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re paréntesis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페르디두르케 추종자들이. 몇 달 전, 모순으로 가득한 20세기에서 가장 빛나는 책들 중 하나가 슬그머니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페르디두르케](Quaderns Crema 출판사)이다.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대표작으로 1937년에 처음 출간된 작품이다. 스페인어 번역본은 카페 렉스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모임을 통해 나왔다. 그 책이 무례함과 관대함에 대한 이정표 중 하나가 되었다는 건 의심할 바가 없다. 즉, 우리 세기 기쁨의 문학에 대한 이정표 중 하나인 것이다. 그 전설적인 번역은 쿠바 작가인 비르힐리오 피녜라가 주로 맡아서 했는데, 근처 서점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절대적으로 발견하기 어렵다는 얘기는 아니다) 스페인 반도의 독자들은 곰브로비치의 가장 핵심적인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것이다. [페르디두르케]의 프랑스어 번역본이나 이탈리아어 번역본, 독일어 번역본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우리는 이 책을 찾기 위해 그리 멀리 갈 필요가 없게 됐다. 카탈란어를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금세기 핵심적인 소설들 중 하나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호주머니에 이천 페세타만 있으면 된다. 안나 루비오와 저지 슬라우미르스키의 훌륭한 번역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굉장히 모범적인 편집자, Jaume Vallcorba Plana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출판 목록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보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로드 바이런의 [카인], 휠더린의 [엠페도클레의 죽음], 노발리스의 단편들. 뿐만 아니라 Quim Monzó, Ponç Puigdevall, Maurici Pla 같은 당대의 카탈란 작가들(단지 몇 명만 말했을 뿐이다)도 만날 수 있다. [페르디두르케]를 출판하려고 했을 때 Vallcorba의 머릿속에선 어떤 생각들이 오고갔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것이든 생각했으리라. 수익을 올릴 거라는 점만 빼고.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곰브로비치 출간을 착수한 편집자가 계속해서 뭔가를 계획할 것이라는 점이다. 위대한 폴란드 작가의 작품을 번역 출간할 수 있는 살아있는 언어, 카탈란어로 말이다. 이 언어 속에서 필리도르(*[페르디두르케]의 속 이야기의 주인공)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페르디두르케 추종자들이.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17-118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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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2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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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re paréntesis
블라네스에서의 평온한 날들. 나는 새로운 칠레 문학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그 수업을 하는 사람도 나고 받는 사람도 나뿐이다.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비록 이따금씩 학생으로서의 게으름 탓에 머리털이 쭈삣 일어설 때가 있긴 하지만. 강사로서의 서투름 탓에 갑작스러운 졸음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 이런 공격을 기면발작이라고 한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아이다호)에서 리버 피닉스가 겪었던 것이다. 하지만 리버 피닉스에겐 키아누 리브스가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피닉스에겐 자신의 졸린 머리를 기댈 곳이 있었다는 얘기다.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곤 책밖에 없다. 책은 이따금씩 악몽을 유발한다. (무엇보다 책과 베개를 혼동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잠을 자고 책을 읽는다. 꿈 속에서 내가 말한 바에 의하면, 칠레 문학은 많은 작가들과 비평가들과 독자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악몽이다. 현실적인 악몽이 강한 충격으로 나를 깨운다. 나는 거리로 나간다. 저녁 일곱 시. 은행으로 간다. 은행 문을 열자 지팡이를 든 남자가 내 앞으로 끼어든다.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 그는 일전에 맥주병을 던져 바의 유리창을 깬 적이 있다. 들어가도 되죠? 그가 물었다. 물론이죠. 그에게 대답했다. 내가 현금 자동 입출금기에서 돈을 뽑는 동안 지팡이를 든 그 남자는 모퉁이에 서서 자신의 예금 통장을 읽고 있다. 내가 나갈 때 그가 작별인사를 했으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예금 통장을 마치 소설책처럼 읽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팡이를 든 그 남자는 상대적으로 교양 있는 사람이다. 다른 바에 있을 때, 그는 피터 팬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술고래처럼 술에 취해 있었고 옛날엔 자신이 부자였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선 눈물을 흘렸다. 리버 피닉스가 피터 팬처럼 좋은 역할을 맡았으면 어땠을까. 은행에서 멀어지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시 칠레의 새로운 문학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람들이 말하길, 새로움은 마누엘 로하스에서부터 현재까지라고 한다. 나의 발걸음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게임 가게로 향한다. 가게 주인 이름은 산티. 나의 친구다. 나는 그에게 삼천 페세타의 빚이 있다. 실은 그 때문에 은행에서 돈을 인출했던 것이다. 가게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단지 산티만이 가게를 보고 있을 뿐이다. 그를 도와주는 대신, 나는 가게 모퉁이에 조용히 서서 지팡이를 들고 있었던 그 남자처럼 사람들을 관찰한다. 게임을 살펴보고 있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안 좋아진다. 나는 눈을 감는다. 갑자기 의심할 바 없는 칠레 억양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고 세 명으로 된 한 무리를 발견한다. 한 명은 무시무시하게 생긴 남자애로 중성적인 억양으로 말한다. 다른 한 명은 남자애의 엄마로 콜롬비아 억양 비슷하게 말한다. 나머지 한 명은 짙은 흑발의 남자로 아까 처음에 말했던 사람이다. 그는 칠레인이다. 이 삼인조는 쫄바지를 입고 부츠를 신었다. 그들의 체구는 작다. 남자애는 터프해 보이지만 그리 영리할 것 같지는 않다. 순한 담배를 피우고 있지만 자신이 어리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다. 그의 콜롬비아인 엄마는 40대거나 그보다 조금 적은 걸로 보인다. 그녀의 얼굴은 확실히 거칠지만 지금은 평화로워 보인다. 콜롬비아 여자와 커플인 칠레 남자는 남자애의 아버지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는 삼십대가 틀림없고, 자신의 양아들만큼이나, 혹은 양아들보다 더욱 게임 구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들 삼인조는 지옥에서 막 탈출한 것 같다. 콜롬비아 여자는 오늘 좋은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두 아이들은 게임을 하면서 한 주일을 보낼 준비를 한다. 나는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에 대해 생각한다. 생생한 현실에 대해 생각하고 새로운 칠레 문학에 대해 생각한다. 산티가 새로 나온 컴퓨터 게임을 보여주길래 슬쩍 본다. 세틀러라는 이름의 게임으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와 비슷할 게 틀림없다. 그에게 갚아야 할 돈을 건네주고 가게에서 나온다. 집에 가는 길에 꿀과 카모밀차를 산다. 나는 다시 집에 있다. 다시 나의 수업에 참여한다. 책을 읽는 것이다. 거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나는 책에 기대 잠을 자고 꿈을 꾼다. 불면증과 기면발작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지도 책이다. 그 후 어둠 속에서 눈을 떠 벽을 바라본다. 절룩거리는 남자의 얼굴과 지옥에서 온 듯한 삼인조의 얼굴이 러시모어 산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생존자들은 어떤 작가들을 읽는가? 나는 큰 목소리로 묻는다. 위선자들을, 나의 형제들을.
ㅡ Roberto Bolaño, [Entre paréntesis](115-117p), ANAG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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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24.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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