갔다.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만을 위해, 잡식성 영화 마니아들만을 위해. 그때 갑자기 확성기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우리에게 안전벨트를 착용하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영어로만 말하는 스튜어디스가 비행기 통로를 서둘러 지나갔다. 우리를 깨우면서, 안전벨트를 확인하라고 말하면서. 불이 켜졌고 그들은 우리에게 안전벨트를 착용하라고, 새로운 통지가 있을 때까지 안전벨트를 풀지 말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그렇게 했고 계속해서 잠을 잤다. (잠을 자지 않던 사람들은 빼고.) 비행기가 난기류 지대에 진입했다. 비록 비행기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떨림을 느꼈음에도 우리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마치 다른 꿈이 우리의 꿈 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 마냥. 잠 자는 동안 꿈 속에서 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자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때 비행기가 심하게 요동치더니 추락하기 시작했다. 잠을 자지 않고 있던 아내가 우리 아이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눈을 떴고 그와 동시에 비행기의 모든 불빛이(이미 희미한 상태이긴 했지만) 꺼져버렸다. TV와 코믹 영화도 꺼졌다. 기내는 캄캄했으며 승객들 모두가 어둠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비행기는 기막힌 속도로 추락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기막힌 어휘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내와 아이를 끌어안았을 때 느꼈던 감각은 현실이었다. 농밀하면서도 진중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현실. 거기에 비현실은 결단코 없었다. 빛도 없었고 영화도 없었으며 어떻게 하라고 말해줄 스튜어디스도 없었다. 한탄과 절규만이 있을 뿐. 전 인류가 알고 있던 현실에 대한 오랜 감각. 그러고 나서, 십 초 정도 지난 뒤, 비행기는 안정되었다. 몇몇 사람들은 다시 잠을 잤다. 다른 사람들은 위스키를 부탁했다. 승객들 중 한 명은 어떤 스튜어디스가 조리실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걸 봤다고 단언했다.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31-132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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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2. 2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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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네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크리스마스를 나흘 앞둔 기념(?)으로, 볼라뇨가 쓴 크리스마스 이야기. 과연, 볼라뇨 답달까...


블라네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겨울에 코스타 브라바(*브라바 해변)의 몇몇 마을은 유령의 마을처럼 보인다. 특히 여행객들을 위해 만들어진 일부 지역들. 휴면기에 접어든 그런 곳들은 잠자는 도시나 악몽의 도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높은 건물들과 자그마한 아파트들이 있는 그런 곳에 있다보면 실수했던 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늘 후회하지만 이유는 잘 알 수 없는 일들. 아마도 더 잘했어야 하고 그럴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 때문이리라. 아니면 그저 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마치 손자나 클라우제비츠가 절대 하지 말라고 조언했던 그런 전투들처럼. 사실상 손자와 클라우제비츠는 이길 수 있는 확신이 있는 전투를 하라고 조언했을 뿐이다. 어느 날 텅 빈 아파트들이 모여 있는 이 동네를 지나다가 얼핏 친구를 보았다. 그는 60년대에 지어진, 어쩌면 알루미늄 진폐증의 유발 원인이었을지도 모를, 어느 유령의 건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는 동박박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 비록 그가 변장을 했음에도, 그리고 빠르게 어두워져가는 시간이었음에도, 나는 그를 알아보았고 그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정해져 있는 것처럼, 다른 두 명의 동방박사가 그와 동행하고 있었다. 두 명 다 흑인이라는 걸 알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가 그들을 소개했다. 그들은 감비아 출신으로 블라네스 교외에 있는 과수원에서 일을 하곤 했으나 만났을 당시엔 실직 상태였다. 흑인은 한 명만 필요했어. 친구가 말했다. 근데 가스파르 역을 할 백인을 찾을 수가 없더라. 우리는 완전히 텅 빈 그 거리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근데 여기서 뭐해? 내가 물었다. 나 여기 있는 아파트에 살거든. 친구가 답했다. 여기에 동방박사 옷이 있어서 여기에서 옷을 갈아 입지. 차까지 그들과 동행했다. 흑인은 많은데 백인은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애가 있으면 어떻게 할 거야? 나는 그들이 떠나기 전에 물어보았다. 친구는 미소를 띠더니 이렇게 말했다. 시대가 변했잖아. 그리고 애들이 그걸 제일 먼저 알고 있어.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27-128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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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2. 2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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